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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30일(주)
* 시작 기도
주님...
이방 여인 가나안 사람 라합을 통하여 믿음의 고백을 하게 하신 주님은 이방인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을 통하여서도 신앙 고백을 하게 하십니다.
(수 2:11b)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시니라.
(왕하 5:17)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과연 주님은 온 천하 만물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만물 위에 계셔서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롬 9:5).
그러나 가장 낮고 천한 이 죄인은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컬으며 내 마음대로 주장하는 자였음을 고백합니다.
죄인 중에 괴수인 나는 주의 공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입니다.
죽음의 자리, 진노의 자리, 진멸의 자리만이 내게 가장 합당한 자리임을 압니다.
하오니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나에게 긍휼을 베푸사 주님의 은혜를 부어주소서.
손톱 밑의 때만큼이라도 좋사오니 이 하루도 주님의 은혜로 살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오늘은 공동체로 드리는 예배가 있는 주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모아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함과 정직함으로 나아가는 날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왕하 5:15-27
제목 : 게하시가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에게서 무엇이든지 받으리라.
15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하건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하니
16 이르되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 앞에서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나아만이 받으라고 강권하되 그가 거절하니라.
17 나아만이 이르되 그러면 청하건대 노새 두 마리에 싫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18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신당에 들어가 거기서 경배하며 그가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19 엘리사가 이르되 너는 평안히 가라 하니라. 그가 엘리사를 떠나 조금 가니라.
20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가 가지고 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 하고
21 나아만의 뒤를 쫓아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서 내려 맞이하여 이르되 평안이냐 하니
22 그가 이르되 평안하나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제자 중에 두 청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로 왔으니 청하건대 당신은 그들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23 나아만이 이르되 바라건대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고 그를 강권하여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 벌을 아울러 두 사환에게 지우매 그들이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
24 언덕에 이르러서는 게하시가 그 물건을 두 사환의 손에서 받아 집에 감추고 그들을 보내 가게 한 후
25 들어가 그의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하니 대답하되 당신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26 엘리사가 이르되 한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이할 때에 내 마음이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
27 그러므로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하니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나병이 발하여 눈 같이 되었더라.
* 나의 묵상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아람 사람 군대장관 나아만에게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하였다.
이 말은 엘리사가 한 말이지만, 하나님이 엘리사를 통하여 주신 신적 명령이다.
이 말씀에 복종한 나아만은 어린아이의 살결과 같이 깨끗하게 되었다.
복종의 결과이다.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다시 나아와서 이렇게 고백한다.
“이제 나는 온 천하에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오니 부디 나의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하지만 엘리사는 그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나아만은 다시 청하기를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달라고 하면서 이제부터는 다른 신에게 제사하지 않겠고 오직 여호와께 드리겠다고 한다.
다만 한 가지 일 곧 자신의 주인인 아람의 왕이 자기의 몸을 의지하여 림몬의 신당에서 절을 할 때 자기도 어쩔 수 없이 몸을 굽히게 되는데 여호와께서 이 일을 용서해 주실 것을 원하였다.
이 말을 들은 엘리사는 그에게 평안히 갈 것을 권하였다.
그의 말을 듣고 아람으로 돌아가는 나아만에게 한 무리가 쫓아온다.
이는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와 그의 종들이었다.
게하시는 나아만을 쫓아가면서 스스로 다짐한다.
그것도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말이다.
그는 엘리사가 그렇게 위대한 일을 하고서도 나아만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않은 것에 대하여 못내 아쉬워한다.
그래서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무엇이든지 받아내고야 말 것이라고 다짐을 하는 것이다.
나아만에게 이르자 나아만이 그를 정중히 맞는다.
샬롬!, 게하시도 샬롬!으로 응대한다.
그러면서 거짓으로 나아만을 속여 그에게서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받아낸다.
그것도 자기의 스승인 엘리사가 달라고 했다면서 받아낸 것이다.
