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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에 대하여~2탄
인종의 능은 고양시의 서삼릉에 있는 효릉이다.인종은 서모 문정왕후에 대한 효성심이 지극했었다.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자마자 죽었다.그래서 인종을 서모인 문정왕후가 키웠기 때문이다.인종과 명종은 이복 형제이지만 무려 19살 차이가 난다. 경원대군이 태어나기 전에는 문정왕후가 인종을 사랑으로 정성껏 키웠었다.그런데 경원대군을 낳고 나서 문정왕후의 태도는 돌변 했다.
급기야 문정왕후는 인종을 독살했다.지 아들 경원 대군을 왕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경원대군은 겨우 12살에 왕이 되었다.어린 명종을 대신하여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그녀의 세상이 된 것이다.문정왕후는 친정오빠 윤원형과 보우대사를 끌어들여 국정을 농단 했었다.그녀는 보우 대사가 주지로 있는 봉은사를 자주 드나들었다. 보우대사는 문정왕후의 도움을 얻어 쇠퇴했던 불교를 중흥시켰었다.
하지만 보우는 문정왕후 사후 제주도로 귀양가서 제주목사 변협에게 몽둥이로 맞아 죽었다.
명종의 능은 노원구 태강릉에 있는 강릉이다.강릉은 쌍릉이다.
인순왕후 심씨가 명종 옆을 지키고 있다.
명종은 수렴청정을 하며 자신을 따귀를 때리거나 종아리를 회초리로 매질 하며 엄청 핍박 했던 자기 모친 문정왕후 옆에 묻혔다.
문정왕후의 능이 태릉이다.
강릉과 태릉은 고개하나 사이이다.
그 고개에는 길이 하나 있다.그 길을 왕릉숲길이라 하는데 평소에는 통행이 금지 되어 있고 일년에 봄 가을 두 번 보름 씩만 개방된다.그래서 나는 두 번 그 길을 걷는다.그 길은 소나무 숲길이라 그닥 멋은 없다.
그 길보다는 그 고개넘어 삼육대학 캠퍼스 안에 있는 숲길이 진짜 멋있는 길이다.삼육대학은 백년 도 뤌씬전에 태강릉 영역안에 미국 선교사들이 의지가지로 지은 대학이다.지금은 버젓한 종합대학으로 우뚝 섰다.
삼육 대학 오솔길은 전국 숲 오솔길 경연대회에서 준우승한 길이다.그 길 정상에 이름다운 제명 호수가 있다.
호수에는 청동오리 예일곱마리가 짝을 지어 노닐고 자라 서너마리가 바위에서 일광욕과 오수를 즐기곤 한다. 왕릉숲길과 삼육 오솔길과 유군사관학교를 관통하는 구경춘선 길을 아울러 걸으면 힐링이 저절로 된다.
태릉의 석물이 조선 왕릉 중에서 가장 거대하다.명종은 표독스러운 문정왕후를 좋아하지 않았겠지만 왕으로서 효성심을 표하지 않을 수 없어서 능을 거창하게 조성했던 것이다.
태릉은 능침이 높은 언덕에 있어서 정자각 문에서 능침이 보이지 않는다.저건 조선왕릉 중에서 유일한 특징이다.
태강릉의 능역은 엄청나게 넓다.
옛서울공대자리인
서울 산업대학,
원자력병원,
서울여자대학교,
삼육 대학교,
육군사관학교,
태릉선수촌,
태릉 사격장,
태릉골프장,
태릉 스케이트장,
태릉테니스장,
태랑초등학교와
그 주변의 수많은 아파트 단지 등이 모두 태강릉영역이었었다.
명종의 외아들 순회세자는 13세 때 죽었다.
결국 명종이 후사없이 승하 하자 인선왕후가 하성군을 왕으로 봉했다. 그가 선조이다.
선조의 능은 동구릉에 있는 목릉이다.목릉은 동원 이강릉이다.선조의 능침이 왼 쪽 언덕에 있고 의인왕후 능침이 가운데 언덕에 있고 인목왕후가 오른쪽 언덕에 있다
선조는 조선의 최초 방계출신 왕이다.
임진 왜란을 막지 못한 무능한 왕이고 아들 광해를 시기한 못난 왕이기도 하다.선조는 아들을 14명이나 두었다.딸도 11명이다.
자녀가 25명으르 조선의 군주 중 다산 왕이다.저 중에서 광해가 어렵게 왕위를 이어 받았다.형 임해군을 제치고 말이다.
인조의 친부 정원군도 선조의 아들이다.
인목왕후의 아들 영창대군도 선조의 아들이다.영창대군은 광해에 의해 증살되었다.선조 사후에는
인목 왕후는 인목대비가 된다.
인목대비는 서모지만 명목상 광해의 어머니가 된다.인목 대비는 광해에 의해 경운궁 준명당에 유폐 되었었다.
인목대비가 어린 영창대군을 왕으로 만들려는 야심을 가졌다가 아들을 잃고 자신도 유폐당한 것이다. 인조반정 때 광해는 반정군에 의해 인목대비 앞에 잡혀와 인목 대비에 의해 폐위되고 인조가 왕에 임명되었다.
인조의 친부 정원군은 대원군을 거쳐 원종으로 추존되었다.
