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1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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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가우제리코(Gaugericus)
축일 8월 11일
성 가우게리쿠스(또는 가우제리코)는
자신의 성덕으로 인하여 성 니케타(Nicetas)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바로 그 주교를 계승하여
독일 남서부 트리어(Trier)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39년 동안 주교로 봉직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고, 브뤼셀(Brussel)에
수도원을 세우기도 하였다.
게리(Gery)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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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디냐(Digna)
축일 8월 11일
이탈리아 움브리아(Umbria) 지방의 동정 은수자였던
성녀 디냐는 토디(Todi) 인근 산에서 생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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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렐리아(Lelia )
축일 : 8월 11일
아일랜드의 리머릭(Limerick)교구에서는 오늘날에도
성녀 렐리아의 축일을 지내고 있으나,
자세한 전기는 전해오지 않는다.
다만 먼스터(Munster)의 어느 수도원에서
엄격한 수도생활을 했던 분으로만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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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파브로(peter favre)
축일 : 8월 11일
사보트의 빌라뎃 농가에서 태어난 그의
원래 이름은 르페브르이다. 그는 1525년에
파리의 쌩 바르브 대학에 갔으며, 여기서
프란치스꼬 사베리오와 같이 살면서,
성 이냐시오 로욜라를 만났다.
이들 세 사람은 매우 친한 친구가 되었는데,
베드로는 1534년에 서품되어, 예수회가 첫발을
내디딘 8월 15일에 몽마르뜨에서 미사를
집전하였다.
1537년, 그는 이냐시오와 디에고 라이네스와 함께
로마로 갔고, 얼마동안은 그곳의 대학에서
교수로 봉직하다가, 바오로 3세에 의하여
보름스와 라티스본 의회에 파견되었는데,
이 의회는 독일 내의 종교적 혼란을
진정시키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베드로는 이 지방의 성직자와 교회의 상황에
크게 실망하고, 최선의 치료약은
프로테스탄트와의 토의가 아니라 가톨릭 내의
개혁이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이 때부터 그는 끊임없이 설교하였고,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법에 따른 묵상을
지도하여 독일과 프랑스,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성공 사례 중의 하나는 베드로 가니시오와
프란치스꼬 보르지아를 예수회에 입회시킨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그는 교황에 의하여
트렌트 공의회의 신학자로 위촉되었으나,
공의회를 준비하던 중에 로마에서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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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블라안 혹은 블란느(blaan or blane)
축일 : 8월 11일
그는 버트 섬 태생으로, 아일랜드로 가서
성 콤갈과 성 가니체오로부터 훈련을 받았으나,
다시 또 스코틀랜드로 가서는 성 카탄의
문하에서 교육을 마쳤다고 전해온다.
그는 던블린에서 성당과 수도원을 세웠고,
픽트인들의 개종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비트에는 성 블라안에 대한 이야기가 지금도
많이 있으나, 이 성인의 자세한 전기는 전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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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루피노(Rufinus)
축일 8월 11일
이탈리아 마르시(아브루치, Abruzzi)의 주교였던
성 루피누스(또는 루피노)는 알려지지 않은
다른 신자들과 함께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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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수산나(Susanna)
축일 8월 11일
가비니우스라는 어느 사제의 딸인 성녀 수산나는
매우 아름다운 처녀로 교황 성 카이우스(Cajus)의
조카였다. 그녀는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자기 조카인 막시미아누스와 결혼하라는
요구를 뿌리쳤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결혼을 종용하도록 파견했던 궁중 관리인
클라우디우스(Claudius)와 막시무스(Maximus)까지
개종시켰다.
분을 참지 못하던 황제는 클라우디우스와
그의 아내 프레페디냐(Praepedigna)는 물론
그들의 두 아들과 막시무스를 쿠메에서 죽이고,
수산나와 그의 아버지는 참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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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아트락타(attracta)
축일 : 8월 11일
아락트라고도 알려진 그녀는 아일랜드
귀족 가문의 딸로서 그의 부친으로부터
수녀원에 들어갈 허가를 받지 못하자,
쿨라빈에 있던 성 바뜨리시오에게 달려가서
수녀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녀는
루그 가라에 요양원을 세우고 봉사 활동을
주로 하였다. 이곳이 지금의 킬라락트이다.
