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근 사바 신부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창세기 3,9-15.20 요한 19,25-34
성모님께서는, 아드님과 함께 고통과 죽음을 체험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직전에, 사랑하시던 제자에게 성모님을 맡기시고,
그 제자를 성모님께 아들로 제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새로운 모자 관계를 맺어 주신 것입니다.
이름이 나오지 않는 그 사랑받는 제자는, 일반적으로 요한 사도라고 받아들이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내적으로 깨닫고, 그분의 계시를 증언하도록 부름을 받은
모든 제자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교회의 어머니이시며,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의 청원을 중재하십니다.
우리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이를 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어려움에 놓인 사람들을 대신하여 아드님께 간청하시는 자상한 모습을
보여 주셨고,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이제 신앙인들은 성모님을 통하여 주님께 간청을 드릴 수 있고,
또 주님께서 그 간청을 들어주시리라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모자 관계는 또한 예수님께서 떠나신 뒤 남아 있는 공동체가 지닌
일치와 사랑의 특징을 대변합니다.
교회는 하느님 아드님의 희생으로 시작되었고, 예수님의 애제자와 성모님의 일치는
하느님 교회의 사랑을 미리 보여 주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관계보다 모자 관계는 끈끈하고 강하며, 애정으로 묶여 있는 관계입니다.
그 안에는 모든 논리를 뛰어넘는 사랑과 일치가 담겨 있고,
그것이 교회의 특징적 모습입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이성근 사바 신부
**********
한재호 루카 신부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창세기 3,9-15.20 요한 19,25-34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아드님을 두고 성모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비통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아드님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담아 그 곁에 ‘서 있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행동에서 예수님을 향한 성모님의 믿음이 얼마나 크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다던
베드로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형수가 되신 마당에 그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이라도 되면
큰일 날 것이라고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로마 군사들의 무자비한
폭력과 위협을 눈앞에 두고서도 그 자리에 서 계셨습니다.
영어로 ‘이해하다’(understand)는 말은, ‘밑에’(under)라는 말과 ‘서 있다’(stand)가 합쳐진 것입니다.
곧 누군가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 밑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밑에 묵묵히 서 계신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그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와는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고 에덴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선악과 나무에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 먹음으로써 온 인류의 죽음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시어 골고타 언덕 한가운데에 있는
십자가 곁에 끝까지 서 계심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의 열매를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예수님의 어머니에서 나아가 새 인류의 어머니, 새로운 하와가 되셨습니다.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
***********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창세기 3,9-15.20 요한 19,25-34
오늘 복음을 보면 두 여인 간의 만남이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의 만남이지요.
태어날 아기들의 운명이 어찌 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여인들의 마음은 얼마나
쓰렸겠습니까? 그런데도 서로 격려하면서 주님께 찬미를 드립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이처럼 주님에 대한 신뢰를 통해서만 앞날에 대한 희망이 나옵니다.
지금은 나의 처지가 비천하지만, 언젠가 귀한 존재가 되리라는 희망입니다.
비록 내가 슬픔에 젖어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기쁨으로 넘치리라는 희망이지요.
마리아는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라고 응답합니다.
비천한 사람은 낮은 신분, 또는 매우 겸손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돈도 지위도 명예도 없기에 하느님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또는 재산이나 명예는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주님 앞에서 자신은 무력한 존재임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비천한 자신을 택하신 주님을 찬미하며,
주님께서는 하실 수 없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모든 이에게 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우리 삶에 기쁨이 넘치려면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느껴야 합니다. 나의 생활을
늘 되돌아보면서, 그 가운데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심을 발견해야 하겠습니다.
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