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가장(家長)
눈 어두워진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 주는
착한 아들이고도 싶고
지친 아내의 마음을 보듬어주는
착한 남편이고도 싶고
딸아이의 감수성을 품어내는
착한 아비이고도 싶지만
그 착함을 이루어갈 능력이 내겐 없습니다
힘들어도 힘들다 말할 수 없는
슬픈 가장이 되어
혼자 숨어 울었던 날들도 여러 날입니다
뭉툭해진 어머니의 발톱을 깎다 슬퍼지고
늙어 가는 아내의 눈가 주름을 보다 슬퍼지고
딸아이의 무심한 눈빛에 마음 베여 슬퍼지고
착한 사람으로 살고 싶은 소원과는 달리
슬픈 사람으로만 살았습니다
누구도 행복하게 할 수 없는
멍든 마음으로만 살았습니다
그래도 힘든 날 달아나지 않고
끝까지 제자리 지켜 낸 것 대견해
오늘은 거울 보며 혼자 웃어봅니다
‘이만하면 잘 살았지’
스스로 위로하며 한참을 들여다봅니다
꿈 많던 소년은 사라지고
슬픈 중년의 한 남자 빙그레 웃어줍니다
먼 하늘을 우러르다
‘고생했다.’ 다독이는 음성 하나
바람결에 들은 것도 같습니다
평범한 주일 오후
슬픈 가장 혼자
베란다 창문 가에 서서
먼 하늘 바라보며
웃는 듯, 우는 듯
또 그렇게
인생의 한 고개를
담담히 넘어갑니다
(정용수. 교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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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가장(家長)- 정용수
아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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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3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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