그는 자기의 종들이 진 그것들을 언덕에 이르렀을 때 받아서 감추고 그들을 보냈다.
이제 게하시는 엘리사에게로 갔다.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어디 다녀오는 길이냐고 물었다.
게하시는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엘리사가 게하시더러, 한 사람(나아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이할 때에 내 마음(영)이 함께 갔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을 때냐고 꾸짖는다.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나아만의 나병이 너에게 붙어서 너의 자손에게 영원토록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 즉시 게하시의 몸에 나병이 발하여 눈과 같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전의 세계에서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나 항상 아버지의 계명에 복종했으며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셨다.
(요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 17:24)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창세전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신 주님은 상위권위인 아버지께 복종하심으로 사랑을 받으신 것이다.
아들의 복종을 통한 사랑이 있는 그 자리에 아버지는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시는 사랑을 나타내셨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나타내 보이는 사랑은 다름 아니라 영광이며 이는 아버지의 본질의 계시이다.
엘리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며 말씀대로 행한 선지자이다.
아버지의 말씀에 복종할 때 그 자리에 아버지의 영광이 나타나신다.
하나님의 영광은 결코 사람이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계시이다.
예수 믿는 자가 세상에서 1등 했다고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유대교적 사고일 뿐이다.
하나님을 믿는 내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1등을 하고, 부자가 되고, 회사가 잘 되어 영광을 드러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영광이 드러나는 곳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에서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그 자리에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계시된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는 그 자리는 끔찍하고 비참한 자리요, 육신적으로 보면 개죽음이다.
만약 이를 유대교적 사고로 본다면 저주 받은 자의 죽음일 뿐이다.
그러나 스데반의 죽음의 자리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셨다.
(행 7: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마치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또한 하나님의 영광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자리, 즉 말씀을 통한 사귐과 교제가 있는 그 자리에 임한다.
영생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귐과 교제를 통하여 아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영생의 본질이요, 이 영생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것이다.
(요일 1:3-4)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엘리사가 선포한 하나님의 신적 명령과 그 말씀에 순종한 나아만 사이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그 결과 나아만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한편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만 그의 영이 둔하여져서 세상의 물질과 욕심에 눈이 어두워지고 만다.
(왕하 5:20)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가 가지고 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 하고
게하시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자로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영안이 어두워지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도 거짓말과 도둑질을 하는 것이다.
이런 자리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장을 끊는 듯한 아픔이 있을 뿐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품속에 있을 때는 그들이 벌거벗었으나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창 2: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그런데 이들이 범죄하고 나니까 그들의 눈이 밝아져 벗은 것이 보였고 그것이 그들 눈에 너무나 부끄럽게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품에 있을 때는 부끄럽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안식과 만족의 상태였으나 범죄한 후에는 자의식의 눈이 밝아져서 부끄러움도 보이고 평안과 만족이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들이 아버지의 품속에서 떠나 동산 수풀 사이로 숨었을 때 아버지의 가슴은 텅 비어버렸다.
가슴 가득 채우고 있던 자식들이 당신의 품속을 박차고 떠나버렸을 때 아버지의 심장은 공허함 그 자체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 텅 빈 가슴을 부여잡고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면서 아담을 추적해 가셨다.
아버지의 품속을 자식이 떠날 때 아버지는 애끓는 심장을 부여잡으시는 것이다.
나는 게하시와 같은 자였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욕심이 나를 지배하였다.
예전에 김해에서 목회를 할 때도 양적인 성장 논리에 빠져 그 탐욕에서 벗어나지를 못했었다.
교회의 재정 역시 풍성해야만 안심하였다.
성도들이 십일조나 감사헌금 등 헌금 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들의 삶의 형편을 살피면서 아버지의 심정으로 아파하고 위해서 기도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단순히 헌금하지 않는 것 때문에 ‘저들의 신앙이 왜 저러지?’ 하면서 내 속에서 분노가 끊이지 않았다.
