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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에는 전례주년이 있습니다. 전례주년이란 한 해를 주기로, 한 해의 흐름 안에서 지정된 거룩한 날들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 업적과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를 묵상하는 고유한 역법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례헌장 102장 참조) 지금 형태의 전례주년은 4세기 이후 발전됐으며 그 시작은 주님의 파스카 사건과 부활 대축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비오 11세 교황께서 1925년 12월 11일에 제정한 대축일이며, 다른 기념일들에 비해 비교적 늦게 전례력의 마지막 주간으로 고정됐습니다.
오늘의 이 날은 비오 11세 교황의 재위기간에 벌어진 1차 세계대전과 구체제의 붕괴, 2차 세계대전과 전체주의 사상의 확산이라는 비극적 상황을 함께 살펴봐야 합니다. 당시 두 차례의 참혹한 대전과 인종 차별 및 학살이라는 비극은 유럽을 넘어 전 세계를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극과 슬픔으로 몰아넣고 있었습니다. 세계대전의 원인은 매우 복잡합니다. 하지만 그 시작은 전체주의 사상이라는 악마적 광기와 침략에 대한 야욕, 그리고 당시의 대공황과 여러 나라들의 얽히고설킨 이해관계에서 시작됩니다. 도미노처럼 전쟁과 침략 및 흡수 합병은 정당화됐고, 전 세계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상황에 빠지고 맙니다. 결과적으로 공식 사망자만 5646만여 명(1차 대전 사망의 7배), 2100여만 명의 난민과 집계되지 않은 수많은 사상자, 물적 피해와 잔인한 전쟁범죄, 인종청소 등 그 결과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1925년부터 시작된 그리스도 왕 대축일의 유래
그런 전쟁의 참화 속에서 비오 11세 교황은 평화를 위한 노력을 단행하십니다. 전체주의와 인종 차별, 전쟁에 저항할 것을 선포하셨고, 교황 스스로도 평화를 촉구하는 여러 가르침을 직접 선언하셨습니다. 특히나 두 회칙, 이탈리아에서 파시스트의 억압에 저항하는 내용을 담은 '논 압비아모 비소'(Non Abbiamo Bisogno, 1931.6.29), 독일제국 안에서의 종교적인 상황이라는 부제를 단 회칙 '미트 브렌넨데르 조르게'(Mit brennender Sorge, 1937.3.14)는 전체주의와 인종차별을 강하게 비판하는 문헌입니다. 그 속에서 평화를 이루는 방법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와 평화를 위한 인간의 노력임을 재확인합니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비오 11세 교황은 즉위 해인 1922년 12월 23일 회칙 '우비 아르카노 데이'(Ubi arcano Dei)를 통해 인류의 진정한 평화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가능함을 강조했으며, 이 회칙의 중심 주제는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그리스도의 평화를”(Pax Christ in regno Christi)였고 이는 비오 11세 교황의 일생일대의 사목 목표였습니다. 3년이 흐른 1925년 12월 11일 발표한 회칙 '과스 프리마스'(Quas Primas)를 통해 10월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정해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잔인했던 나치에 맞서 저항했던 비오 11세 교황과
아우슈비츠에서 동료를 위해 순교한 콜베 신부와
독재정권에 저항한 김수환 추기경,
그 밖에도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수많은 그리스도인을 떠올려 봅니다.
그런 끔찍한 현실을 목격하며 올바른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니 우리의 일상에서 마주하는 잘못된 현실에 대해
나는 얼마나 사랑과 형제애를 외칠수 있을까?
그런데 시간은 참 빨리 지나네요.
