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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행문 >
실크로드기행 (20)
동로마 제국과 터키 이스탄불
글 | 이치란 박사 (원 응 보검)
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아시아불교평화회의(ABCP 본부 몽골) 한국회장
국제불교연맹 이사(IBC 본부 인도)
동방불교대학 전 총장
한국불교신문 전 주필
현: 해동불교대학장
(www.haedongacademy.org
600년전 실크로드의 서쪽 센터였던 동로마제국 콘스탄티노플
실크로드는 3대간선과 5대지선이라고 이미 정의한 바 있다.
실크로드라고 하면 대개 중국 서안에서 하서회랑을 지나서 둔황에 이르러서 천산 남로나 천산 북로의 오아시스를 지나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루트로서 중앙아시아에서 페르시아 아라비아를 거쳐, 서쪽 동로마제국인 콘스탄티노플까지 이어진다. 동로마에서 그리스를 지나서 서로마까지실크로드는 3대간선과 5대지선이라고 이미 정의한 바 있다. 실크로드라고 하면 대개 중국 서안에서 하서회랑을 지나서 둔황에 이르러서 천산 남로나 천산 북로의 오아시스를 지나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루트로서 중앙아시아에서 페르시아 아라비아를 거쳐, 서쪽 동로마제국인 콘스탄티노플까지 이어진다. 동로마에서 그리스를 지나서 서로마까지 더 나아가서 유럽까지 비단과 물품이 전달되었다. 실크로드는 또 몽골의 고비에서 중앙아시아를 통과하는 스텝(stepp)로도 간선통로였다. 이 초원로를 직선으로 달려서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 이르기도 했다. 오아시스로와 초원로는 중국이나 몽골에서 중앙아시아를 횡으로 가로지르는 간선로들이다. 그리고 해로(海路) 또한 해상실크로드의 간선으로 간주한다. 동에서 서로 가는 길만이 실크로드가 아니라, 남북을 가로질러서 3대간선과 사통팔달의 망(網)을 형성하는 5대지선 또한 실크로드의 범위에 포함하고 있다.
이제 실크로드의 종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탄불에 주목해보자. 지난 7월 16일 일부 군인들이 주축이 되어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6시간 만에 진압되고, 쿠데타는 일단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현재 터키의 정치적 사정은 언제 또 쿠데타가 봉기할지 모르는 휴화산 같은 정국이다. 인구 약 8천만이 넘는 터키는 중동과 지중해에 걸쳐 있는 강국이다. 터키는 기원전 2천년 경에는 인도-유럽어계의 히타이트인들이 점령해서 살았으나, 기원전 6세기 경 페르시아가 통치했으며, 이후 기원전 1세기경이 되면서 로마 손에 넘어가게 된다. 오랜 기간 로마(동로마=비잔티움 395∼1453CE)제국으로서 실크로드의 서쪽 센터 역할을 했다. 동로마의 수도는 콘스탄티노플이었고, 현재의 이스탄불이다. 동로마제국은 비잔티움제국이라고도 한다. 지금이야 터키인들의 조국이 되었지만, 6백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곳이 실크로드의 서쪽 종점이었던 동로마제국이었다. 아무래도 이야기를 풀어가자면, 역사이야기부터 조금은 해야만 할 것 같다.
역사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영국의 유명한 정치학자이면서 역사가였던 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t Carr, 1892~1982)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단지 그것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 랑케(레오폴트 폰 랑케: Leopold von Ranke, 1795~1886)는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 일들이 어떠했는가를 누가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는 가운데, 역사의 ‘사실들’은 역사가들이 ‘선택한’것일 뿐임을 보여준다고 강조한다. 수백만 명이 루비콘 강을 건넜지만, 역사가들은 오직 카이사르가 건넌 것만을 중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모든 역사적 사실들은 그 시대의 규범과 표준이 되는 어떤 사관에 영향을 받은 역사가들의 해석상의 선택의 결과로 등장한다고 말했다. 세계의 많은 현대 사가들은 카의 탁견에 동의하고 있는데, 그것은 지금 당장 자기가 살고 있는 어떤 환경과 시대상황의 규준(規準)에 영향 받은 역사해석에 대한 사실의 선택이 중요함을 인식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Iulius Caesar BC100~CE44), 영어로는 가이어스 줄리어스 시저(Gaius Julius Caesar)는 고대 로마의 정치가, 장군, 작가이다. 그는 로마 공화정이 제정으로 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현대 역사철학의 이념에 척도를 제공한 두 사가의 예에서 보듯이 참으로 지나간 일들을 재구성한다는 것이 얼마나 난해한 작업인가를 알 수 있다. 또한 지나간 역사의 재구성이 사료적 문헌과 증거에 의한 객관주의에 근접할 수도 있는 반면에, 선택적 사실들에 의해서만 해석이 부여되는 주관적인 역사인가를 짐작할 수도 있다. 실크로드 역사만 두고 보더라도 동쪽인 중국 측에서 보는 관점, 중앙아시아나 러시아에서의 관점, 페르시아에서 또는 아라비아에서, 인도에서 보는 관점이 각양각색일 수 있으며, 실크로드의 서쪽 끝인 동로마에서 보고 인식하는 관점이 서로 동일할 수가 없다. 다양한 관점, 다양한 해석이 끊임없이 생산될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통합된 전모가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고 그럴 때에만 그나마 어느 정도 완벽한 역사가 그려지지 않을까 한다.
