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칼해 보이는 남자
장성숙/ 극동상담심리연구원, 현실역동상담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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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을 지도해주시는 스님이 제주도에 선원을 마련하겠다는 원을 가지고 제주도로 내려가셨다. 사실, 나는 비행기를 타야만 갈 수 있는 그곳이 멀다고 여겨져 아쉬움을 가졌었다. 하지만 몇 차례 다니다 보니 장시간 운전하지 않는 이점도 있었다. 게다가 저가 항공기가 많아 시간만 잘 맞추면 비용도 그리 많지 않았다.
몇 달 전에 발간한 「그때그때 가볍게 산다」는 책을 스님께 드렸더니, 몇 꼭지 읽어보시고는 거기에 나온 어떤 농부와 비슷한 사람이 제주도에 있다고 하셨다. 책에 서술된 농부는 인근에 사는 누님이 칠순 잔치를 하지 않았는데, 동생인 자기가 어찌 칠순 잔치를 하느냐며 아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사람이었다.
스님이 아신다는 분은 목제 상으로 재산을 꽤 모았어도 8~9천 원 넘는 식사를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노부모가 해외여행을 하지 않았는데, 어찌 자기가 해외여행을 가느냐며 마다한단다.
이러한 말을 듣고 요즈음에도 그러한 분이 있는가 하여 나는 감동하였다. 부모가 누리지 못한 것을 자기가 누리는 것에 죄책감이나 부담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분명 꼿꼿한 성품의 소유자일 거라고 믿었다. 해외여행이란 돈만 있으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흔한 것에 불과한데, 그러한 것도 예사롭게 처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칼칼한 사람을 그리워했다. 착하거나 친절한 사람은 꽤 있어도 꼿꼿한 사람은 의외로 드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일러 칼칼하다고 할 수 있을까? 주위의 흐름이나 유행에 휩쓸리기보다 자기 나름의 소신이나 기준을 지닌 사람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많이 배웠든 못 배웠든 그런 것에 위축되지 않는 사람, 허름한 옷을 입었어도 자족할 줄 알며 나누고자 하는 사람, 자신의 위치에 걸맞은 구실이 뭔지 분명히 알고 수행하는 사람. 이 정도면 칼칼한 사람이라고 일컬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마침내 제주도 선원이 마련되었고, 그 개원식에 참석했다. 행사를 마친 뒤 몇몇 사람이 돌아가며 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어느 작달막한 남자가 자신을 소개하는데, 전에 들었던 그 사람이지 싶었다. 그리하여 인사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그분에게 해외여행을 가지 않는다고 하는 분 아니냐며 끼어들었다. 생면부지의 여자가 그렇게 처신하는 게 결례인데도 스님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고 나는 아는 체했다.
그러자 그분은 겸연쩍은 듯 주춤하였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나 역시 더는 이어갈 명분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내심 그분이 어떤 신념이나 가치관으로 뚝심 있게 살아나왔는지 궁금했다.
다음날 상경하면서 그 사람에게 그토록 관심을 기울였던 이유가 뭔가하고 자문해보았다. 여성의 목소리가 커진 현대사회에서 기죽은 남자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누가 뭐라든 당신 고집대로 사셨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아직 명확하진 않다. 아무튼 좋은 게 좋다고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기보다 다소 손해를 보거나 고생스럽더라도 자기 소신껏 사는 사람을 보면 뭔가 듬직하고 멋져 보인다.
자문해보다 곧이어 잘 알지도 못하는 대상에게 꼿꼿한 성품이니 칼칼한 사람이니 하며 온갖 것을 뒤집어씌워 놓고 망상을 펴는 자신을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빛이 강하면 어둠이 짙다고 성깔 있는 사람 옆에는 으레 치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지 않던가. 그분도 주관이 강한 만큼 가족들이 그만큼 힘들어했을지도 모른다. 가령, 아내 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처럼 해외여행을 다니고 싶어 할 수도 있고, 여유가 있으면 넉넉하게 누리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자녀들 역시 가장인 아버지가 순순히 따라주지 않는 사항에 대해 고달파했을 수도 있다.
불교에서는 언제 어디서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도록 가르친다. 그리하여 대상이나 사물이 지닌 본질적인 세 가지 특성, 즉 무상(無常) 고(古) 무아(無我)를 확실히 보게 되면 삶이 가져다주는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집착이나 분노 또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 세 가지를 명확하게 직시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불교의 가르침을 익히겠다고 선원을 드나들면서 나는 다름 아닌 그곳에서 생각의 유희 속에 마냥 빠져들었다. 몇몇 끌리는 점이 있다고 하여 그렇게 이상화를 시켜놓고 마냥 호기심을 펼쳤으니 말이다. 원래 그러고들 사는 게 세상살이라지만, 만약 그분이 이러는 나를 속속들이 들여다본다면 얼마나 실없다고 여기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혼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첫댓글 “주위의 흐름이나 유행에 휩쓸리기보다 자기 나름의 소신이나 기준을 지닌 사람. 많이 배웠든 못 배웠든 그런 것에 위축되지 않는 사람, 허름한 옷을 입었어도 자족할 줄 알며 나누고자 하는 사람, 자신의 위치에 걸맞은 구실이 뭔지 분명히 알고 수행하는 사람.”
이것이 정동문님이 그리는 이상형의 인격인가 보지요?
나타니엘 호오손의 소설 “큰 바위 얼굴”을 아시지요? 그 소설의 주인공 어니스트는 자기 동네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그 큰 바위 얼굴에 걸맞는 훌륭한 인격의 인물이 이 동네에 나타날 것으로 믿고 열심히 기다리지만 그런 사람일 거라고 믿고 혹시나 하고 마음에 점찍어둔 사람을 만나보면 아니고… 이런 식으로 평생을 살았는데 어느 날 해질 녘에 어느 사람이 석양빛을 받고 서 있는 어니스트를 가리키며 큰 바위 얼굴의 전설에 예언된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 합니다.
어니스트는 전설 속의 그 큰 바위 얼굴의 사람의 인격을 이상형으로 알고 평생을 살다보니 자기 자신이 그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지금 정 동문님의 글을 읽고 나니 그 이야기가 생각이 나는군요.
댓글을 읽다보니 황송함이 엄습합니다. 사람은 끼리끼리 만난다고 제가 이상형을 그리고 있노라면, 언젠가는 그렇게 되어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저 멀리 요원한 일인 것 같아 그런 사람을 기다립니다.
이 선생님이 들려주신 '큰 바위 얼굴'을 저도 잘 기억하고 있답니다. 그래도 그 이야기를 누군가가 들려주니 즐겁습니다.
그리고 저는 정씨가 아니가 장씨 랍니다. ㅎ ㅎ ㅎ
@장성숙 죄송합니다. "장"을 "정"으로 읽었군요. ㅎㅎㅎ
저 큰바위 얼굴은 어느날 갑자기 무너져 지금은 사라지고 없읍니다. 저는 다행히 그 전에 그곳을 한번 방문해서 본 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