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망의 시대 복음
사도행전 4:32-35 / 이규현 목사
죽음은 늘 우리 가까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잠을 자는 것은 일종의 죽음 연습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도 죽는 것을 자는 것으로 비유했습니다. 자는데 깨어나지 못하면 그것이 죽음입니다. 잠을 죽음으로 표현한 것은 죽음은 다시 사는 것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음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과 내일, 땅과 하늘, 현세와 내세를 잇는 고리가 육체적 죽음입니다. 부활은 중요한 주제입니다. 교회를 다녀도 부활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을 수도 있습니다.
암을 치료하는 약이 개발되었다고 해도 나와 상관이 없으면 별 관심이 없습니다. 언젠가 암이 완치되는 약이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어마어마한 소식일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음은 부활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복음이 인류에게 가장 큰 굿 뉴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썩어짐의 종노릇 하던 세상에 부활의 새 생명으로 가득한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신약의 교회를 출발하게 한 핵심적인 주제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신약의 교회가 탄생 되었습니다.
본문 33절,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예수님의 죽으심은 제자들과 측근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런데 사흘째 되던 날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은 빈 무덤을 발견합니다. 그리스도는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열한 제자들에게 자기 몸을 보이시고, 형제 야고보에게도 보이십니다. 오백여 형제에게도 보이셨습니다. 부활 이후에는 오순절 날 120명이 모인 곳에 성령이 강력하게 임하셨습니다.
불과 바람같이 임하신 성령에 의해서 120명이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생명을 바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신약 교회의 기초가 됩니다. 부활은 결코 빼앗길 수 없는 주제일 뿐 아니라 핵심 진리입니다.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역사의 판도를 바꾸는 분기점이 되는 사건입니다. 단순히 가십거리로 삼다가 끝나버릴 주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교회는 시작될 수 없습니다. 부활의 믿음 위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부활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의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 죽음으로 인하여 새로운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죽음의 힘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죽음의 위세에 눌려 살아갑니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강제적인 이별입니다. 모든 것의 상실입니다. 죽음보다 더 큰 폭력은 없습니다. 죽음은 잔인합니다. 죽음의 힘이 득세하는 곳에는 애통, 절망, 슬픔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의 사건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냅니다. 초대 교회는 관념적이거나 사상적인 집단과는 다릅니다. 일반 조직체나 단체와 전혀 다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부활 신앙은 그들의 삶의 태도와 삶의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제자들은 애매모호한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진리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복음서의 제자와 사도행전의 제자는 다릅니다.
성령의 임하심으로 십자가와 부활 신앙에 불을 붙였습니다. 오순절의 성령 사건 이후에 부활 신앙으로 무장된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의 생명을 완전히 바쳤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부활의 예수를 증거하는 증인으로 바뀐 것입니다. 다마스쿠스 도상으로 가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가 만난 예수는 부활 예수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면서 자신의 생명을 걸게 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사실 두려워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두려움의 근원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부활 예수는 과거의 예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살아 계신 예수를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는 분입니다. 부활의 주와 함께 살아가는 일상을 살아가십시오. 우리 안에 부활의 생명이 충만할 뿐만 아니라 죽음의 힘이 더 이상 우리에게 작동되지 않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의 공동체는 부활을 노래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매 주일 부활을 노래합니다. 예배 안에서 부활을 경험하고, 부활의 신앙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절망에서 소망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핵심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부활의 예수를 증거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부활 신앙을 전하면 사람들이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위협에 굴하지 않고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 신앙이 그들의 삶 속에 있고 부활의 예수가 그들의 삶에 함께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7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7-9). 부활은 단순히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예수의 생명 안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해도 다시 죽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냥 영원히 사는 것만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 참된 부활입니다.
부활 신앙은 생명을 공유합니다. 본문 32절,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본문 34~35절, “34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부활 공동체에 나타나는 특성입니다. 부활의 공동체는 생명 공동체입니다. 생명을 나누었습니다. 나만의 생명에 집착하는 곳이 아닙니다. 연약한 지체의 필요를 채워주는 생명 공동체입니다. 초대 교회에 일어난 유무상통은 단순히 물질의 통용이 아닙니다. 재물을 나눈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그 안에 역사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밭과 집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재물을 나눈다는 것은 생명을 공유하는 것과 같습니다. 먹는 문제는 중요합니다. 당장 먹을 것이 없으면 죽습니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이 정상이지만 세상에서 펼쳐지는 광경은 어떤 것입니까? 대개는 상대편이 죽어가도 나누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져도 더 움켜쥐려 합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근원적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려움을 거슬러 올라가면 죽음입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생명의 결핍 증세를 느끼며 살아갑니다. 늘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가져도 불안합니다. 그래서 끝도 없이 끌어모으고 축적합니다.
