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는 사람마다 선생님
잡지사 사장인 그가 나의 법률사무소를 찾아와 답답한 속을 털어놓았다. 그는 잡지업계에서 성공을 거머쥐었다. 병원이든 터미널이든 어디를 가든 그의 잡지가 놓여있었다. 열심히 기도하던 그는 부자가 된 것 같았다. 그는 작가이기도 했다. 서정적인 그의 글은 풀꽃같이 아름다웠다. 그가 새로운 고민을 내게 얘기했다.
“사업이 성공했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정말 인간이 싫어지는 것 같아요. 내가 잡지에 부드러운 글을 쓰니까 뼈도 없는 사람으로 보이나 봐요. 매일 여러 군데서 돈을 뜯으러 와요. 월급을 받는 직원들까지도 내게 많은 걸 기대하는 것 같아요.”
돈이 있고 착해 보이면 그냥 바랜다. 그가 이런 얘기도 했다.
“형제들이나 친척들도 내게 너무 기대려고 해요. 내가 형편이 펴지자 명절이나 무슨 때가 되면 돈을 주곤 했어요. 그 사람들은 사실 내가 주는 돈이 아니라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예요. 그런 데도 기대가 끝이 없어요. 그리고 믿음 생활도 회의가 와요. 다니던 교회에서 나를 장로로 만들고 요구하는 게 달라졌어요. 교회의 재정적인 책임을 지라는 거예요.”
그를 보면서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에게 달려드는 늑대나 여우가 떠올랐다. 인간사회도 그 비슷한 게 아닐까.
부자가 되면 그렇게 값을 치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저녁에는 국회의원을 지낸 분과 함께 시내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그는 메이저 신문의 정치부장으로 있다가 정계로 옮겼다. 그가 국회의원 생활의 이면에 대해 털어놓았다.
“국회의원을 하니까 거지 같은 기분이 듭디다. 움직이는 순간순간이 돈인 거예요. 돈을 얻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은근히 위협해서 뺏기도 했죠. 정치보스에게 돈 몇 푼 받아먹고 말을 잘 들어야 공천도 주지 자기 의견 내세우고 패거리에 들지 않으면 안 시켜줘요. 딱 한 번하고 스스로 그만 뒀어요. 그 후로 중소기업을 삼십년째 운영하고 있는데 기자와 국회의원 시절 정말 구름 위에서 살았구나 하고 깨닫게 됩디다.”
그에게서 국회의원이란 껍질 속에 어떤 알맹이가 들어있는지를 배운 것 같다.
“인생이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물었다. 그는 나름대로 성공한 인생이었다.
“축구로 치면 페날티킥을 쏠 때 골 기둥에 맞고 튀어나오는 경우와 골인하는 게 아주 미세한 차이란 말이예요. 눈에 보이지 않는 각자의 운명이라는 게 있는 것 같아요. 거기 순응하면서 사는 거죠.”
변호사라는 직업은 다양한 사람들이 털어놓는 솔직한 얘기들을 듣는다. 책에서 보지 못한 많은 걸 얻게 된다.
돌아오는 길에 택시를 탔다. 사십대 쯤의 여성 기사였다. 택시기사의 생활이 어떠냐고 물으니까 봇물이 터지듯 그녀의 말이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파출부로 나갔어요. 어떻게 내 신세가 파출부가 됐나 생각하니까 서럽더라구요. 그러다 운전을 배워 택시회사에 들어왔어요. 바닥을 한번 치고 나오니까 겁나는 게 없더라구요. 내가 뭐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당당하게 돈을 버는데 누가 뭐라고 그래요?
손님이 욕하고 행패를 부려도 그걸 받아들이고 한쪽으로 흘리는 게 직업이거니 하니까 아무렇지도 않아요. 안 그런 직업이 있을까요? 택시 운전을 하면서 손님들 얘기하는 걸 들으니까 걱정 없이 사는 사람은 없더라구요. 나 혼자 파출부를 할 때는 고통이 나한테만 오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그게 아니예요.”
택시 기사인 그녀의 삶의 경지가 부자나 국회의원보다 한 수 위인 것 같았다. 욕과 비난을 한쪽으로 흘려버리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일까. 바닥을 쳐 본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귀중한 은혜는 아닐까. 그녀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 녹여버리는 용광로를 가슴속에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에게서 뭔가를 배우게 된다. 바닥을 치면 겁나는 게 없게 된다는 말이 속에서 메아리친다. 잃을 게 없으면 세상 뭐가 겁이 날까. 살겠다고 하니까 문제지 죽겠다고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지는 게 아닐까. 바닥에 나자빠지면 그 바닥을 딛고 일어설 일 밖에 없다.
[출처] 만나는 사람마다 선생님|작성자 소소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