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우 바오로 신부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사도행전 25,13ㄴ-21 요한 21,15-19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것이 바로 참다운 기도입니다.
베드로는 진심어린 고백의 기도를 통해 자신을 치유해 나갑니다.
갈등을 겪지 않고서는 믿음이 깊어질 수 없습니다.
고통을 겪지 않고서는 온전히 다른 이들을 위해 봉사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 우리는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한 적이 있는지를 다시 물어 보게 됩니다.
주님 사랑의 거룩한 힘과 은총은 베드로를 놀라운 사랑의 사도가 되게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주님께 확신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도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도움을 받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 삶에 책임을 집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 곁에 존재하시기에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곁에 계시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에는 구원의 힘이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를 늘 새롭게 합니다.
사랑은 베드로를 다시 자유롭게 합니다.
주님을 받아들일 때 변화가 이루어 집니다.
삶의 고통과 어려움까지 은총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사랑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살아오면서 부끄럽고 아팠던 상처까지도 기꺼이 고백하게 만드는 주님 사랑 안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가장 행복한 하루가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언제나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진실된 사랑의 시작입니다.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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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궁렬 요셉 신부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사도행전 25,13ㄴ-21 요한 21,15-19
그분이 지금 나에게 물으신다 "사랑하느냐?"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가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장담을 하던 베드로였는데 이런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베드로는 죄와 허물이 많은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것은 아닐까?
틈만 나면 하느님 곁을 떠나고 싶은 인간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을 상상해 보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첫마디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였다. 그분은 베드로의 잘못을 책하지 않으셨다.
나는 40일의 피정을 한 적이 있다.
마지막에 그분을 감히 뵈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데 내가 만난 그분은
나의 과거를 알고 계셨고 놀랍게도 40년 전 내가 당신을 애타게 찾았던 시절을
기억하고 계셨다. 그분은 나의 과거의 잘못을 기억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당신과 나누었던 사랑을 기억하고 계셨다.
그분은 모든 인간이 저지른 죄악은 기억조차 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세상의 부모들을 보라. 자녀들이 자라면서 잘못한 것들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는 부모가
어디 있는가? 기껏해야 “네가 자랄 때 내 속을 좀 썩였느니라”가 아닐까?
그분이 지금 나에게 물으신다.
“마태오의 아들 요셉아, 내가 너를 이토록 사랑하는데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느님이 나를 그토록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내가 그분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데
그런 고백을 하는 베드로가 무척 부럽다.
전주교구 나궁렬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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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사도행전 25,13ㄴ-21 요한 21,15-19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입니다.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한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자신 있게 답합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이어서 베드로에게 사명이 주어집니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이 같은 대화는 세 차례 반복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에서는 흔히 아가페의 사랑을 뜻하는
‘아가파오’(사랑하다) 동사가 쓰이는데, 베드로의 응답에서는 우애 또는 인간적 친밀함과 더
연결되는 ‘필레오’(사랑하다, 좋아하다, 친구가 되다) 동사가 쓰인 것입니다.
세 번째 질문에서는 예수님께서도 ‘필레오’로 물으시고, 베드로는 여전히 같은 단어로 응답합니다.
예수님께서 눈높이를 맞추신 듯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를 향한 사랑과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이렇게 다른가 봅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베드로의 사랑 고백으로 연결되고, 이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베드로에게 주어진 사명, 곧 ‘예수님의 어린양들을 잘 돌보는 것’에 이어집니다.
이처럼 주님에 대한 사랑은 주님의 양들인 형제들을 보살피고 섬기며 그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데에서 완성됩니다. 또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형제들에 대한 사랑과 연결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결코 나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가장 완전히 드러납니다. 베드로도, 그리고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아프리카 우간다의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도 그것을 몸소 증언하였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시어 살아 계시는 예수님과 언제나 함께 있음을 깨닫는다면,
세상의 미움과 박해, 시련과 고통, 그리고 죽음까지 그 어떠한 것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이기신 구원자이시며 주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게 될 것입니다.
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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