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년 만의 헌금
지난 2014년 부임한 이후 당혹스러웠던 것 가운데 하나는 교회의 지나온 역사에 대한 자료가 거의 전무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60년의 세월 동안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며 등대의 역할을 해 온 것과 달리, 사료적 가치로서의 지역 교회의 발자취를 귀중하게 여기는 마음가짐이 약하지 않았나 싶어 아쉬웠습니다.
그러한 아쉬움으로 했던 첫 번째 일은 교회 연혁을 정리해보는 작업이었습니다.
부분적으로 남아 있던 주보를 뒤적거리며, 또 노회 사무실을 찾아가 본 교회와 관련된 정기노회 회의 보고서를 일일이 찾으며 건진 것이 현재의 연혁입니다.
그럼에도 설립자였던 전도사님을 비롯한 몇몇분들의 시무년도와 기간은 찾을 수 있었지만 나머지 12분은 이름만 기재되어 있고 구체적인 사역 기간은 알아낼 방법이 요원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중, 본 교회 집사님 한분이 매우 의미있고 반가운 소식을 들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사돈분의 부친께서 본 교회 목회자로 시무하셨고, 그분의 성함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나아가 약 6-7년 시무하셨던 것으로 자녀분들은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 지난 주중에 15대 목회자로 섬기셨던 박 목사님의 따님께서 양구를 찾아 오셨다가 아버지께서 목회하신 본 교회를 들리셨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로서 국민학교를 다닐 때 목회자인 아버지로 인하여 자라났던 교회를 40년이 훌쩍 넘어 다시금 찾은 중년의 여성으로서 교회 마당을 밟은 마음을 당사자 외에 그 누가 알겠습니까?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시기에 교회 본당과 교육관 문에 부착해 놓은 “외부인 출입을 금합니다” 라는 안내문을 본 이 분은 저희의 의사를 존중하느라고 본당을 들어가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코 흘렸을 초등학교 저학년 소녀로서 교회 마당 안팎을 뛰놀았을 이분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수 십년의 세월 동안 시골교회의 모습은 어떻게 변모했을까? 궁금했을 터임에도 전염병 예방이라는 대승적 차원에서 본당 방문을 참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준비해 온 헌금을 사돈을 통해서 금번 주일에 하나님께 봉헌했습니다.
근 40년이 넘는 세월의 간극 속에서 부친을 생각하며 예물을 준비한 박 권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만감이 교차되어집니다.
흥미로운 것은 권사님의 부친께서 목회하시던 시기에 본 교회가 증축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번 할머니 권사님의 장례식에서 사촌 시동생분이 교우들을 향하여 가족 대표로 인사하시며 당신도 도촌교회(국토정중앙교회의 옛 이름) 출신이시라는 것입니다.
반가움으로 인사를 드리니, 나아가 그분은 교회당을 증축하던 1978년 당시 동네 청년들이 리어카를 끌고서 냇가에 모래와 자갈을 싣고 와서 공사를 했다는 사실과 그분도 당시 함께 증축하는데 힘을 보태었다 하셨습니다.(그분은 현재 은퇴 장로이심)
아마도 대부분의 농촌교회들은 70년대와 80년대에 교회당 건축이 이러했었지요.
묘하게도 본 교회의 지난 역사와 발자취의 증인인 장로님과의 만남이 있은 후
15대 교역자이셨던 목사님 따님의 방문을 통해 묻힐 뻔 했던 교회 연혁의 한 발자취를 발굴해 낼 수 있었던 점이 의미있다 하겠습니다.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는 세월속에서 아련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살리며, 아버지의 눈물과 기도가 스며있는 친정교회를 찾아 주시고 귀한 예물을 드리는 박 권사님의 순수함과 순전한 마음은 후배 목회자의 마음 한 구석을 따뜻하게 해 줍니다.
여러분 한명 한명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첫댓글 아름다운 발걸음이 있었네요.
어릴 때 자라던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들의
귀한 믿음과 사랑을 보는 이 목사님의
훈훈한 마음이 전해옵니다.
경북 군위에 있는 저의 모교회는
지난 4월에 122주년 기념예배를 드렸습니다.
대구에 사는 제 막내동생 장로가
형제들을 대표해서 참석해 축하했습니다.
시골교회의 비슷한 현상이겠지만
우리 모교회도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역사젃인 기록이 거의 전무해 교회 100년사를 만들려고 해도
자료가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다만 경북교회사에 의해
교회 설립연도를 확인할 뿐이었으니까요.
국토정중앙교회에 크신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