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사도행전 16,11-15 요한 15,26─16,4ㄱ
인간은 종교적 존재라고들 말합니다.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종교가 있고,
사람들은 참 다양한 신을 섬기며 살고 있습니다. 신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으니
세상은 늘 평화와 사랑으로 가득할 것만 같은데, 실제 모습은 그렇지 못합니다.
인류 역사의 책장을 조금만 뒤적여 보아도 신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진 전쟁과 살인을
너무도 쉽게 찾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저마다 또한 종교마다 믿고 따르는 신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이 믿는 신이 아니면 다른 사람이 믿는 신은 곧바로 적이 됩니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의 종교는 받아들일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이단이 됩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 서로 죽여 왔고, 지금도 죽이고 있습니다.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오늘 복음의 한 구절입니다.
그렇게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하며 누군가는 예수님을 죽였고, 누군가는
그분의 제자들과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으며, 또 누군가는 그리스도를 살해한 사람들이라는
죄명으로 유다인들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와 신을 절대화하는 순간, 그는 신의 적대자가 됩니다.”
우리 또한 저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채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의 모습이
진정한 하느님의 모습인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자신이 만들어 낸 하느님과 신앙을 절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이 상대화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참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하루는 내 하느님을, 내 신앙을, 내 교회를 유연한 사고로 바라볼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며,
그렇게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수원교구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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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사도행전 16,11-15 요한 15,26─16,4ㄱ
복음을 읽을 때 간혹 실수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이들을 내 편으로 여기고
그렇지 않으면 무조건 반대편으로 갈라서 내 편, 네 편을 갈라서 사고하는 습관입니다.
90년 무렵 회당에서 그리스도인을 쫓아낸 유다 사회는 하느님을 저버리고 메시아를 포기해서
한 행동이 아닙니다. 유다 사회는 그 누구보다 하느님을 열심히 믿었고 따랐으며 찬양하였습니다.
유다 사회가 믿었던 하느님은 바빌론 유배(기원전 587-538년)를 거치며 세상 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주 하느님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이의 모든 것이신 하느님을
유다 사회는 유독 자신들만의 하느님으로 포장하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모든 이의 하느님께서 우리만의 문화와 관점 아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다른 민족과 다른 문화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하느님을 따르고 찬미드릴 수 없다는 것을
강변한 것이 유다 사회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유다 회당에서 쫓겨난 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유다 사회가 굳건히 간직한 하느님에 대한 유다인들만의 인식의 틀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민족주의의 폐쇄성이 창조주 하느님의 개방성을 가로막아 버렸습니다.
내 편이 아니면 무조건 반대편이라는 폐쇄성이 세상의 다양한 관점과 개방성 속에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거부하게 됩니다.
국립 5·18 민주 묘지에는 저와 같은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있습니다.
저는 이를 통하여 저의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타인의 아픔과 불편함, 타인의 고통과 슬픔이 곧 자신의 일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우리는 모두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고 모든 사람과 피조물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증언하는 신앙인이니까요.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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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사도행전 16,11-15 요한 15,26─16,4ㄱ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호자, 진리의 영을 보내 주시겠다고 언약하십니다.
당시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내다보고 계셨기에 당신 대신에 진리의 영,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근본적으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제자들은
어떠하였습니까? 예수님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였지요. 오랫동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자리다툼이나 하다가, 예수님께서 위험에 처하시자
다들 제 목숨이나 구하려고 도망마저 갔지요. 더욱이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마저
예수님께서 붙잡히시자 예수님을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시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 말씀처럼 성령께서 오시자 제자들은 완전히 변하고 맙니다.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지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다니지 않았습니까?
그 결과 제자들은 회당에서 쫓겨나게 되고, 심지어 죽음마저 당하고 맙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진정 누구신지, 깨닫게 해 주시는 하느님의 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말씀이 이 시대 언어와 문화, 관습을 통해 제대로 이해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느님의 숨결이지요.
그런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도록 정성을 다해 하느님의 은총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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