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아모스 2,6-10.13-16 마태오 8,18-22
한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에게 예수님의 존재는 말씀과 행동으로 그를 가르치고 이끌어 주시는
‘스승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께 배우기를 바랍니다.
“어디로 가시든지”라는 표현은, 온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시던 예수님의 일상을
떠오르게 합니다(마태 4,23; 9,35 참조).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예수님께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미 ‘주님’이십니다.
그런 그에게 당장 해야 할 중대한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바로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장례’라는 자식된 도리를 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인륜대사의 중요한 의무마저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드시며 당신을 따르라고 명하시는
이 분은 도대체 누구이십니까? ‘주님’이시고, ‘하느님’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이야말로
우리가 머물러야 할 ‘집’이며 궁극적으로 우리 ‘구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주님이시며 또한 생명의 주님이시기에
죽음과 삶은 오직 그분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을 알고 믿으며 따르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드린 고백을 기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스승’이시며 ‘영원한 생명의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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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아모스 2,6-10.13-16 마태오 8,18-22
율법 학자 가운에 한 사람이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스승으로 모시고 제자의 길로
나서겠다고 합니다. 명성이 높은 율법 학자들을 찾아가 함께 머물면서 제자의 삶을 살던 것이
당대의 전통인 점을 생각하면, 이 율법 학자도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으로
따라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당혹스럽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세상 그 어떤 곳에도 예수님께서
편히 쉬시며 머리를 기대실 보금자리가 없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당신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면서 머무르실 영원한 곳은 이 세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떠나 자신을 숨기고 살아갈 수 있는 어떤 곳도 없다는 뜻도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나의 죽음 이후에도 세상은 그대로이겠지만,
그렇다고 이 세상이 우리가 머무를 마지막 장소는 아닙니다.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숨을 곳을 찾으며, 그곳에서 세상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을 얻으려고 몸부림치는 인생이지만,
마침내 우리가 돌아갈 곳은 하느님 한 분뿐이십니다.
아모스 예언자가 혹독하게 질책하는 이스라엘의 네 가지 죄, 곧 부정한 재산의 축적과 횡포,
가난한 이에 대한 착취, 권력에 의한 성폭력, 종교의 세속화로 말미암은 타락은
여전히 우리 삶을 지배하는 힘입니다. 세상에 심취하여 욕망의 늪에 빠진 이들에게
울려 퍼지는 시편 저자의 말씀에 귀 기울일 때입니다.
“하느님을 잊은 자들아, 깨달아라.”
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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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아모스 2,6-10.13-16 마태오 8,18-22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군중으로부터 떼어놓으신 일로 시작됩니다.
곧 소문이 퍼지고, 많은 병자와 마귀 들린 자 등 군중이 몰려들자 제자들을 그들로부터
떼어놓으십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아직 제자교육을 받지 못한지라 군중에 휘둘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호수 건네 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마태 8,18).
그런데 오늘 <복음>에는 두 인물의 대조되는 태도가 나옵니다. 율법학자는 집을 떠나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서는데, 막상 예수님을 따라나선 제자 중의 어떤 이는 집안일로
장례를 치르러 가겠다고 나섭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 되는 데 필요한 두 가지 자세를 요청하십니다.
사실, 율법학자는 예수님의 치유능력과 군중들이 몰려든 화려한 것에 마음이 끌려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곧 화려한 보금자리에 대한 갈망이 속에
감추어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막상 예수님은 제자들을 그런 것으로부터 떼어놓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길은 그러한 화려하고 드러난 보금자리를 얻는
길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 20)
바로 여기에, 참된 제자 됨의 본질이 있습니다. 곧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앞세우는 삶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곧 당신을 따르는 삶은 거처를 지상에
두지 않는 삶임을 말합니다. 곧 순례자요 거류민으로의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편리와 안정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떠돌이로서 불투명한 삶에
자신을 맡기는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믿음을 하늘에 두고, 땅에서 자신이 가난해지고 보잘 것 없어지는 것을 받아들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곧 당신을 따르는 제자 됨의 길은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사는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지내게 허락해주기를 청하는
’ 이미 당신을 따라나선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8, 22)
이는 당신을 따르는 것은 죽음의 나라를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게 하늘나라를 앞세우는
삶임을 말합니다. 그것은 거처할 곳이 묻혀 썩는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느님과
더불어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집에 가서 장례를 지내기를 청하는 제자에게,
대체 무엇을 “먼저” 앞세워야 하는 지를 깨우쳐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또한, 오늘 우리에게도 에누리 없이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진정, 나는 오늘 대체 어디에 머리 기댈 곳을 찾고 있는가? 자기 자신인가 하느님인가?
무엇을 앞세우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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