자기의 힘으로 자기의 생명을 지키려는 몸부림입니다. 그것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심하면 다른 사람의 것까지 빼앗으려고 합니다. 곳곳에서 살육극이 벌어집니다. 세상은 치열한 생명 각축전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입니다. 모두가 경쟁자입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스스로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까지 끌어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나만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교회는 서로 나누었습니다. 구제비를 조금 내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실제 모습입니다. 세상에서 전혀 볼 수 없는 새로운 모습입니다.
부활은 무엇입니까?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의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부활 공동체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고대하는 것입니다. 곧 세상의 끝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초대 교회 성도들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여기가 전부가 아니라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만 보이면 어쩔 수 없이 사람이 이기적으로 됩니다. 탐욕적인 삶이 불가피합니다. 세상의 정치가들은 나를 뽑으면 경제 걱정이 없을 거라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대개는 구호로 그칩니다. 세상의 정치는 이 세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잘 먹고 잘사는 세상을 만들어 내겠다고 공약을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초점이 이 땅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정치는 다릅니다. 궁극적으로 이 세상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종말에 기초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목표입니다. 누가 정치를 하든 이 땅은 언제나 모순과 갈등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나누자고 해도 나누지 않습니다. 종말론에 기초한 성령 공동체가 아니면 나눌 수 없습니다. 주님이 곧 오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달라집니다. 여기가 끝이 아니라고 한다면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을 늘 생각하는 사람은 나누는 일이 자연스럽습니다.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현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활에 참여할 때 자기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그것이 비현실적인 삶이 아니게 됩니다. 이 세상이 끝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부활에 대한 관심은 어느 정도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하심으로 종말은 시작되었습니다. 다시 오시면 끝입니다. 우리는 역사의 마지막 때를 살고 있습니다. 분명히 말세의 징조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마지막 때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과 승천까지 하나님의 언약은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말은 동시에 인류의 끝이 다가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의 개념은 다릅니다. 하루가 천년 같을 수 있고, 천년이 하루 같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형태를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세계관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틀이 필요합니다. 마지막 순간에 시선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나라가 가까울수록 그 나라의 백성과 닮은 자로 살아야 합니다.
천국 시민의 모습을 구현해 내야 합니다. 그것이 함께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함께 고통하고 함께 기뻐하는 곳입니다. 모두가 동일한 기쁨을 나누고 즐거워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모습이 이미 2천 년 전에 신약의 교회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나만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는 그런 삶이 아닙니다. 나보다 연약한 사람들을 돌보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배타적인 공동체가 아닙니다. 세상의 것들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욕망해야 합니다. 부활 신앙을 가지면 하나님 나라라는 공동체 개념이 명확해집니다. 부활 신앙은 개인 신앙에 머물러 있지 않게 됩니다. 기도를 할 때도 내가 구하는 기도 제목을 응답해 주는 관점으로만 기도를 생각하면 기도를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개인 기도를 하는 것도 좋지만 함께 모여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항상 공동체적이어야 합니다. 신앙은 비밀 결사대처럼 혼자 믿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 공적인 것이 됩니다.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개인 예배도 중요하지만 함께 예배를 드리며 공동체가 하나 되고 하나님 앞에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수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첫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내 몸만 돌보다가 소멸하는 그런 인생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하여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부활 신앙은 미래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삶에서도 드러나야 합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부활을 증거하는 공동체입니다. 부활의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본문 33절,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들은 입만 열면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전할 메시지의 핵심이 부활이었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2:32).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3:15). 초대 교회는 메시지가 뚜렷했습니다. 세상에 전해야 할 메시지입니다. 부활의 복음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습니다. 사망의 권세 아래 짓눌린 사람들이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을 누리며 살아가는 영생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절망에 빠진 세상에 직접 부활을 외쳐야 합니다.
갑자기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핍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위해서 생명을 걸었습니다. 부활을 증거하지 않으면 교회는 존재 이유가 없습니다.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서 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부활을 붙들지 않으면 교회는 힘을 잃어버립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없으면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죽음 이후의 영원한 세계를 믿기 때문에 부활이 귀중합니다. 잠시 살다가 끝나버리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복음을 알게 된 사람이라면 전해야 합니다. 나만 알고 넘어갈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사적인 것이 아닙니다. 공적이어야 합니다. 알려야 합니다.