이것은 성도들의 신앙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욕심을 위함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게하시와 같은 탐욕에 눈이 어두워 목사가 아니라 먹사요, 목회가 아니라 먹회를 하고 있던 나에게 주님은 공의의 심판으로 임하셨다.
복음으로 찾아오신 주님은, 주님의 이름을 빙자한 모든 목회 사역의 욕심을 보게 하셨다.
복음을 통하여 내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나는 거짓과 탐욕으로 점철된 발람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주님과 함께 무덤에 거하면서 새롭게 성소를 지어나갔다.
목회를 한다고 하여 모든 것을 주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그 목회에 나의 욕심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 있는지는 내가 너무나 잘 안다.
주님의 뜻이 아니라 나의 뜻, 나의 욕심으로 목회를 했으니 그런 나를 통하여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실망을 하고 상처를 입었을까를 생각하면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나는 탐욕에 눈이 먼 게하시나 발람보다 더한 자이다.
그런 나를 주님은 그 품에 안아 주셨다.
주님의 너른 품으로 품으신 주님은 그 안에서 성소를 짓는 나에게 당신의 생명을 주셨고 이제는 아들의 생명으로 산다.
더 이상 나의 거할 주소는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있는 그 나라, 창세전 곧 만물 위의 세계이다.
주님이 계시는 그 자리에 그토록 함께 있기를 원하셨던 것처럼 나는 이제 그 나라에 주님과 함께 거한다.
그곳만이 내가 거할 집이요 나의 주소이다.
지금은 한국에서의 국내 목회를 내려놓고 베트남 하이퐁에 와서 한인 목회를 하고 있다.
목회의 규모를 보면 비교 불가이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목회에 나는 자족한다.
이는 나의 욕심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는 목회를 통해서 오직 주와 복음만을 전하기 때문이다.
게하시가 나아만에게서 받아온 돈과 물건을 그의 집에 숨겨 놓으므로 해서 그의 재산이 좀 불어났을지는 모르나, 엘리사의 영이 게하시와 함께 있었음에도 게하시는 그것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영안이 닫혀 있었던 것이다.
어제도 과거이다.
어제까지 영안이 닫힌 채로 행하며 쌓아 놓았던 모든 세상의 욕심과 목회의 탐욕들은 다 무너졌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다.
무너질 것은 빨리 무너져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진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나를 살리셨고 그것을 통하여 의가 세워졌다.
세상을 향한 욕심과 나의 영달을 위한 목회의 탐욕은 이제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 십자가에 못 박고 나도 주님과 연합되어 십자가에 못 박혔다.
주님의 장사되심에 나도 함께 장사되어 주께서 살아나신 것처럼 나도 새 생명으로 일으키심을 받았다.
이제는 땅의 지체를 죽이고, 옛 사람을 벗어 새 사람으로 위의 것을 찾으며 사는 자가 되었다.
그 자리가 영생의 자리이며 그 곳에 아버지와 아들이 보았던 영광이 임하여 나도 그 영광을 본다.
오늘도 어김없이 임하시는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 앞에 다시금 찬송과 영광을 올려 드린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보내신 이의 명령을 좇아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셨던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목회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주님의 길이 아니라 나의 길, 탐욕의 길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 길은 게하시의 길이요, 탐욕에 눈이 멀어 어그러진 길로 가는 발람의 길이었습니다.
내 뜻을 이루려 할수록 더욱 환난과 곤고가 나의 앞에 태산처럼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런 나에게 공의의 심판으로 찾아오신 주님은 무덤으로 인도하셨나이다.
그곳이 주님의 품속인줄도 모르고 벗어나려고만 발버둥 쳤던 이 무지한 종이 이제는 압니다.
그곳이 가장 안전하다는 것을요.
그곳에 있을 때만 온전히 숨을 쉴 수 있고 참 안식과 평안이 있습니다.
나도 용납하지 못하는 나를 용납하여 주신 주님.
이제는 세상의 욕망과 목회를 통하여 성공하고 보란 듯이 살려는 3A의 탐욕을 벗어버리고 오직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