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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보호에 대한 성경적 관점은?
조덕영 박사.
최근 동물과 관련된 다양한 이슈들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동물 복지에 대한 관심이 부쩍 많아졌다.
야생 고양이를 돌보던 일명 '캣맘'이 아파트 상층에서 떨어진 벽돌에 맞아 안타깝게 사망한 것을 계기로, 사건의 본질과는 다르게 대중은 동물 보호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값비싼 돌고래의 바다 방류를 통해 동물 복지를 표방해 온 서울시는, 시 소유 동물원에 멀쩡히 살아 있는 사슴과 흑염소 등을 '잉여 동물'로 간주, 도축장으로 보내는 이율배반적 행동을 했다가 동물보호단체들의 심한 반발을 사기도 했다.
한 언론은 영국BBC 방송을 인용하여 "런던의 한 한인 슈퍼마켓이 살아 있는 게(crab)를 판매하면서, 게가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고무줄로 묶은 뒤 스티로폼 용기에 넣고 비닐 포장하여 진열했다"고, 이 같은 게 학대에 대해 영국 소비자들의 항의로 결국 슈퍼마켓이 한 발 물러선 사실을 보도했다.
이 생(生) 게 포장은 우리나라에서는 늘상 있는 일들이라, 더욱 우리 사회의 관심을 끌었다.
과거 프랑스의 유명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가 한국 사회의 개고기 식용에 대해 지속적으로 항의한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다.
세대주의적 성향의 일부 기독교 근본주의 단체와 목회자들이 구약성경 레위기의 성막 제사를 재현한다고 양을 도축하여 번제를 드리고 그 자료와 동영상을 SNS 등에 올렸다가, 기독교 전체가 무자비한 동물 학대 종교라고 매도되는 데 크게 당황하여 서둘러 자료를 삭제한 사실이 있다. 신학적 무지가 불러일으킨 참사였다.
그렇다면 반려 동물을 포함한 동물 보호 문제에 대해 기독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인간만 영혼이 있나(사람의 영혼, 동물의 영혼)?
유물론자들은 사람이나 동물을 모두 오직 물질적 존재로 본다. 이것을 일원론이라고 부른다(포이에르바하, 공산주의 등). 즉 영이나 혼은 단지 인간이나 동물의 생명을 지칭하는 표현에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래서 생명을 존중하지 않고 함부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 영혼이 존재함을 말하며, 심지어 육체가 죽은 후에도 영이나 혼이 존재한다고 증거한다(창 35:18; 시 31:5; 눅 23:43; 행 7:59; 계 6:9). 그럼 성경에서 "영"이나 "영혼"은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단어인가?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영혼(soul, nephesh, Psyche)에 대해 - 창세기 2장 7절에 보면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했다. 히브리어 본문에 보면 이 단어는 우리말 영(the spirit/히, ruach/헬, pneuma)이 아니고 "혼"(the soul/히, nephesh/헬, Psyche)의 번역이다. 즉 직역하면 인간이 "살아 있는 (영)혼(존재)"이 되었다("네페쉬 하야")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보통 영(spirit)이라고 번역하는 그 단어가 아니고, 영혼(네페쉬)인 것이다. 이 영혼(네페쉬)은 성경에 755번 나오는 단어다. 그런데 이 단어는 하나님, 사람, 동물 모두에게 적용된다. 이 단어는 전도서 3장 21절에서 짐승에 적용된다. 특별히 동물 창조 때(창 1:22, 21, 24)에도 결정적으로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이 밖에도 이 영혼이라는 단어는 우리 성경에 영혼 뿐 아니라 생명, 목구멍, 바람, 욕망, 갈망, 인격 등 100여 가지 다른 단어로, 심지어는 "시체"(민 6:6)에도 사용됐다. 계시록 16장 3절에 보면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었다고 하였는데, 이때 "생물"에 사용된 단어도 바로 "프쉬케(생물, 목숨)였다. 바다 가운데 인간 생물만 모여 있는 장면은 아주 이상하다. 인간 생물만 아니라 모든 생물(프쉬케)들이 죽었다. 