그동안 실크로드 기행은 19회에 걸쳐서 주로 중국 몽골과 중앙아시아 지역과 이 지역을 위주로 한 자료에 근거하고, 현장 답사를 통해서 기행을 엮어 왔는데, 이번 회 부터서는 무대를 터키 이스탄불과 그리스 아테네로 옮겨서 이야기를 전개해 보고자 한다. 이스탄불에서 동쪽을 향해서 실크로드를 보려고 하니, 다소 혼란에 빠지게 됨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이유는 실크로드 당대의 콘스탄티노플의 주역은 그리스-로마인들이었는데, 현재는 튀르크인들이 이곳을 차지하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 때문이다. 실크로도의 주역은 떠나고, 객인 튀르크 족이 이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튀르크족은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 선상에서 계속 서진하여 이곳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간단하게 이스탄불의 존재를 살펴보자. 역사적으로 이스탄불은 그리스인들의 도시였다.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은 중세 그리스어로 ‘이스 띤 뽈린’이란 ‘도시(都市)로’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리스인들은 지금도 이스탄불을 콘스탄티노폴리스(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η)라고 부르는데, 비잔틴 제국시대를 거쳐 천 년 넘게 그리스 세계의 수도였다. 지금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의 소재지가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이다. 이스탄불이라는 명칭이 굳어진 것은 1930년대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터키 식으로 바꾼 ‘콘스탄티니예’라는 이름이 함께 사용되고 있다.
이스탄불은 유럽대륙과 아시아 대륙에 걸쳐 있는데, 유명한 역사 유적은 유럽대륙 쪽인 이스탄불에 있다. 인구나 상업 중심지도 유럽지구에 있는데, 이스탄불은 유럽과 중동에서 가장 큰 도시로서 거의 1천 7백만 명에 육박한다. 세계에서도 다섯 번째로 큰 도시이다. 오스만 제국이 점령할 때까지인 1453년까지도 동로마 제국(비잔틴)의 수도로서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불렀다가, 오스만 제국은 이스탄불로 이름을 바꿔 수도로 정했다. 1923년 이후에는 앙카라가 터키의 수도가 되기는 했지만, 이스탄불은 아직도 터키의 관문이다. 터키가 유럽연합에 가입은 아직 안 되었지만, 가입되기를 대기 중이다. 이스탄불은 2010년 유럽 문화 수도로 2012년에는 유럽의 스포츠 수도로 지정되었다. 또한 1985년 유네스코는 이스탄불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이스탄불은 1천6백년간 여러 국가의 수도로 지정되었는데, 로마제국(330∼1204)의 수도, 라틴제국(1204~1261)의 수도, 비잔틴제국(1261~1453) 그리고 오스만제국(1453∼1922)의 수도가 되면서 이스탄불로 이름을 변경했다. 위에서 살펴 본대로, 실크로드 시대의 이스탄불은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였다.
