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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의 일 vs 성령의 일
로마서 8:5-11 / 권오진 목사
지난주일 성도님들에게 숙제를 하나 내 드렸습니다.
로마서 8장을 매일 한 번 읽는 것이었습니다. 매일 읽기 힘든 분은 한 주일에 한 번이라고 읽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숙제를 하시고 오셨습니까?
지난주일 말씀드린 대로 독일의 경건파의 창시자 슈페너는 “만일 성서를 반지에 비긴다면, 로마서는 그 보석이며, 로마서 8장은 그 보석에서 가장 반짝이는 부분이다.”할 정도로 로마서 8장이 중요한데, 정작 우리가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하여 내 것으로 만들지 않으신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지금 날씨는 덥고, 휴가철이라 정신없겠지만 하루 5분, 10분 정도 짬을 내셔서 로마서 8장을 한 번씩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믿음이 흔들리는 자에게는 – 확실한 믿음이 생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스러운 자는 –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느끼실 것입니다.
마음의 정욕이 발동하는 자는 – 정욕이 사그라질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가 의심나는 자는 – 성령님이 이끄시는 힘을 체험하실 것입니다.
고독한 자는 –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낄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이 오지 않아 고민하는 자에게는 – 성령님이 기도에 동참해 주실 것입니다.
고통에 빠진 자는 – 구출함을 받을 것입니다.
소망이 흐려지는 자에게는 – 선명하게 소망이 보일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경험을 저와 여러분 모두가 체험 체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1-4절 말씀을 통해 우리 믿음의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해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었다(2절)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1절)고 했습니다.
중요한 내용이니 따라해 보십시오.
<나는 예수님으로 인해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었다>
<나에게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
그럼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었고 / 더 이상 정죄함을 받지 않는 자>인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세상에 존재하는 두 부류의 사람을 소개합니다.
한 부류는 <육신을 쫓는 사람>이고, 또 한 부류는 <성령을 쫓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처음 만드실 때 두 가지 재료를 사용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세기 2:7)
재료 하나는 흙입니다. 흙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흙은 물질입니다. 자연에 있는 이 물질을 하나님이 선택하셨습니다. 흙을 취하셔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육체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재료는 생기, 곧 하나님의 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지은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흙과 생기가 합쳐져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사람이 생령(生靈)이 되니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렇게 아담부터 사람은 <물질과 영이 절묘하게 연결되어서> 하나님과 교제를 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게 한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생기로 지음 받은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꾐에 빠져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영이 있는 인간에게 들어와 하나님의 자리를 취하게 된 것입니다. 사탄이 인간에게 들어올 때에 그냥 들어오지 않고 <죄와 사망>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사탄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인간은 사망으로 인생을 마치게 된 것입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구약시대에는 희생 제사를 드리므로 죄를 용서하셨고, 신약시대에는 <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우리의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 자와 믿지 않은 자의 삶이 완전히 둘로 나눠진다는 것입니다. 한 부류는 <육신을 쫓는 사람>, 또 한 부류는 <성령을 쫓는 사람>입니다.
<육신을 쫓는 사람 vs 성령을 쫓는 사람>
육신을 쫓는 사람 | 성령을 쫓는 사람 | |
생각 | 육신의 일 | 영의 일 |
생각의 결과 | 사망 | 생명과 평안 |
하나님과 관계 | 하나님과 원수 됨 하나님의 말씀 거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함 | 성령이 내주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 |
그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까요?
1. 육신을 쫓는 사람
본문에서 말하는 육신을 쫓는 사람이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지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다 깨어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당연히 <자기중심적이고, 세상 지향적>이겠지요? 보고 듣고 생각하는 모든 초점이 자기 자신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하루에 2만 리터의 공기를 호흡하고, 하루에게 2만 가지의 생각을 한다합니다. 2만 리터의 공기는 접어두고
하루에 2만 가지 생각을 한다고 하는데 그것을 계산을 해보십시다.
하루 24시간, 한 시간은 60분, 1분은 60초입니다.