이렇게 성경은 하나님 뿐 아니라 하나님이 생명을 주신 인간이나 짐승들도 모두 당연히 (영)혼(네페쉬)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네페쉬"를 소유하신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둘째 영(the spirit, ruach, pneuma)에 대해 - 구약에 389번 나오는 이 단어는 주로 하나님(136번)을 나타내기는 하나, 인간이나 동물(129번)에게도 적용된다. 이 말의 기본 뜻은 "바람"이나 "호흡"에서 왔다.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를 말하기도 하는 이 말도 아주 복잡하다. 생명, 숨, 공기의 흐름, 바람, 풍채, 싸움, 동물의 삶, 유령, 정신, 영혼, 마음, 기억, 이성, 분노가 다 영(루아흐)이다. 네페쉬처럼 이 단어도 그 쓰임새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하지만 성경은 "영"(spirit, 루아흐)과 (영)혼(soul, 네페쉬)을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사 57:15; 단 5:20). 예를 들면, 내가 영혼(soul)을 가진 생명인데 영(spirit)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점이 분명 있다. 영혼은 육신적 감각이 있어서 굶주리기도 하고 목마르기도 하다. 하지만 영은 그렇지 않다. 슬퍼하고 근심하며(창 26:35), 겸비하고 가난하기도 하며(마5:3), 생각하고(사 27:24; 욥 20:3), 기억하기도 한다(시 77:6). 영어의 영(spirit)은 오늘날 바람, 숨, 마음, 능력, 재능, 힘 등 매우 다양하게 쓰이기 때문에, 성경적 표현과는 조금 다르게 쓰임새가 다양화되어 있다고 보인다.
이렇게 "영"(spirit)과 "(영)혼"(soul)을 많은 기독교 문헌은 종종 동의어처럼 쓰는가 하면, 구별(히 4:12)하기도 했다. 그리고 동물들도 이 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 인간은 육체만 가지고 보면 "흙"(Humus)에 불과한 존재라, 동물과 그리 다를 게 없다. 그래서 프란시스 쉐퍼는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모든 것(생명과 자연) 앞에 교만하거나 잘난 척하면 안 된다고 충고하고 있다.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은 다른 사람 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이 주신 다른 생명에게도 함부로 대하는 게 아니다. 물론 사람과 동물은 당연히 동일하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동물과 조금 달리 만드셨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 우리 인간이 짐승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흙"이요 "생령"이라는 점을 늘 기억하고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동물 보호인가, 동물 정복인가?
창조와 구속의 종교인 기독교는 당연히 모든 생명에 관심을 기울인다. 모든 생명은 인류와 함께 창조주간에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인간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릴 권한을 부여받았다(창 1:28). 그런데 땅을 정복하라는 용어는 조금 특이하다. '정복하다'는 의미의 히브리어 카바쉬(kabash)는 군사 용어이다. 전쟁은 잔인하다. 따라서 이 '정복하다'에는 '짓밟다, 약탈하다, 굴복시키다' 등 강한 의미가 있다. 다윗이 정복한 나라들에서 노략한 은금을 여호와께 드릴 때에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삼하 8:11). 그만큼 강하게 복종시키는 정복을 말한다.
사람들은 이 '정복하다'는 구절을 동물에 잘못 적용하는 우를 가끔 범한다. 이 구절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이 구절이 쓰인 창세기 1장은 창조주간에 대해 서술한다. 이때 세상과 생물들은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으며, 아담과 하와는 아직 범죄하지도 않았다. 아직 땅은 저주받지도 않았으며 아담과 하와는 땀 흘려 땅을 경작할 필요도 없었고, 사람은 육식을 하지도 않았으며 아담과 하와는 땅의 짐승들을 잔인하게 해칠 필요도 없었다. 그렇다면 '땅을 정복하라'는 이 용어는 땅이나 동물과의 전쟁 선포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의지하고 있는 땅에 인격성을 부여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용납지 않으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와 의지가 반영된 구절로 보인다.