그런 고민만으로 시간이 간다는 것이 서글픕니다. ©이주형
성물은 악세세리가 아님을
수많은 인명이 덧없이 사라져 갔고 파괴와 죽음이 만연했던 당시 상황에서 가장 가슴아파하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당신 아드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온 인류와 화해하셨지만 세상은 여전히 그 사랑과 용서를 거부하고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끔찍한 일을 일삼아 왔습니다. 세계대전은 지난 일이 되었지만, 오늘날의 상황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 용서와 화해, 이웃을 형제로 여기는 마음, 나누고 봉사하는 삶이 희미해진다면 일상과 현실, 세상과 사회는 평화를 이루기 어려울 것입니다. 더 가지려는 욕심, 재화와 번영에 대한 집착, 이웃에 대한 무관심을 넘어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나쁜 마음, 하느님을 인식하지 않는 교만함, 미움과 증오는 결국 지옥도를 그리는 소재일 뿐입니다. 왜 그리스도가 참된 왕이십니까? 섬기고 봉사하고 스스로 목숨을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이 참됨이고 의미 있는 것이며, 진정한 평화의 길이자 왕이 걸어야 할 길이고 또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초대를 받은 이들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살 때에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됩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십자가, 책상 위의 성모상, 벽에 걸린 성화와 손목에 찬 묵주기도, 손가락의 묵주 반지, 가슴에 건 십자 목걸이는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려는 마음으로 내 것을 양보하고, 이웃을 보살피며, 용서와 화해를 베풀라는 하느님 자녀라는 신분증입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언제고 우리에게 찾아올 죽음과 종말, 심판의 날을 묵상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초심을 기억하고 진정으로 우리의 삶을 성찰하고 회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고 함께 기도합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이들의 맏이이시며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 주셨고,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그분께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보십시오, 그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입니다.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고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묵시 1,5ㄱ-7)
이주형 신부(요한)
그리스도 왕, 제대 모자이크, 독일 니 더작센 투이네 프란치스코 수녀원 성당. (이미지 제공 = 박유미)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누구를 따르겠느냐?"
새로이 오시는 주님을 향하는 마음 다짐, 신앙고백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당신이 기쁨의 기름으로 축복하시여 영원한 사제이자 창조 전체의 왕이 되게 하시고, 구원을 완성하기 위하여 흠 없는 어린양으로서 그리고 평화를 위한 희생으로 그를 십자가 상에 바치셨나이다. 언젠가 모든 창조물이 그의 지배를 받게 되는 때 그는 아버지이신 당신께 영원하며 모든 것을 담은 진리와 생명의 왕국, 거룩함과 은총의 왕국,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왕국을 넘기시리이다. 그를 통해 하늘과 땅, 천사와 사람들이 당신을 찬미하며 당신 영광에 찬미의 노래를 부르리이다“ - 그리스도 왕 대축일 감사송에서
살아가며 삶의 순간들을 매듭짓고 또 새로이 시작하는 시간들이 있다. 바쁘게 살아가는 중에도 한 번씩 삶을 돌아보게 하는 시간들이다. 어느 순간의 매듭만이 아니라 삶의 매듭을 짓는 이들, 삶의 매듭을 지은 이들과의 통공까지 돌아보게 하는 전례력의 마지막 주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 그런 마음의 시간을 더 깊이 열어 준다. 특히나 선하고 치열하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다가 가신 분의 삶의 매듭을 대하게 되는 금년 이 시간은 그리스도 왕국을 이루어 가는 순례의 시간에 그리스도가 우리 순례의 목적지라는 그 의미를 더더욱 깊이 그리게 한다.
그리스도 왕, 독일 슈바바하시 성당 제대. (사진 제공 = 박유미)
니케아공의회 1600주년을 기념하며 제정된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그리스도교 박해시기가 지나고 집중적으로 제기되고 고민했던 신학적 문제들은 정리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하는 니케아공의회의 신앙고백을 담고 있다. 부활을 통하여 우리가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도록 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하며, 세상 어느 권력에 매이지 않고 그리스도 왕의 모범과 규율을 따르도록 하는 신앙의 지침이 들어 있다.
그러나 1925년 비오 11세가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도입한 것은 니케아공의회 1600주년이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종전 7년 후, 유럽에서 거의 모든 왕정국가들이 종말을 고할 때 그리스도만이 진실한 왕국임을 선포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왕의 주권에 세례를 받은 모든 신자들이 한몫을 차지하고 있다고 알린다.
중세에는 교황에게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이름이 주어진 반면 황제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표현했다. 여러 종교에서 왕들은 동시에 사제였다. 그로써 초월성으로의 연결이 보장됐다. 20세기까지 왕의 권력이 신에게서 직접 파생된다고 보는 사고가 있었다. 국민들에게서가 아니라 “신의 은총”으로 왕직을 수행한다고 생각했다. 예수의 왕국은 원래 로마 황제에게 붙는 Kyrios라는 이름으로 그리스도에 의해 표현된다. 신과 같은 황제의 자리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세워진다. 그리고 지상과 천상, 세상 모든 것의 지배자(Pantpkrator)로 공경 받는다.
로마 프리실라 카타콤바, 3세기 후반. (이미지 제공 = 박유미)
초대 로마의 성당들에는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 성화나 모자이크가 있었지만 다른 많은 성당에는 왕권을 이어받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제대에 세워졌다.
