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입학식 날
낡은 옷을 빨아서 풀을 먹이고
숯불 다리미로 다려 입혀주며
어머니가 당부하셨다
아들아, 오늘부터 넌 어엿한 학생이다
늘 마음을 밝게 하고 시선을 바로 해야 쓴다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몸가짐과 옷차림마저
단정치 못하면 그건 네 탓이다
가난과 불운이 네 눈빛을 흐리게 하지 말거라
이제 너는 스스로 헤쳐 갈 창창한 학생이다
그날 아침 혼자서
타박타박 황톳길을 걸어 입학식에 가던 나는,
학생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걸어 나가던 나는,
떨리고도 환한 마음으로 입술을 꼬옥 물었다
그날 이후 아무리 험한 조건에서도
나는 어머니의 그 말을 떠올려왔다
공장에서도 군대에서도
수배 길과 감옥에서도
내 처소와 살림과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밝은 마음과 미소를 잃지 않고
시선을 바로 하여
사람과 세상을 정면으로 바라보고자 노력했다
밥을 먹을 때도 말을 할 때도 글씨를 쓸 때도
걸음을 걸을 때도 늘 반듯이 하고자 애써왔다
가난하고 힘이 없고 고달프다 하여
내가 할 수 있는 내면의 빛과 소박한 기품을
스스로 가꾸지 않으면 나 어찌 되겠는가
내 고귀한 마음과
진정한 실력과
인간의 위엄은
어떤 호화로운 장식과 권력과 영예로도
결코 도달할 수 없고 대신할 수 없으니
늘 단정히
늘 반듯이
늘 해맑게
- 박노해 시인의 숨고르기 ‘늘 단정히’
신작 시집 『너의 하늘을 보아』 수록 詩 69p
첫댓글 초등학교 입학식 날 그 결심
초심을 늘 당당하게 산모습 감동이네요 샬롬
한 때 반정부 활동으로 사형선고 받았던 사람
정치권의 수 많은 옛 동지(?)들과 달리
"과거를 팔아 현재를 살지 않겠다"
그런 신념으로 일체의 보상을 거부하고
오직 생명 사랑 문화 활동으로 하고 있는 시인이지요?
경복궁역 근처 그의 사랑방에 가 보면
얼마나 귀한 인생을 살아가는지 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