계산하면 하루 86,400초가 나옵니다. 86,400초 나누기 20,000번의 생각을 나누면 사람은 평균 4.32초마다 한 가지씩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설교를 듣고 있지만 제가 설교를 신통찮게 하면, 4.32초마다 딴 생각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아마 지금 이렇게 계산하는데도 불구하고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을 하고 계시는 분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4.32초마다 한 가지씩 생각하는 사람들인데 <육신을 쫓는 사람들 / 다시 말해 자기중심적, 세상지향적인 사람들>은 육신적인 것만 생각한다고 하니 그들의 모습이 어떻겠습니까? 그들이 어떤 삶을 살겠습니까?
육신을 쫓는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 생각하는데
경주에서 부목사로 사역할 때의 일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당시 섬기는 교회에서 선교원을 크게 잘 운영했습니다. 원아들 중에는 성도 가정의 아이들도 있었지만, 불신자의 가정에서도 많이 왔습니다.
어느 날 선교원에 다니던 6살 딸아이가 집에서 사고로 죽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아이가 세탁기에 들어갔다가 뭘 잘못 눌려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선교원에 다니니 교회에서 장례를 치러 달라고 해서 제가 집례 했습니다.
지금이야 화장장은 어디를 가든 현대식으로 잘 해 놓고 깨끗하지만, 20년 전 경주에 있었던 화장장은 그렇지 못했습니다.(지금은 현대식으로 잘 해 놓음)
당시에는 시신 한 구를 화장하고 나면, 그 위에 관을 올려놓고 예배를 드린 후에 화장을 했습니다.
6살 난 딸아이는 맞는 관이 없어, 선교원 원복을 곱게 입혀 장례를 치우는데, 금방 화장하고 나온 판에 올려놓자 옷 타는 냄새가 났습니다. 그 옆에 죽은 아이의 아빠, 엄마가 서고, 교우들이 몇 명이 서서 화장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한 달 정도 지났을까? 선교원 원아가 세 들어 살던 집 주인이, 교회로 찾아와서 <우리 집에 와서 예배한 번 드려달라는 것입니다.> <겁이 나서 집에 있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물었더니 <죽은 6살 난 아이 아빠가, 남아 있던 아내와 3살 된 아이 둘 다 죽여서> 아빠는 구속되고, 시신은 시에서 처리했는데, ..... 살인 사건이 난 집이 너무 무서우니 예배드려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건의 전말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단칸 셋방에서 살던 아버지가 6살 난 아이가 성생활에 방해된다고 아이를 세탁기에 넣어 죽이고, 그 후에 가정이 불화하니 아내와 아이를 다 죽인 것입니다.
육신을 쫓는 사람의 극단적인 예이지만, 사람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경주 화장장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 더 말씀드리면, 화장장에 일하시는 직원 할아버지이야기입니다. 이 분이 하는 일은 매일 출근해서 퇴근까지 화장을 하는 것입니다. 관을 태우고, 다 타면 재와 유골을 모아 가루를 내어 상가에 주는 것이 그분이 하는 일입니다. 제가 화장장에 갈 때마다 저는 그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섬뜩함을 느꼈습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낡아빠진 옷, 무표정한 얼굴, 사탄을 그리라면 그런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러분! <육신을 쫓는 사람>은 아직도 이렇게 살아갑니다. 육신의 일만 생각합니다. 자기중심의 일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법에는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과는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사망>으로 끝이 납니다.
이런 육신을 쫓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칼뱅이 말하기를 “교만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당나귀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의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2. 성령을 쫓는 사람
성령을 쫓는 사람은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성령>을 여러 가지로 정의해 놓은 것을 봅니다.
9절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를 못하고 계시는 성도님들이 읽으시면 혼돈스러울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도님들은 성부하나님과 성자예수님은 분명하게 이해합니다.
그런데 성령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그렇지 못합니다.
성령은 곧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신학적으로 자세히 연구해 보면, 사도바울과 사도요한은 좀 다른 각도로 성령님을 설명합니다.
요한은 성령이란 <역사적으로 있었던 그리스도가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 영으로 와 계시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계속으로 성령의 역사로 보는 것입니다.