'Domus', 주님의 집이라는 원래 의미처럼 성당에 들어서면 하느님의 집에 들어서는 것으로 사람들만이 모이는 장소가 아니라 성당 안의 성상들이 나타내 보이듯이 천상의 공동체와 그곳에 모이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함께하는 곳이다.
중세에 지어진 많은 성당들에는 최후의 심판, 재림하시는 주님을 천장그림으로 그려서 신자들 공동체가 그 아래를 통과하며 지나가도록 했다. 최후의 심판 후에 천상에서의 삶이 시작되므로 교회는 세상 지배의 궁궐이 아니라 그리스도 왕이 다스리시는 곳임을 나타낸다.
중세는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의 사랑을 더 깊이 묵상하기 시작한 시기였으므로 중세 때 그리스도 왕을 십자가상에 표현하기 시작했다. 로마네스크 양식이라 불리는 시기다. 이때에 십자가상의 예수를 눈을 뜨고 기도하는 이들을 바라보시는 왕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어떤 힘과 권력의 유혹도 물리치고 십자가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분의 삶의 길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도 왕 천장그림, 플로렌스, 1300년경. (사진 제공 = 박유미)
이런 신앙의 바탕 위에서 세계대전 뒤의 혼란기에 비오 11세가 제정한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가톨릭 사회교리의 민주화에 길을 열기도 하였다. 그리스도만이 정당한 권위를 지니므로 지상 어느 권력자도 그리스도의 계명과 같은 권위를 지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속화와 세속주의에 반대하고 절대자의 신정정치와 절대주의에도 반대하며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 순례의 최종 목적임을 더 깊이 인식하게 했다.
축일 감사송의 내용처럼 '온 세상 만물을 다스리실 그분의 진리와 생명의 왕국, 거룩함과 은총의 왕국,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왕국'. 이 세상 왕국은 아니지만 이미 지금 여기에서 그 왕국이 시작되고 있음을 인식한다. 사람들이 하느님 사랑에 사로잡혀 봉사로 응답하는 곳에서. 그래서 더더욱 함께 살아가는 삶의 바탕에 그리스도의 계명을 놓을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 왕은 규범을 강제하지 않지만 진리와 사랑을 하나로 일치시킨다.
실제로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세속화의 흐름 안에서 교회가 박해를 받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 시대에 그리스도인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당시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며 이런 정신을 더더욱 깊이 심는 날이기도 했다. 독일 청년 그리스도인들은 성령강림 다음 주, 오늘의 삼위일체 대축일을 신앙고백의 날로 정하고 유니폼을 입고 깃발을 들고 크게 신앙대회를 하며 세속 권력의 독재와 전체주의에 반대를 나타냈는데, 나치 정부가 이날을 '국민스포츠축제일'로 정하자 신앙고백의 날을 그리스도와 축일로 옮겨 그 의미를 새겼다.
1933년 독일 에센, 그리스도 왕 대축일 행렬. (사진 제공 = 박유미)
비오 11세는 10월 마지막 주일을 축일로 제정했지만,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전례개혁에 따라서 1969년에 대림절 전 주일, 교회력으로 일 년을 마무리하는 주일에 경축하게 되었다. 이 지상의 삶의 순례 안에서도 지상과 천상을 아우르는 그리스도 왕국 안에서의 통교를 되새기고 우리 삶의 목적을 분명하게 그리게 된 것이다.
생명 보존과 평화에 대한 희망과 바램이, 정의와 사랑에 대한 움직임이 작고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시간들에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새로운 힘과 희망을 불어넣는다. 창조의 세계, 우주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소우주 인간의 작은 행동, 작은 실천 하나하나가 반드시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힐데가르트의 일깨움처럼,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십자가를 지고 있는 우리 각자의 삶이 하나의 질문에 확고하게 답하며 나아간다면 변화는 이루어진다는 확신이다.
한 해 전례력 마무리에 우리 각자의 삶에 응답하는 자세를 묻는 이의 성찰을 내게도 던진다.
로마네스크 양식 십자가, 이탈리아 남티롤 인니헨 성당. (사진 제공 = 박유미)
그리스도 왕 대축일 아침
세 개의 십자가/ 왕이신 당신은 / 가운데/ 그리고 왼쪽에 하나/ 또 오른쪽에 하나.
그 중 하나 모욕하기를/ "너 자신을 도와 봐라"/ 허나 다른 하난 청하기를/ "나를 기억해 주소서"
세 개의 십자가/ 십자가에 매달린 세 사람/
왼쪽 사람 나를 바라보며/ "그를 믿지 말아라/ 어리석은 자 저기 달려 있다“
오른쪽 사람 나를 바라보며/ "그를 믿으라,/ 그의 왕국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 나를 바라보시며/ "결정하여라,
왼쪽을 따를 것인지 오른쪽을 따를 것인지/ 죽음을 택할 것인지 생명을 택할 것인지.