부활의 복음은 강력합니다. 복음은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소극적인 태도를 가지면 안 됩니다. 복음은 그 자체로 폭발력이 있습니다. 복음을 받은 사람은 전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사망의 권세에 포위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역할은 뚜렷해집니다. 부활을 알려야 할 유일한 공동체입니다. 생명의 복음을 가진 사람들을 다른 사람을 만날 때마다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지금 봄이 오면서 온 땅에 생명이 발산하고 각종 꽃들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생명은 숨겨지지 않습니다. 발산하고 드러냅니다. 부활 공동체는 살리는 영으로 가득 찬 곳입니다. 부활의 생명을 세상으로 흘려보내야 합니다. 세상은 죽음의 영이 가득합니다. 세상은 온통 죽음으로 도배되어 있습니다. 마귀는 살인의 영, 죽음의 영입니다. 사람들을 위협하고 자기편으로 끌어들입니다. 죽음의 영이 지배하는 세상은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소멸의 힘에 지배받고 있습니다. 세상에 소멸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굳건해 보여도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사람은 죽음을 의식하고 살아갑니다. 살기 위해서 밥을 먹지만 결국은 죽습니다. 건강하기 위해 운동을 하지만 결국은 죽습니다. 사람들은 죽음 앞에 무력합니다. 어디를 가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죽음의 영이 가득합니다. 폭력의 영, 자살의 영, 살인의 영이 가득합니다. 한번 죽고 싶은 마음이 찾아오면 죽음의 영에 시달립니다. 청소년들이 팔목을 칼로 그어서 상처투성이가 된 채 상담을 받으러 옵니다. 입에서 죽고 싶다는 말을 끊임없이 쏟아냅니다. 전도해 보십시오. 죽음에 짓눌려 있는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마귀는 살인의 영입니다. 죽음을 부추기는 영입니다. 우울증이 무서운 것은 우울증이 자살로도 연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 죽고 싶어집니다. 죽음의 환영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부활의 복음보다 더 절실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죽음으로 끝이 난다면 죽음이 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보다 더 강한 힘이 있습니다.
부활은 죽음을 거스르는 힘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죽음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죽을까 봐 두려워했던 베드로를 보십시오. 예수의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붙잡혀서 주님과 똑같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수 없다며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린 채 순교를 당합니다. 부활의 복음 때문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예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된다는 것입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세상이 꽃들로 만연한 것과 같이 부활의 능력은 세상을 바꾸고도 남습니다. 우리 안에 부활의 생명이 넘쳐 흘러넘칠 때 생명의 언어가 흘러나옵니다. 절망적이고 부정적인 이야기가 나올 수 없습니다. 부활의 언어가 따로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죽겠다고 할 때 우리는 살겠다고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아내게 하시는 생명의 능력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만한 힘이 없습니다.
죽음이 지배하는 힘이 거대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죽음의 잿빛 도시 같습니다. 죽음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온 세상에 죽음의 영이 떠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복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썩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더 영광스럽게 변화되는 그날이 올 것입니다. “51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15:51-52). 소멸이 아닙니다. 썩지 않습니다. 영광스러운 변화라는 것입니다. 미래의 소망이 뚜렷할수록 현재의 삶도 밝습니다. 저주의 상징인 죽음까지도 가장 복된 것으로 바꾸어 놓은 부활 사건 때문입니다.
부활이 신앙의 중심, 활동의 중심, 전해야 할 메시지의 중심입니다. 부활의 증인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분이 살아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왔습니다. 부활의 신앙을 무장하고 부활의 일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활절은 가장 기쁜 날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살아나심이 없었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믿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부활은 축제 중의 축제입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를 죽음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활은 완전히 다른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시적으로 육체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다가오면 육체의 허물을 벗어 우리는 죽지 않고 영으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사는 복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부활의 예수를 증거함으로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는 일에 쓰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첫댓글 💖오늘의 끝이 내일의 처음입니다. 오늘 무엇을 했느냐가 내일을 결정합니다.
오늘 바쁜 일을 미루면 더 바쁜 내일이 되고, 오늘 바쁜 일을 처리하면
여유로운 내일이 됩니다. 오늘도 좋은 생각들, 마음들을 가지고 보내도록해요.
꽃길만 걸으시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주인공으로 출발하시는 하루 되세요.💖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