반면 바울은 <앞으로 재림하실 그리스도, 우주를 심판하실 그리스도가 먼저 영으로 오셔서 계신다는 입장입니다.> 종말론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해하던 두 사람의 공통점은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연해서 조금 더 설명하면,
예수님은 2천 년 전에는 육신으로 계셨고, 지금은 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고, 미래에는 완전한 인격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은, 곧 그리스도의 영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9절 하반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성령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을 믿습니까?
예수님이 영으로 여러분과 함께 하심을 믿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사람이요, 예수쟁이>인 것입니다.
그럼 성령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의 삶은 어떠할까요?
앞에서 생각한 대로 <성령을 쫓는 사람은 – 성령의 일을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살면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평안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쫓는 삶을 사신 분의 예를 누구를 들까 생각하다가
지난 7월 20일 별세하시고, 7월 22일 장례예배를 드린 <효촌교회 고 황국환 목사님>이 생각났습니다. 1953년생 금년 우리노회 부노회장이셨는데 암으로 투병하시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황 목사님은 매월 1일이면 어김없이 노회 원에게 좋은 글을 하나 보내셨습니다.
진통제로 하루하루를 견디며 힘 드시면서도 지난 7월 1일에 글을 보냈습니다.
‘내 마음 7월에 담아’
푸른 하늘처럼 높이 올라가 세상을 바라보고 싶어라.
뭉게구름처럼 더위에 지친 이들의 시원한 그늘이 되고 싶어라.
한 여름의 소나기처럼 예고 없이 뜨거움을 식혀주는 청량제가 되고 싶어라.
한줄기 바람처럼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의 땀을 식혀 주고 싶어라
뜨거운 햇볕처럼 인생의 가을에 알곡을 맺도록 용기를 주고 싶어라
반짝이는 별처럼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에게 소망을 불어 넣고 싶어라.
맛을 잃은 세대에 소금처럼 녹아져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라
진통제로 고통스러워하시는 그 순간에도 목회자로서 힘들고 지친 이들을 위해서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담은 글입니다.
하나 더 소개해 드릴까요?
자신이 암으로 고통당하면서 그 아픔으로 느낀 점을 쓴 것입니다.
<아픔은?>
아픔으로 주님을 찾으니 아픔은 주님을 만나는 통로입니다.
아픔으로 길이 막히니 아픔은 새로운 출발입니다.
아픔으로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게 되니 아픔은 화평입니다.
아픔으로 많은 이의 관심을 받으니 아픔은 사랑입니다.
아플 때마다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 따뜻한 손길이 느껴지니 아픔은 은혜의 통로입니다.
숨겨진 보물과 같이 아픔 속에서 발견되는 주님의 놀라운 은혜
기쁨에 겨워 눈가에 맺힌 새벽이슬
아픔은 숨겨진 또 다른 이름의 축복입니다!
암세포가 자신의 건강한 세포를 하나하나 죽여 가는 가운데서도 황목사님은 <자신 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했고, 아픔을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셨고, 이렇게 고백하셨을까요? 그가 성령을 쫓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쫓는 사람은 <성령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일을 생각합니다.> 성령을 쫓는 사람은 <이 땅에서부터 이미 영원한 생명과 평화를 누리면서 살게 됩니다.>
자, 여러분 이제 여러분의 마음의 조종 권을 누구에게 내어주겠습니까?
육신에게, 마귀에게 내어 주겠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께 내어주시겠습니까?
<우리의 생각과 마음의 조정권을 성령님께 내어드리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해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었고(2절) / 우리에게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면(1절) 앞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는 주님이 기뻐하는 일만 생각하는데 집중하고, 주님 기뻐하는 삶을 살아서 / 생명과 평안을 지금부터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저와 함께 오늘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입술로는 큰 소리로 읽고, 귀로는 다시 들어보시겠습니다.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통하여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아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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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기를 아는 자는 남을 원망하지 않고 천명을 아는 자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시들은 꽃은 또 피지만 한번 꺽인 꽃은 다시 피지 못합니다.
병 없는 것이 제일가는 이익이요 만족할 줄 아는 것이 제일 가는 부자입니다.
오늘도 몸도 마음도 따뜻한 기분 좋은 날 되시기 바랍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