네게 나는 누구인가?/ 어리석은 자인가?/ 아니면/ 왕인가?“
힐데가르트 니스
“나는 왕이다!” 누가 이렇게 말하면 다른 이들이 물끄러미 쳐다볼 것이다.
시대 착오라는 생각을 한다.
왕이니 임금이니 군주니 하는 표현 자체를 어디 드라마에 나오는 시대 사극의 산물들로 여기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내건 현대 사회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들로 보인다.
그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의식 속에는 숨겨진 ‘왕국’이 있다.
왕의 개념이 있고 임금노릇을 하고 군주처럼 행세하는 경우들이 있다.
아이들이 또래끼리 모여서 놀 때에는 골목대장 같은 것이 있다.
그들의 지도자격이다.
간혹 골목대장이 독재를 하기도 한다.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면 여러 삶의 체험으로 풍부한 경험을 갖는다.
그리고는 자기의 경험과 이해를 바탕으로 자기만의 성채를 쌓는다.
그것은 가능하고 다른 것은 불가능하고, 또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런 것이라고 알고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다른 것들은 점차 제외시킨다.
그리고 자신만의 성(城)에 울타리를 친다.
그 안에서 왕노릇을 한다.
자기가 하는 것이 모두 옳다고. 그리고 그 성을 굳건히 지키려고 결코 양보를 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에게도 그 성의 일부를 내어주는 일이 없다.
자신감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그 성을 굳건하게 지키려 애쓴다.
이것이 우리의 의식과 사고 속에 지어놓은 왕국이다.
민주 사회를 사는 현대인들도 대부분은 그러한 사고와 의식구조를 갖고 있다.
그렇게 말할 것이다.
현대를 사는 사람은 매우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가져야 한다고. 맞는 말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인간은 매우 합리적이고 인간 이성에 바탕을 둔 사고를 보편적으로 갖게 되었다.
합리적 사고로 인간 지성의 자각과 과학이 크게 발전하였지만,
인간은 스스로 최고이며 온 세상을 인간이 지배한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 것이다.
시대 사조와 사상이 그랬다. 전통적이고 인간 중심의 고유한 가치를 점차 도외시하였다.
더 나아가 신앙의 가치도 소홀히 하게 되었다.
신앙은 이성을 근거로 결코 쉽게 설명되지 않는 가치이기에 더욱 그러한 것이다.
이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신앙의 가치를 강조할 필요가 생겼다.
인간의 가치가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창조와 사랑으로 인한 것이며 하느님이 주인이심을 더욱 강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
이날은 1925년에 제정되었다.
비오 11세 교황께서는 "첫째의 것(Quas primas)"이라는 교서를 발표하여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장엄하게 지낼 것을 명하였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인간은 단지 피조물일 뿐이며 주님이시고 왕이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라는 신앙고백을 이날 선포하고 있다. 물론 교회는 다른 축일들(주님 공현, 부활, 승천 대축일)을 통해 왕이신 그리스도를 주된 주제로 기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따로 지내는 것은, 세상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왕권과 종말론적 성격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1970년에 와서 이 축일을 연중시기 마지막 주일(제34주일)에 지내도록 지정하였다.
이날은 온 세상의 주님이시며 왕이신 그리스도를 기념하며 경축한다.
본기도와 감사송에서, 인류를 죄악의 노예 상태에서 구원하신 주님께서 바로 만민의 왕이시며
그분의 나라가 진리와 생명, 거룩함과 은총,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임을 고백한다.
말씀 전례는 가나다 해의 3년 주기로 되어있으므로 풍부한 성서 말씀을 들을 수 있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직접 묘사된 구절이 봉독된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모습(가해, 마태 25장)을 보여주며,
"네가 유다인의 왕인가?"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당당하게 대답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나해, 요한 18장)을 들려준다.
또 십자가 오른편의 죄수가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시면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청하는 복음이 봉독된다(다해, 루가 23장).
이날은 연중시기의 마지막 주일이며 전례적으로 새해가 시작되기 전 주일이다.
진정한 우리의 왕이시며 마지막날에 당신의 왕권을 드러내실 주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왕권에 우리 자신을 맡기도록 기도해 보자.
그리고 나만의 성채를 깨고 나의 성안에 진정 주님을 나의 임금으로 모시도록 하자.
- 대구대교구 나기정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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