선조는 임진 왜란 때 궁을 빠져나와 의주까지 몽진을 갔었다. 여차 하면 명나라로 튀기 위해서였다.백성들은 화가 나서 궁궐에 불을 질렀다.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은 분조를 훌륭하게 이끌며 의병을 모아 왜군을 여러차례 무찌르곤 했었다.
이순신과 의병들의 활약 그리고 명군의 도움으로
더는 못 견디고
왜군이 7년만에 지네 땅으로 물러 갔다.풍신나게 생긴 풍신수길이 죽온 것도 왜군이 물러간 이유이기도 하다.
선조는 임진 왜란에 대한 논공행상에서 이순신과 광해의 공은 인정하지 않았다. 반면에 명군의 공은 높이 치하 하였다.
자신이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한 걸 은근히 과시 하기 위해서였다.
선조는 만절필동 제조 변방이란 글을 썼고 가평군수 이재두는 그걸 가평군 조종면 대보리 조종암에 각자해 놓았다.
지금도 조종암에 가면 저 글씨를 볼수 있다. 만절 필동 제조 변방이란 임진 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을 구해 주었으니 앞으로 조선은 명나라 황제에게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토록 변함없이 충성을 다하겠다는 뜻이다.조종암은 조선의 황제가 명나라 황제를 알현 하는 장소란 뜻이다.
저래서 선조를 조선군주 중에서 인조와 더불어 양대 못난이라 하는 것이다.
선조는 아버지 덕흥군을 왕으로 추존 하고자 했지만 결국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선조가 덕흥군을 왕으로 추존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상계동 덕릉고개 전설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광해군의 묘는
남양주시 진건읍에 있다.
문성군부인 류씨도 옆에 묻혀 있다.
유일하게 비공개 능이다.
광해군의 묘는 광해가 폐군 이라서 연산군묘 처럼 몹씨 초라하다.
사유지에 있는 관계로 집입로도 없다. 또한 높은 고지대에 있다.
광해는 폐모 살제란 죄목을 뒤집어 쓰고 폐위되었었다.
강화를 거쳐 제주도로 유배 갔지만 19년간 참고 견디며 66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제주목사는 광해더러
여보게 이영감 !
하고 놀려 댔단다.그런 수모를 참고 견디며 병자호란 까지 지켜봤던 것이다. 연산이 폐위된 지 겨우 두달 만에 죽은 거랑은 매우 대비 된다.
인조의 능은 파주시 탄현면에 있는 장릉이다.장릉은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의 합장릉이다.
인조는 반정으로 왕이 되었지만 망해가는 명나라를 숭배하고 융성하는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라고 배척하다 병자 호란을 불러온 장본인이다.등거리 외교를 펼쳐 조선을 보호 했던 광해와는 정반대 외교를 펼쳤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몽진을 갔다가 결국은 삼전도에서 청태종 앞에서 삼배구고두의 치욕을 당했다.
또한 인조는 친아들인 소현세자를 잔인하게 죽인 비정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
아들 며누리만 죽인 게 아니라 손주셋도 제주도로 귀양보내 둘을 죽게 하였다.
세손주가 귀양 갈 때
첫째 경선군 이석철은 12살
둘째 경완군 이석린은 8살
막내 경안군 이석견은 4세였다.
경선군과 경완군은 제주도 풍토 병에 걸려 죽었는데 가장 어린 경안군은 살아 남았다.경안군은 효종에 의해 강화도로 유배지가 옮겨 지고 십년만에 풀려 났다.
하지만 그 역시 긴 유배생활로 인해 몸이 쇠약 해져서
21세에 사망했다.경안군은 결혼하여 자손을 남겼다. 그의 후손들이 지금도 소현세자와 강회빈 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반면에 봉림대군 즉 효종의 후손들은 헌종때 대가 끊겼다.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기 때문에
인조의 차남 봉림대군이 왕위를 이어 받았다.
그가 효종이다.이로인해 현종 때 예송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소현세자부부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심양으로 인질로 끌려 갔었다.두부부는 청나라에서 황무지를 개간하고 무역으로 큰 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청나라에 끌려가 노예로 전락한 조선인들을 사서 조선으로 돌아왔었다.그래서 백성들의 인기가 치솟았었다.
그게 화근이었다. 자기 자리가 위태롭다고 판단한 인조는 소현 세자를 벼루로 내리쳐서 죽였다.독살이란 설도 있다.그 후 후환을 없애기 위해 며누리 강씨와 손주들까지 죽게 한 것이다.물론 실록에는 학질로 죽었다고 되어 있다.
소현세자의 묘는 서삼릉에 있는 소경원에 있고, 세자비 민회빈 강씨 묘는 광명시 영회원에 있다.
효종의 능은 여주시에 있는 영릉이다.효종은 가능치도 않은 북벌 정책을 세웠던 왕이다.
청나라는 더욱더 강성해져서 조선이 쳐서 무너뜨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그래도 효종은 그렇게라도 해서 백성들의 인기를 얻고자 했을 것이다.
효종의 영릉 재실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원형을 유지 하고 있다.
현종의 능은 동구릉의 숭릉이다.
현종 시대는 쓰잘대기 없는 예송논쟁으로 세월을 허송하느라 별다른
업적이 없다.
그래서 참배객들이 외면 하는 능 중 하나이다.
오늘도 여기 까지 입니다.
첫댓글 즐감ㄴ
어려운 글시작 했군요 잘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