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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의 아들 윌리엄 해밀턴 쇼 이야기
William Hamilton Shaw (1922~1950)
6. 25 전쟁 참전군인 중 윌리엄 해밀턴 쇼 William Hamilton Shaw 라는미 해군 대위가 있었습니다. 한국 이름은 서위렴徐煒廉 이라는 분입니다.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는, 한국에 온 선교사 윌리엄 얼 쇼의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납니다. 평양 외국인 학교를 다녔고, 그래서 한국 선교사로 온 부모님 덕분에 한국어도 잘하게 되었고, 한국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미 해군에 입대하게 되고, 2차세계대전 때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1947년에 전역한 해, 한국에 돌아와서 지금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해양경비대 사관학교의 교관으로 임명되어 생도들을 가르쳤습니다.
교관으로 근무한 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교 철학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게 되고 이제 졸업을 8개월 앞둔 때 6.25 전쟁이 한국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윌리엄 해밀턴 쇼는 한국 파병을 자원합니다. 그리고 미 해군에 다시 재입대합니다.
조금만 있으면 이제 박사과정을 졸업하게 되고, 또 결혼도 한 상태인데 한국 파병을 자원한 이유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의 조국에서 전쟁이 났는데, 내가 어떻게 공부만 할 수 있겠나요?지금 한국인들이 전쟁 속에서 자유를 지키려고 피를 흘리고 있는데 내가 지금 도우러 가지 않고,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린 후에 선교사로 가려는 것은 제 양심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자라나서 한국 지리에 능통했기 때문에 해군 정보장교로 임명되었고, 맥아더 장군의 최측근 보좌관으로, 해군 정보 장교로서 인천상륙작전에서 큰 공을 세우게 됩니다.
어쩌면 이름은 맥아더장군이 더 알려져 있지만 윌리엄 해밍턴 쇼의 헌신이 없었다면,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이후에, 그는 계속해서 전쟁터에 남아서 서울탈환작전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1950년 9월 22일 지금의 은평구 녹번동에 위치한 녹번리 전투에서 매복 중인 인민군들의 공격을 받고 전사합니다.그때 그의 나이가 28 세였습니다. 쇼 대위는 선교사 부모님과 함께,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묻혀 있습니다.
2010도에 은평감리교회의 헌신으로, 은평구 평화공원에이 분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습니다. 그는 선교사 아들로서 평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 뿐인데 한국을 '나의 조국'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헌신을 했습니다.
그는 6.25 전쟁의 소식을 듣고 미국에서 중보기도모임에 참여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직접 파병을 자원했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런 헌신을 하게 만들었을까요? 성령의 감동이 아니고는, 이런 헌신은 불가능한 것이죠.
부모님이 한국 선교사로 헌신한 것이 자신의 인생과, 이 한국과 어떤 언약으로 맺어진 '한 공동체'라는 의식이 없었다면 이런 헌신은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냥 빈말로 '한국이 나의 조국'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겠죠.
저는 인천상륙작전의 승리의 기적은, 이런 윌리엄 해밀턴 쇼와 같은 분의 헌신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결과라고 믿습니다. 이분의 부인 Juanita Robinson Shaw 은, 후에 서울로 돌아와 이화여대 교수로 섬겼고 또 아들은 서울 법대 교수로 섬겼고 손자는 오산에서 공군 장교로서 대를 이어 한국을 섬겼습니다.
귀한 윌리엄 해밀턴 쇼와 같은 분의 헌신을 기억하는 우리 모두가 돼야 될 줄로 믿습니다.우리나라 민족의 기적같은 역사 이면에는보이지 않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헌신의 사람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재훈 목사 설교에서 2019.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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