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는 서시(序詩)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
바울은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에 거룩함에 흠이 없기를 구했다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살전 3:13)
베드로는 주님의 날을 바라보는 사람은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도록 힘쓰라 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벧후 3:14)
점과 흠이 무엇일까?
베드로는 그것이 세상의 즐거움과 노는 것에 빠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벧후 2:13)
흰 도화지에 점 하나도 눈에 쉽게 띄는 이유는 배경이 깨끗하기 때문이다
점과 흠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리스도의 신부에게서 발견되면 안되는 것이다
천국의 풍성함을 누리는 비결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고 거룩함과 상급에 비례한다
거룩함에 이른 완성도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거룩함은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것과 거룩한 삶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과 분리된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시간과 마음이 어디에 있는 것으로 증명된다
베드로와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삶 전체를 드린 사람들이지만
그들도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그것이 영성의 단계에서 마주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들도 흰옷을 예비하기 위해 정결함을 추구하면서 날마나 분투한다
때로는 시험과 연단으로 통해서 실수도 하면서 분발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가 흔히 실수하는 것은 잠시 잠깐의 방심이다
롯과 노아의 공통점이 이와 같다
둘 다 심판을 피한 후에 방심한 상태에서 술 때문에 실수했다
사울도 잠깐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하여 대신 번제를 드렸다가 버림을 당했다
우리 시대에 사람들의 점과 흠은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곳은 음녀가 운영하는 귀신들의 카페로 음행의 포도주를 판다
신부는 바알에 무릎꿇지 않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거기를 빠져나왔고, 더 많은 사람들은 들락날락하고, 대다수는 거기에 빠져 죽어간다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약 4:4)
주님의 날을 기다리는 10명의 처녀들 중에도 잠깐 바벨론에 들러 음녀를 만나고 온다
잠깐이라는 함정, 이것이 점과 흠이며 미련한 처녀의 등잔에서 기름이 소진된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다
내 영혼의 베일을 덮는 것은 점과 흠이 많아지면서 점점 도화지를 가득 채워갈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의 즐거움을 위해 노는 것이 점과 흠이기 때문이다
현대 신앙의 특징은 마음에 부담 주는 어떤 설교도 싫어한다
심판, 지옥, 죄악, 회개, 계명, 산상수훈, 요한계시록의 설교가 강단에서 사라지는 이유다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지 않고 입맛대로 전하는 것은 충성된 종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은 믿음을 강조하면서도 상을 받기 위해 그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해 달렸다고 고백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전 9:24-27).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천국의 비밀을 말씀하시고 상을 여러 번 말씀하셨다
너희의 상, 자기 상은 그들이 행하는 것에 비례하지만 그것이 사라질수도 있다는 경고는 세상에서 그 상의 대가를 미리 받았을 경우라고 하셨다
특히 목회자들이 땅에서 영광을 다 받아 누려 막상 천국에 가보니 상이 없다는 지적이 많다
산상수훈에서 강조하는 고결한 삶의 지침은 진정한 내면의 선과 의로 살아간다
점과 흠이 없는 비결이 산상수훈에 기록되었다
여기에 "자기의"와 "너희의"라는 대비적인 두 종류의 의가 나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낮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5:20)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마 6:1)
현대 교사들은 의를 믿음으로만 해석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의는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주님의 말씀에 사는 것을 뜻한다
산상수훈에서 십계명보다 강화된 계명을 통하여 도덕과 윤리적인 삶을 강조하신 이유도 행함이 없는 그들의 삶을 지적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누구보다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신자들이 정작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 그분을 진심 존경하는 것인지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믿었지만 택함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과 분리되지 않았고 애굽과 바벨론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
빈대는 자기 의에 대한 부작용이고 초가삼간은 반드시 행해야 할 너희 의에 관한 것이다
새로운 기준을 제정할 권한은 예수님께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람의 가르침이 충돌할 때 누구에게 순종해야 할까?
이것도 잠깐의 유혹이다.
출처: 카이로스
https://blog.naver.com/acoloje/223365751076
첫댓글 귀한 진리의 말씀을 명쾌하게 풀어주시고 영적 경각심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마음에 새기며 살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