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지도 않는 '긴 머리 소녀' 대학을 졸업하던 그 해 여름. 처음으로 그 노래를 들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찾은 대천해수욕장에서였다. 젊은이들의 소리로 시끌벅적했던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서 정적이 일찍 찾아들었다. 아쉽지만 우리도 비를 피해 숙소로 돌아왔다. 잠을 청하기엔 아무래도 이른 시각이었다. 그날 밤 따라 내리는 빗소리가 정겹게 들렸다. 비록 해변의 낭만과 밤하늘의 별들은 빼앗겼지만. 그때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듣는 노래임에도 가락과 노랫말이 맑고 청아했다. 낭랑한 기타 반주음이 빗소리에 튕겨 올랐다. ‘오, 노래 좋은데?’ 갑자기 노래하는 그들이 궁금해졌다. 동시에 마주 본 친구와 눈빛이 오가자 둘이는 슬리퍼를 끌고 소리 나는 곳을 찾아 나섰다. 머지 않은 곳에 노래의 주인공들이 있었다. ‘대천장’이라고 쓰인 숙박업소에 들어서자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통기타를 든 한 남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신입생 워크숍에 나온 대학생들이라고 했다. 그 밤에 처음 노래하는 그를 보았다. 신입생 신분으로 참석한 오세복이라는 학생이었다. 그날 밤 들려준 노래가 모두 그의 자작곡이란 것을 알았고, 그중에 학생들 요청으로 여러 번 들려준 노래가 ‘긴 머리 소녀’였다. 빗소리에 아롱지는 예쁜 노랫말과 서정적인 멜로디가 시처럼 아름답게 느껴졌다. 학생들은 그를 따라 가사와 멜로디를 익혔다. 그의 재능은 그날로 알아보았다. 후일 그가 친구의 조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삼촌의 부름을 받아 여러 번 술자리에 불려 나오면서 우리와도 친근해졌다. 그때마다 꼬투리를 잡는 것이 호칭 문제였다. 삼촌 친구를 부르기가 좀은 애매하기도 했을 것이다. “세복아. 삼촌 친구도 삼촌이다. 형이라고 부르면 안 되지.” 삼촌을 형이라 부른다고 면박을 받으면서도 그는 나오는 대로 불렀다. 그때만 해도 가수로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전의 일이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그는 이미 가수로서 자질과 재능을 보여주고 있었다. 1970년대의 청년 문화는 포크음악 그중에서도 통기타 듀오의 전성시대였다. 음악으로 가는 오세복의 길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가 동국대에 입학하자 같은 캠퍼스에서 우연하게 선배 이두진과 마주쳤다. 두 사람이 희문중고등학교와 대학 1년 선후배로 만나게 된 것이다. 하루는 이두진이 오세복을 찾아왔다. “신입생 환영회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우리 노래해 보지 않을래?” “우리 둘이서?” “그래. 너 만들어 놓은 곡 많잖아. 한 곡 불러 보자.” 세복은 두진의 제의가 싫지 않았다. 습작한 곡이 꽤 쌓인 데다 한 번은 밖으로 알려 평가를 받고 싶었다. “좋아. 해보지 뭐.” 둘은 의기 투합했다. 세복과 두진은 그해 신입생 환영회 행사에 듀오로 출연하여 자작곡 “긴 머리 소녀”를 열창했다. 행사장에 난리가 났다. 학생들은 혜성처럼 나타난 듀오가 초청가수가 아닌 같은 학교 학생이란 것을 알고 더 열광했다. 노래하는 사진과 기사가 대학신문에 크게 실렸다. 이렇게 시작된 그들의 인기는 전 대학가로 확산되었다. 오세복은 이두진과 함께 듀오를 결성했다. 두 사람의 성(姓)을 따서 ‘둘다섯’이 란 이름을 붙였다. 음반사에서 거침없이 레코드 취입을 제의했다. 이렇게 ‘긴머리 소녀’를 타이틀곡으로 한 첫 앨범이 1974년 나오면서 젊은이들 사이에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다. “빗소리 들리면 떠오르는 얼굴 / 달처럼 탐스러운 하얀 얼굴 / 우연히 만났다 말 없이 가버린 / 긴 머리 소녀야. / 눈 먼 아이처럼 귀 먼 아이처럼 / 조심조심 징검다리 건너던 / 개울 건너 작은 집에 긴 머리 소녀야/ 눈 감고 두 손 모아 널 위해 기도하리라. 대학가에서 시작된 ‘긴 머리 소녀’의 인기는 여학생, 공단의 여공(여성 근로자), 여차장(버스안내원) 사이로 번졌다. 당시 구로공단에는 가족 생계를 위해 시골에서 올라와 취업한 나이 어린 소녀들이 많았다. 이들을 위한 위문공연이 있을 때면 단골로 등장한 노래가 ‘긴 머리 소녀’였다. 