린 화이트(Lynn White Jr.)는 "우리의 생태학적 위기의 역사적 근거"(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al crisis)라는 논문에서 생태학적 위기의 원인을 역사적 기독교에 찾으려 한다. 목사였던 그의 주장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다만 성경 말씀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 1장 28절 말씀에 대한 일부 기독교인들의 오해가 땅에 대한 마구잡이식 개발과 그에 따른 공해와 생태계 파괴로 나타났다고 보인다. 무생물인 땅에 대해 군사 용어인 '정복'이라는 강한 어휘를 사용하여 명령을 내릴 만큼, 하나님은 인간에게 땅에 대한 많은 권리를 주신 것은 분명하다.
즉 인간은 그것을 복종시키고 관리할 많은 권한과 책임을 동시에 부여받았다. 땅의 청지기가 된 것이다. 인간은 땅에 대한 이 문화 명령을 군인처럼 철저히 수행해야 할 책무가 있다.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믿음으로 하지 아니하면 언제나 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다(롬 14:23). 이것은 땅을 다루는 데 있어서도 당연히 적용된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땅을 군사와 같은 무거운 사명감을 가지고 믿음과 선한 양심과 지혜로 가꾸어야 한다.
하지만 땅과 동물은 다르다. 동물은 늘 인간의 동반자였다. 노아 가족들이 방주에 들어가 기거할 때도, 하나님이 권념하셔서 나올 때도 함께였다(창 8: 15-19). 창조된 모든 생명체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선한 계획과 질서와 가치가 있다. 우리 인간은 정복자가 아닌, 단지 청지기일 뿐이다. 청지기는 성경에 계시된 창조의 질서를 따라 선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 본회퍼가 창세기를 다룬 자신의 책에서 성경을 인용하여 하와를 '생명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라 말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기독교는 채식주의?
동물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정복할 대상이 아닌 품어야 할 대상이라고 하면, 대홍수 이후 육식이 허락되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 대홍수 이후 육식은 분명 허락되었다. 기독교는 채식주의를 권장하는 종교는 당연히 아니다. 다만 무제한적인 육식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과 창조의 질서에 맞는 육식을 명령 받았다. 무분별한 육식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노아와 맺은 언약 속에 모든 동물도 포함되었음을 분명히 하셨다(창 9:8-17). 그렇기에 성경은 "의인은 자기 육축을 잘 돌아보나 악인은 그 짐승에게까지 잔인하다"고 했다(잠 12:10). 성경은 분명 인간이 동물에 대한 자신의 지배를 오용하지 못하도록 경고하고 있다. 미래학자 제레미 리프킨은 『육식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인류의 육식 과잉 섭취로 인한 "풍요의 질병", 즉 심장발작, 암, 당뇨 등 식원병과 동물 사육으로 인한 생태의 오염과 파괴와 사막화에 대해 논증하고 있다. 우리 인간은 동물들도 하나님의 섭리의 대상이지 인류 오용의 대상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사실 창조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동물 뿐 아니라 식물을 포함한 모든 자연의 피조물은 창조주 하나님이 부여하신 고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을 물활론적으로 여겨 우상화해서도 안 되지만, 청지기적 사명을 오해하여 하나님이 주신 자연의 고유 가치를 무시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죽음 너머 가는 그곳도 새 하늘과 새 땅이지 않은가? 인간과 과학은 겨우 시간과 공간과 물질이라는 피조 세계에 갇혀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피조세계를 초월한 창조주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들은 풀 한 포기조차 성스러운 이유다.