수많은 기적이 그녀를 통하여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전설은 확실한 근거가 희박한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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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알렉산델(alexander)숯굽는 사람
축일 : 8월 11일
네오체사레아의 주교인 성 그레고리오가
폰투스의 코마나 교구의 주교 선출을 주재하였으나
끝까지 적임자를 선출하지 못하던 중,
어느 익살꾼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왜 알렉산델 숯쟁이를 뽑지 않는가?" 그레고리오는
성령의 감도를 받고서 그를 찾고보니 과연
숯을 구워파는 초라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레고리오는 그와 몇마디 말을 나누어본 결과,
알렉산델은 좋은 가문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음이
드러났으며, 또 글자 그대로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하여
숯장사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로마 순교록에는 그가 "뛰어난 철학자" 였다고
묘사되어 있다. 성 알렉산델은 숯굽는 사람들의
수호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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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에뀌씨오(equitius)
축일 : 8월 11일
성 에뀌씨오는 성 베네딕또가 몬떼 까시노에
수도원을 세울 당시, 아브루찌에 살고 있었다.
그는 늘 기도와 엄격한 규율 밑에서 살기를 바라다가,
발레리아의 어느 은둔소에서 고적한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성덕은 매우 뛰어나게 되었다.
그레고리오(대) 성인도 그의 성덕을 높이
치하하는 글을 썼다. 성 에뀌씨오는, 대부분의
초기 원장들처럼, 수도원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여러 지방을 다녔다.
그당시, 그는 로마의 주교로부터 설교권을
얻지 못하였으나, 자신이 받은 계시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어느날 밤, 어떤 젊은이가 환시 중에
내 곁에 서 있다가, 내 혀를 만지면서 내 도구로
사용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자, 네 혀 위에 내 말을
얹어두니, 어디든지 가서 말씀을 전하여라.'
이떄부터 나는 없어지고 오로지 하느님에 대해서만
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설교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어느 성직자가 교황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설교를 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어느 성직자가
그를 찾아 나섰는데, 이때 그는 자기 구두에
징을 박고 있었다. 교황의 메시지를 손에 받아쥔
가는 즉시 이에 순종하겠노라면서, 피곤할테니
주무시고 가라고 권유하였다. 그날 밤에,
에뀌씨오는 그 성직자에게 백배 사죄하면서,
오늘 뿐만 아니라 내일도 설교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어느 메신저가 당도하였다.
에뀌씨오는 하느님의 사람이니 그를 괴롭히지 말라는
환시를 본 교황이 보낸 사람이었다고 한다.
성인은 560년경 3월 7일에 운명하셨는데,
바로 그날에 성인의 유해가 아퀼라의 성 라우렌씨오
성당에 안장되어 공경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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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인노첸시오 11세(Innocent 11)
축일 : 8월 11일
이탈리아의 꼬모 출신인 베네딕또 오데스칼치는
그곳의 예수회원의 지도 아래 수학하고,
로마와 나폴리에서 법률을 공부하여,
우르바노 8세 밑에서 수많은 직책에서 봉사하다가,
1645년에는 추기경이 되었다.
그는 페라라의 교황 대사로 있다가,
노바라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의 성덕과
개혁 열기는 놀라웠으므로, 1676년 9월 21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재임기간동안 그는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전제 정치를 반대하여
투쟁하였고, 1685년의 낭뜨 칙령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로써 그가 겪은 어려움은 굉장하였다.
특기 사항은 매일 영성체를 권장하고,
정적주의를 단죄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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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제라르도(Gerard)
축일 : 8월 11일
그는 일행들과 함께 성지를 여행하고,
몬떼 가르가노의 성 미카엘 경당을 순례한 뒤에
아브루찌 지역에서 신앙 때문에 모두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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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클라라 동정(1193-1253)
축일;8월 11일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에 관해서 제작된 아주 달콤한
한 편의 영화에서는 햇빛 쏟아지는 들판을
뛰어다니는 금발의 미녀 클라라를 그리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프란치스코 수도원의 짝이 될
한 소녀의 운명을 그린 장면이다.
그녀의 수도 생활의 시작은 그야말로 영화의
주제가 될 만했다. 그녀는 15세에 결혼을 단념하고,
프란치스코의 힘찬 설교에 따라 움직였다.
프란치스코는 일생 동안 그녀의 친구이며
정신적인 지도자였다.
그녀는 18세가 되던 해 어느 날 밤 집을 도망쳐 나와
포르지웅콜라로 가다가, 횃불을 들고 가는
수사를 만났다. 그녀는 그곳의 초라하고 조그마한
경당에서 거친 모직옷을 받아 입고 자기의
보석 벨트를 매듭이 있는 보잘것 없는 밧줄과 바꿨다.