청순한 소녀와의 우연한 만남과 이별, 그리움의 노래는 얼핏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를 떠올리게 했다. ‘둘다섯’은 이 빼어난 앨범 한 장으로 한국 포크계의 확고한 지분을 차지할 수 있었다. 같은 음반에 실렸던 ‘밤배’ 또한 히트곡 반열에 올랐다. ‘밤배’는 중고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실릴 만큼 서정성 있는 가사와 멜로디, 아름다운 화음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언젠가 오세복으로부터 ‘밤배’를 만들게 된 뒷얘기를 들었다. 대학 1학년 때, 기타를 메고 제주에 있는 친구를 찾아 작곡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가난한 학생 신분에 비행기는 탈 수 없으므로 목포에서 제주까지 14시간 걸리는 배를 탔다. 배는 긴 뱃고동소리를 울리며 항구를 떠났고 조금씩 멀어지던 육지는 어느새 아득하게 멀어졌다. 배가 공해상으로 들어서자 사방이 망망한 대해로 출렁였다. 어느새 배 위로 땅거미가 앉기 시작했다. 세복은 땅거미가 내리는 바다 위의 자신이 만경창파에 떠 있는 한 장의 낙엽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끝 모를 아득함과 아련함이 머릿속을 거미줄처럼 휘감았다. 세복은 갑판에 쭈그려 앉아 아득히 흔들리는 상념과 언어를 메모장에 옮겨 적었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온 즉시, 갑판에서 쓴 메모지를 꺼내 작곡을 시작했다. ‘밤배’는 이렇게 태어났다. 훗날 ‘밤배’가 이두진의 곡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그가 대학생이던 시절, 남해를 여행 중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보리암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남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왔고, 상주해수욕장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졌다. 그날 밤 깜깜한 밤바다에 작은 불빛이 외롭게 떠 가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그 감상을 그대로 메모해 즉석에서 흥얼거려 보았다. 노래는 다음 날 완성되었다. 그는 지금도 보리암에서 바라본 밤바다의 작은 불빛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 불빛에서 거친 바다와 싸우며 삶을 영위하는 어민들의 운명이 어른거렸다. 그들에게 파도 소리는 노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경창파에 홀로 떠 있는 작은 배. 흔들거리는 불빛 하나에 의지한 채 어디론가를 찾아가야 하는 밤배의 고달픈 숙명이 인간과 닮았다. 그래서 사람들에겐 스스로를 위로하고 달래줄 노래가 필요했을 것이다. 검은빛 바다 위를 밤배 저 밤배 / 무섭지도 않은가 봐 한없이 흘러가네 / 밤하늘 잔별들이 아롱져 비칠 때면 작은 노를 저어 저어 은하수 건너가네 / 끝없이 끝없이 자꾸만 가면 어디서 어디서 잠들 텐가 / 음~ 볼 사람 찾는 이 없는 조그만 밤배야 조그만 밤배야. 두 사람 다 웅숭깊은 서정적 감성으로 낭만 포크의 일가를 이루었다. 많은 자작곡을 잇따라 발표해 젊은 층을 중심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밤배, 이름 모를 소녀, 얼룩고무신, 먼 훗날, 일기 등 지금도 이 노래들을 기억하는 장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술을 좋아했던 오세복은 간경화로 건강을 잃으면서 노래도 잃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어야 했고, 그 뒤 아들의 간을 이식받아 활동을 재개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듀오를 재결성하고 새 음반을 내기 위해 재킷까지 준비를 마쳤다는데, 거기까지였다. 끝내 음반은 빛을 보지 못했다. 오세복은 67세 되던 2021년 8월 패혈증으로 세상에 마지막 작별 인사를 고했기 때문이다. 8월이면 그가 떠난 지 만 2년이다. ‘긴 머리 소녀’는 아직도 우리들 가슴 속에 긴 여운을 드리우는데, 노래의 주인공들은 기억 저편에서 희미한 메아리로 여울지고 있을 뿐이다. 인생이 한바탕 꿈이라 한다면, 꿈처럼 쓸쓸하고 허망한 것이 또 있을까. -소설가 / daum cafe 이관순의 손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