동물 수난의 진정한 위기
사실 동물 수난은 대중이 잘 모르는 사이 전혀 다른 곳에서 그 문제가 더 크게 불거지고 있다.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동물들은 크게 독성 실험과 교육적 실험, 의약품 개발이라는 세 측면을 통해 약품, 화학 물질을 생산하기 위한 효과적 방법 탐색, 인간 질병 치료법 탐구, 가축 개량, 전자 이식 동물, 키메라, 복제, 유전자 변형, 유전자 삽입 등 대중이 목격할 수 없는 은밀한 전 세계 생명·의료 과학 실험실에서 생체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영국왕립협회 회원인 길 랭글리(Gill Langley) 박사는 유전자 실험에 있어 동물들이 당하는 수난에 대해 첫째로 동물들의 염색체 속에 유전자를 삽입하는 과정이 무작위적으로 삽입된 수십, 수백 개의 이식유전자가 어떻게 발현될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고, 둘째로 이식유전자가 일으키는 원치 않는 기형 동물(즉 키메라류) 발생의 위험성이 있으며, 셋째로 품종 개량을 위한 이식유전자의 이동 실험 실패 시 실험 대상 동물을 대상으로 수없는 반복 실험이 이뤄지고, 넷째로 이식유전자와 숙주(宿主) 동물의 화학적 활성 사이에서 일어나는 복잡하고 다양한 상호 작용의 병리적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바이오'라는 이름으로 품종 개량을 뛰어넘어 상업적 용도의 대량 생산이 가능한 생물들을 창조하는 능력의 위험성을, 인류는 너무 간과해 온 것이 아닌가 걱정스럽다. 인류는 자연적 진화의 산물이므로 인류와 모든 생물이 진화되어 왔다는 관점에서 유전자(DNA)를 선택적으로 변형시키고 도태시킬 수 있다는 무신론적·비윤리적 전제가, 감당치 못할 위험을 자초하는 것은 아닌가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근 기독교생명윤리협회가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에 대해 "안전성이 확보된 유전물질이나 세포라는 자체가 아직 존재하지 않기에, 입법을 위해서는 안전성이 확보된 유전물질과 이들이 도입된 세포의 존재를 먼저 입증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한 것도 그런 위험성을 잘 알기 때문이다. 협회는 "유전자 치료는 한 개인의 유전자를 변형시켜 환자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어, 확립된 치료법이라기보다는 가능성을 탐색하는 수준"이라며 "아직 안전성이나 효과성을 판정하는 단계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유전자 치료는 '유전자 치료제'로 약사법 규율 대상으로 간주하기 어렵다"고 생명 연구·치료 범위 확대를 반대한다는 의견을 보건복지부에 제출했다. 예수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했을 뿐 아니라, 작은 것에 충성된 자가 큰 것에도 충성되다 했다(눅 16:10). 항의할 수 없는 작은 생명체라고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동물 사랑의 종교, 기독교
기독교는 결코 동물을 무시하거나 동물에게 무례한 종교가 아니다. 인간은 피조물의 주인도 아니다. 청지기일 뿐이다. 동물 역시 하나님의 구원 대상이요 언약의 약속 안에 있는 존재다. 하나님은 사람 뿐 아니라 수많은 가축이 있는 니느웨 성을 불쌍히 여기셨다(욘 4:11). 사도 바울은 사람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이 허무함의 종살이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 위해 함께 탄식하며 고통 중에 있다고 했다(롬 8:18-22).
창조는 종말론적 구원을 지향한다. 태초에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모든 피조물을 위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것이며(사 65:17, 계 21:1), 아담의 죄로 인해 파괴된 인간과 동물 간에도 평화가 회복될 것이다(사 65:25). 그 때까지 인간은 다스림의 위치에서 소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 다스림은 군림이 아니다. 인도의 신학자요 생태학자인 켄 그나나칸(Ken Gnanakan)은 이 '다스림' 안에는 사랑, 상호 연결, 지속 가능한 창조성, 다른 이들을 위한 배려, 종으로서의 섬김, 청지기, 하나님의 창조물에 대한 존경심, 정의라는 8가지 요소가 들어 있다고 했다. 마치 예수께서 죄 짐 맡은 우리 구주요 좋은 친구였던 것처럼, 인간은 당연히 동물들과 사랑 안에서 함께해야 하는 것이다.
조덕영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