역사란 자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엮어져 가는데, 이렇게 되면 로마제국의 정체를 알아야 동로마 제국의 모습이 또 확연하게 드러나게 된다. 로마제국을 간단하게나마 스케치 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쪽에서 시작했던 실크로드 또한 진나라 한나라를 주 무대로 해서 흉노 월지 서역의 여러 나라들이 얽히고설키면서 실크로드 역사가 전개되었듯이, 동로마에서의 실크로드 또한 로마와 그리스와 연계해서 돌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로마 제국 말기, 콘스탄티누스(272∼337CE) 대제는 중기 로마 황제 (재위:306∼337)였다. 그는 분열된 제국을 재통일하고 330년 이 도시를 새로운 수도로 선포했다. 그러면 이쯤에서 로마제국에 대해서 리서치가 필요하다. 로마제국은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제국이라고 하면, 아우구스투스의 황제 지배 체제가 시작된 기원전 27년부터서 몰락할 때까지이다. 로마제정시대는 395년에 동서로마의 분할이 이루어졌고, 서로마 제국은 476년에 멸망했으며, 동로마를 계승한 비잔티움제국이 1453년 오스만제국에 굴복하면서 로마제국은 막을 내리게 된다. 로마 제국은 지중해 동부의 헬레니즘 문화권과 이집트, 유대, 서부의 옛 카르타고, 히스파니아, 갈리아 등의 기존 영토에 이어 브리타니아와 라인 강 서쪽의 게르마니아, 그리스 북쪽의 다키아까지 판도를 넓혔다. 이러한 패권주의는 로마 제국에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의 문화를 고대 지중해 세계에 널리 퍼뜨려, 로마 제국의 건축, 법, 정치, 종교 등이 전해지게 되었다.
로마는 또 어떻게 성립되었는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터키 땅에 최초로 들어선 제국은 기원전 18세기에서 13세기까지 존속했던 히타이트였다. 다음은 그리스계의 프뤼기아인들이 잠시 패권을 잡았다가, 기원전 7세기경 이란어에 가까운 언어를 사용하는 킴메르인의 침략을 받는다. 기원전 1200년경부터 아나톨리아 해안에는 아이올리스와 이오니아의 그리스인들이 정착하였다. 이 지역은 기원전 6~5세기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에 정복되었으며, 이후 기원전 334년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지배를 받게 되다가 헬레니즘 시대에는 비튀니아, 카파도키아, 페르가몬, 폰토스 등 여러 헬레니즘계 소왕국으로 분열되었으며, 기원전 1세기 중엽에 모두 로마에 복속된다는 역사를 갖게 된다.
터키 땅의 역사에서, 기원전에는 그리스계가 기원후에는 로마가 사실상 지배한 영역이었고,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할되고, 서로마는 멸망했지만, 동로마는 터키 땅을 중심으로 오스만 터키에 망할 때까지인 1453년까지 동로마였다. 기원후 2세기의 로마제국 판도를 보면, 로마제국은 지중해를 둘러싼 국가와 유럽 전역을 영역으로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로마제국은 3세기에 이르면 분열의 조짐을 보이게 된다. 235년에서 395년 사이의 기간에 로마제국은 붕괴와 쇠퇴기를 맞게 된다.
이 기간 로마제국 내에선 25명의 군사 황제가 난립하고, 제국은 군사, 정치, 경제 분야에서 위기를 맞게 되고 디오클레티아누수(재위:284~305)의 집권으로 막을 내렸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거대한 제국을 한 번에 통치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285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막시미아누스를 부제(副帝 Caesar)로 삼았다가 이듬해 바로 정제(正帝Augustus)로 승격시켰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국 동방의 문제를 관할하는 동안 막시미아누스는 제국 서방을 책임지는 형태였다. 293년 두 명의 정제 외에 두 명의 부제를 더 두어 사두정치 체제인 과두제를 이루었는데, 이러한 정치적인 체제를 테트라키 (사두정치 체제.Tetrarchia)라고 한다.
이런 과두제(테트라키)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죽음과 함께 붕괴되었고, 콘스탄티우스의 군대는 즉시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정제로 옹립하였다. 이후 연속적으로 일어난 내전을 종식시킨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비잔티움을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정하였다. 337년, 그가 죽자 비잔티움은‘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의 콘스탄티노플로 개명되었다. 동로마제국의 시작이었다.
395년 이후, 분리된 서로마 제국의 황제는 허수아비 존재로 전락하고, 대신 군벌의 지도자들이 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한편 서로마 제국에서 게르만족의 영향력이 증대되자,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게르만족 용병들을 단순한 이민족 군대로 취급하지 않고 로마 제국의 정규군으로 편입시켰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를 장악한 오도아케르는 로마 황제의 직위를 포기하고 대신 스스로 이탈리아의 왕을 자처하였다. 제국은 명맥을 유지할 수는 있게 되었으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고 476년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이로써 고대 로마는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서로마는 망했지만, 동로마는 이후에도 거의 1천 년 간 존속했으며, 실크로드의 종점 역할을 했다. 동로마는 홍해의 이집트, 인도와 저 멀리는 중국까지 교역의 폭을 넓혔다. 이집트나 인도와의 무역도 활발했지만, 실크로드를 통한 중국과의 무역은 괄목할만했다. 로마제국은 동서분할 이전부터 지중해연안 국가들과의 교역은 물론 중국과의 교역이 중간 지역인 파르티아나 쿠샨의 중개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동로마 제국 시대의 실크로드 무역은 잠시 뒤로 미루고 로마제국의 초기 실크로드 무역을 잠시 리서치 해 보자.
