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 네 건을 경험하며~~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흔히 오래간만에 만나는 이웃이나 지인에게 물으면 들을 수 있는 답변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가장 흔히 접하는 답변은 그럭저럭 삽니다. 이고 다음으로는 죽지 못해 삽니다 라는 답변입니다.
<산다는 건 다 그런거에요. 인생이 별거 있나요?> 라며 물음표를 던지는 대중가요도 있습니다.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어가면서 드는 생각은 인생이란 참 묘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나이테는 나무를 잘랐을 때 둥근 무늬를 띄는 것으로서 온대지방에서는 흔히 일년에 한 줄이 생기기에 연륜이라 칭한다고 사전은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나무에 둥근 띄 한 줄이 그려지기까지의 시간 동안 나무가 겪었어야 할 세파를 생각해 보면 연륜이란 그저 생기는 게 아님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정한 나이가 되었음에도 일반적 행위를 벗어난 행동을 하는 사람을 향해 나이를 헛먹었다 라 말하곤 합니다.
인생살이에서 나이 값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말처럼 간단하지 않습니다.
동일한 관점에서 바른 목회자로 살아낸다는 것 역시 쉽지만은 않음을 절감하게 됩니다. 인생의 연륜이 늘어가면서 가장 경계하게 되는 이들은 인생과 목회를 글로 배운 사람들입니다.
어쩌다 이들과 대화를 하게 되면 흠 잡을데 없는 논리임에도 구름위에서 사는것 같습니다.
반면에 조금은 투박하고 부족해보이지만 온몸으로 살아가면서 쟁이로서의 삶을 구현하려는 분들을 뵈면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나름대로 관내 3개 마을을 품고서 살아내고픈 마음의 일환에서 생긴 습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군청 홈페이지에 있는 부고란에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봅니다.
지난 2015년부터 관내 마을과 연관성이 있는 상가가 생기면 교회명의로 조화 바구니를 지속적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수년간 하다 보니 좋은 점은 어쩌다가 이장님들 중에는 눈 여겨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궂긴 일에 신경을 써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줄때면 이 일에 보람을 느낍니다.
담임 목회자로 살아가면서 목사의 직임과 역할 중 긍지와 보람을 경험하는 것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내는 분들의 곁에 있어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난 주중에 관내 마을과 연관된 네 가정의 부음을 접하며 조문을 다녀왔습니다.
그중 두 분은 교회 인근의 어르신들이었고, 두 분은 본 교회와 인연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한분은 101세 되신 권사님이신데, 자녀들이 비 신앙인들인지 부음조차 알리지 않았습니다.
습관처럼 군청 부음란에 들어가서 알게 된 권사님의 별세 소식에 급히 조화를 보내며 성의만 표시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조언하길, 오랜 시간 본 교회를 다닌 것으로 아는데 목회자라도 조문을 가는게 예의이지 않느냐기에 일리 있는 말이라는 생각으로 조문을 갔더니 의외로 상주분들이 반가워하시기에 조문하기를 잘했다 싶었습니다.
수요일 오후, 교회 집사님으로부터 모친께서 귀천하셨다는 부음을 들었습니다.
지난달 중순! 96세 된 친정 모친께서 많이 좋지 않아서 홍천아산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뵈었습니다.
본 교회 교우는 아니지만, 2015년부터 3-4년간 따님댁에 거주하면서 주일마다 열심히 참석하셨고 꽃을 좋아하신 어르신은 봄 가을 나들이를 무척 기다리셨습니다.
건강이 여의치 않아 함께 갈수 없게 되자 너무 아쉬워하시던 모습이었던 어르신을 찾아뵈러 병원에 갔을 때 직감적으로 시간이 많지 않음을 느꼈습니다.
그로부터 주2회씩 몇차례 찾아가 찬송을 들려드리고 기도하면서 이달을 넘기기가 어렵겠다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는 이르게 가셨습니다.
이땅에서의 삶의 끈을 마지막으로 부여잡고 있는 분들을 부담없이 찾아갈 수 있는 이들은 목회자라고 생각합니다.
웬만한 장소에서 환자와의 관계를 물을 때 목사라고 신분을 밝히면, 대부분 수긍하고 기도해 주러 오셨구나 합니다.
할머니 권사님이 소천당하시기 전날 병원을 찾아가“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를 들려 드리며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길 기도했었습니다.
교우 분들과 조문을 갔더니 상주 분들이 “모친을 위해서 먼 길을 오셔서 기도해 주셔서 편히 가셨습니다.” 라는데 목회자로서의 보람과 긍지를 가지게 됩니다.
한 분 한 분 떠나가는 분들이 늘어가지만, 그럼에도 함께 해 주시는 교우분들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가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입니다.
안개 같은 인생살이지만, 달려갈 길을 마치기까지 선한 싸움을 싸우는 믿음의 용사로 인정받는 삶이기를 원했던 사도 바울의 고백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인생이었으면 좋겠습니다.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디모데후서 4:6-7)
여러분 한명 한명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첫댓글 귀천.... 참 좋은 단어라고 생각됩니다.
소천 했다는 말도 종종 듣는데
교회에서 소천 받는 것을 소천 했다는
모순 된 말을 들을 때
좀 어색했습니다.
이 목사님의 이웃 사랑,
늘 감동이지만
특히 어려울 때 찾아보는 마음은
유가족들에게 얼마나 고마을까요.
훈훈한 마음이 봄바람에 실려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