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의 책이 된다면
사회의 물결에서 물러난 친구들이 노년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여유가 있는 친구들은 골프를 치고 해외여행을 한다. 다시 대학 시절로 돌아 간 경우도 있다. 몇 명이 모여 당구를 치고 짜장면을 먹고 소줏잔을 기울이면서 정치를 안주로 얘기를 나누기도 한다. 각자 자기분야에서 일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의 귀한 지식과 경험이 버려진 플로피 디스켓 같아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국립중앙도서관의 서가를 돌다가 독특한 책을 발견한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이후 육이오 전생 시대를 살아온 평범한 노인들의 말들을 녹취해서 만든 책이었다. 노동자나 농부 장사꾼등 각자의 입장에서 시대를 살아온 삶을 꾸미지 않고 그대로 쓴 책들이었다. 민중의 시각에서 본 그 시대의 역사였다.
도서관의 서가에서 또다른 얇은 책자 하나를 발견했다.
육이오전쟁 중 점령당한 서울에 남은 사람이 그해 여름의 몇 달을 숨어 있으면서 느낀 감정을 적어둔 글이었다. 낡은 책 속에 뙤약볕 내려 쬐는 그 여름의 긴장이 하얗게 보이는 듯 했다.
노인들은 각자 하나의 도서관이라는 말이 있다.
노인들이 살아온 삶이 한 권의 진솔한 책으로 변해 다음 세상의 거름이 된다면 어떨까. 인공지능이 글까지 써주는 요즈음 책을 만들어 내는 일이 어렵지 않다. 굳이 종이책을 만들 필요도 없다. 인터넷의 바다위를 흐르는 삶의 쪽지를 담은 작은 병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나는 가끔 산을 지나가다가 오래된 봉분을 만난다.
어떤 봉분에는 ‘신도비’라는 게 옆에 있다. 그 무덤의 주인공의 인생을 글로 써서 비석에 새겨둔 것이다. 어디 출신이고 언제 과거에 급제해서 무슨 벼슬을 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 시대의 가치관인 것 같다. 책으로 치면 한페이지 정도라고 할까. 그에 비해 강진 산자락의 초당으로 유배를 가서 쓴 정약용의 목민심서는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허준의 동의보감도 마찬가지다.
청계천의 헌책방을 순례하다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김홍섭법관의 에세이집을 발견했다. 누렇게 바랜 종이 사이에서 아직도 그 법관이 살아서 생생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고 있었다.
황학동의 동묘옆 헌책방에서 시인 노천명의 에세이집도 발견했다. 해방후 혼자살던 시인은 새벽의 하숙방 장지문 밖에서 신문배달 소년이 문을 삐걱이는 소리와 물장사외 외침을 듣고 있었다.
그 벼룩시장 끝에는 오래된 책들이 수북이 쌓여있는 노점상이 있었다.
아무 책이나 한 권에 천 원이었다. 그 중에 이광수가 쓴 수필집이 있었다. 조선말 콜레라로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죽었다. 전염병이 무서워 마을 사람 누구도 그 집에 얼씬거리지 않았다. 어린 이광수는 부모를 수레에 올린 채 끌고 간다. 아버지의 발이 수레끝으로 삐져나와 흔들리고 있었다.
법관과 시인 그리고 소설가는 자신의 일생이 담긴 한 권의 책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예전 대감들 장관들의 화려한 봉분보다 일생을 힘겹게 살았던 시인 소설가 법관의 낡은 수필집이 더 세상에 싱그러운 냄새를 풍기고 있다.
동해의 파도 치는 바닷가 나의 방에서 나는 매일 글을 쓰고 있다.
세월이 칠십 고개를 넘다보니 변호사로서 법정과 감옥을 뛰어다닐 에너지와 의욕이 많이 줄어든 것 같다. 변호사를 시작하면서 소원을 일기에 적어놓은 적이 있었다. 영화 빠삐용의 주인공처럼 고독한 섬에 갇혀있는 억울한 사람을 다섯명정도 자유의 땅으로 옮겨주는 뱃사공이 되게 해 달라고. 그 정도 숙제는 마친 것 같다.
이제는 글을 써서 한권의 좋은 책이 되고 싶다.
성경 속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책을 썼다. 누가는 예수의 일생을 탐구하고 단편 소설형식으로 누가복음을 썼다. 단테가 신곡을 쓰고 밀턴이 실낙원을 썼다. ‘쿼바디스’라는 고전소설을 읽고 몇 번 진한 눈물을 흘렸다.
작가들은 책으로 변해 지금도 존재한다. 오래전 죽은 작가들의 책 속에서 그들의 영혼과 만나고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된다.
중국작가 노신은 글로 중국민중을 깨웠다. 일본의 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일본인들의 정신적 각성을 추구하는 글을 써서 남겼다. 한국의 철학자 다석 류영모 선생은 매일의 명상을 ‘다석일지’라는 글로 남겼다.
생명력이 있는 글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같이 세상 사람들에게 정신적 영양분을 제공하는게 아닐까. 대작가는 못되더라도 나름대로 정성을 다해 쓴 소박한 글로 존재하면서 세상에 들꽃같은 향기를 품어내는 것도 괜찮은 일이 아닐까.
[출처] 한권의 책이 된다면|작성자 엄상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