중국(한나라)과 로마의 관계는 고대근동지역이 매우 중요한 위치로 부각된다. 고대근동지역은 지금의 터키를 비롯한 중동지역이다. 고대 근동은 대체로 오늘날의 중동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세계 문명의 고향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메소포타미아, 고대 이집트, 고대 이란(페르시아), 아나톨리아(오늘날의 터키) 그리고 레반트(오늘날의 시리아·레바논·이스라엘·요르단)를 포괄하는 지역이었다.
중국 한나라 반초(班超,32∼102CE) 장군은 한나라 역사가인 반표(班彪)의 아들이자, 한서(漢書)의 저자인 반고(班固)의 아우로 이 세 사람을 삼반(三班)이라 칭하는데, 그의 선임자였던, 곽거병(霍去病)이나 위청(衛青)처럼 타림 분지에서 흉노족을 효율적으로 방어했으며, 광무제의 통치 기간 기마부대를 이끌고 흉노를 격퇴하고 서역의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전한의 장건의 활약 이후 끊겼던 실크로드를 다시 개척하여 후한과 서역의 교역길을 열었다. 그의 원정대는 파르티아와 카스피 해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반초는 91년 서역도호부의 도호가 되고, 쿠차에 서역도호부를 설치했다. 97년에는 톈산 산맥과 파미르고원을 7만 명의 경기갑 군사로 횡단, 실크로드를 어지럽히던 흉노나 훈족을 토벌했다. 파르티아의 파코루스 2세와 동맹을 맺어 동쪽으로는 파르티아, 서쪽으로는 카스피 해의 해변과 투르크메니스탄의 메르브까지 그의 기지를 확장했다. 여기서 감영이라고 부르는 그의 수하 장수를 특사로 로마에까지 파견했다고 전해진다. 이 당시 중국과 로마 사이에서 교역된 인기 품목은 중국의 비단과 로마의 유리제품이었다.
로마에서는 파르티아와 쿠샨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중국을 접했기에, 중국을 세리사(赛里斯)로 불렀고, 중국에서는 로마를 다친(大秦)이라고 불렀다. 로마의 역사가였던 플로러스(Lucius Annaeus Florus 74∼130CE)에 의하면, 로마제국의 초대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63BCE∼14CE) 시대에 스키타이인, 사르마티아인(이란), 인도와 중국인들이 황제의 대사로 왔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반초는 감영(甘英)을 97(CE)년에 대사로 로마에 갔다고 한다. 감영은 페르시아 만과 아리비안 만을 지나서 홍해를 거쳐서 로마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 정도에서 옛 로마제국의 이야기는 잠시 호흡을 멈추고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가자.
얼마 전 쿠데타로 터키는 혼란에 빠져 있고, 발 빠르게 쿠데타를 진압한 에르도안 대통령은 피의 숙청을 하고 있다. 무려 6만 명의 사회지도자급 시민들을 직위 해제시켰다고 하며, 쿠데타 진압을 명분으로 반대파들을 가차 없이 숙청하고 있는 것이다. 한때 정치적 동지였던 미국으로 자진 망명한 귈렌을 터키로 환송하라고 요구하고 있는데, 터키 정국의 앞날이 불투명하다.
터키는 결코 만만한 나라가 아니다. 한해 터키를 찾는 관광객은 4천 만 명이상이라고 하며, 유럽에서는 독일인들이 많이 찾고 있으며, 독일에는 수백만 명의 터키이민자가 살고 있다. 터키인들은 다른 민족성과는 다르게 다소 공격성향을 띠고 있는데, 언제 또다시 반정부 쿠데타가 발발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필자가 터키를 방문하는 동안, 터키인들의 특이한 습관은 흑해 산 홍차를 하루에도 여러 잔을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는 습관이었다. 모이면 무슨 얘기를 하겠는가. 자연스럽게 나라 돌아가는 이야기를 할 것이고, 뭔가 또 반정부 봉기를 모의하지 않겠는가 하는 상상을 해본다. 필자의 관심은 터키인들의 이전 동로마 시대의 실크로드의 역사이다. 다음 회에서 이런 맥락에서 실크로드의 역사와 유산을 이야기해보자.
(이치란 해동 세계 불교 선림원 원장 www.haedongacadem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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