프란치스코는 그녀의 삼단 같은 머리를 가위로
잘라 버리고 그녀를 베네딕토 수녀원에 보냈다.
얼마 후 그녀의 아버지와 삼촌들은 대단히 노하여
들이닥쳤다. 그녀는 자신의 잘라 버린 머리카락을
보이려고 머릿수건을 벗어 던진 채 성당의 제대에
매달려 완강하게 버티었다.
그로부터 16일 후에 그녀의 여동생 아녜스가
그녀에게로 왔다. 다른 이들도 왔다. 그들은
제2회 회원-클라라 수녀회-으로서 프란치스코가
준 규칙에 따라서 속세와는 완전히 떨어져 청빈과
엄격함과 단순한 생활을 지켰다.
프란치스코는 21세의 그녀를 여자 대수도원
원장으로 임명했으며, 그녀는 죽을 때까지
순명으로 그 직책을 성실히 수행했다
수녀들은 맨발로 지내고, 맨바닥에서 자며
고기를 먹지 않고, 완벽하게 침묵을 지켰다.
후에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와 마찬가지로
자매들에게 그런 과격함을 완화시키도록 설득했다.
"우리 몸은 놋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물론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복음적 가난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하루를 생활해 나가는 데 필요한
재물조차도 소유하지 않았다. 교황이 그녀에게 그런
생활방식을 완화하도록 설득했을 때 그녀는
확고 부동하게 말했다.
"나는 나의 죄를 용서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의무를
면제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당시의 기록들은 아시시의 성다미아노 수녀원에서
살던 그녀의 생활에 대한 칭찬으로 가득하다.
클라라는 식탁 옆에서까지 환자 들을 돌보았고,
구걸하는 수녀들의 발을 씻겼다. 그녀가 기도를
드릴 때에는 얼굴이 너무도 빛나서 주위 사람들의
눈이 부실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생애의 마지막 27년 동안 중병으로 고생했다.
그녀의 영향력은 대단해서 교황,추기경, 주교들도
가끔 그녀에게 의논하러 올 정도였으나 그녀 자신은
결코 성다미아노 수녀원을 떠난 적이 없었다.
프란치스코는 그녀에게 커다란 우정과 영감을 주었다.
그녀는 항상 그의 뜻에 따랐으며, 그가
이룬 참된 복음적 생활의 이상에 따랐다.
그녀의 기도와 진실에 관한 잘 알려진 이야기
하나가 있다. 사라센 침공으로 수녀원이 점령
직전에 있었을 때, 그녀는 수녀원 벽에다
축복의 기도문을 붙였다. "오! 주님, 제가 당신의
사랑으로 길러 온 무력한 이 자녀들을 적의 손에서
구해 주시는 것이 당신의 마음에 맞는 일이 아니옵니까?
제가 지금 보호해야 할 이들을 사랑하올 주님께서
보호해 주시기를 간절히 애원합니다."
자매들에게는
"두려워 마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라고
말했다. 결국 사라센은 도망가고 말았다.
설명 ; 41년에 걸친 클라라의 수도 생활은 보잘것 없는
영화 소재로 다루어졌지만, 그 생활의 고결함은
바로 영화 각본 자체이다. 단순함으로 이끈
흔들림 없는 결단력, 프란치스코가 그녀에게
가르친 문자 그대로의 복음적 생활,이상을 약화시키는
현세적 압박에 맞선 용기 있는 저항, 가난과 겸손을
향한 열정, 열렬한 기도 생활과 자매들에 대한
관용 등이 그것이다.
이야기 ; 클라라는 임종 때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
"평화로이 출발하시오. 왜냐하면 당신은
좋은 길을 걸어왔습니다 두려움 없이 가시오.
당신을 창조하신 그분께서 당신을 거룩하게
만드셨으며 항상 당신을 보호하셨고 어머니처럼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축복 받으소서,
나의 하느님. 당신께서 나를 창조 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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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아시시에서 귀족인 오프레두치오와
오르톨라나디 피우미의 딸로 태어난 성녀 클라라
(Clara)는 용모도 뛰어나서 12세 때 혼인을 서두르는
부모들의 강권을 물리쳤으며, 1212년 사순절 때
성 프란치스코의 설교에 크게 감명을 받고
수도생활을 결심하였다.
그녀는 성지 주일에 부모 몰래 집을 빠져나와서
포르지웅콜라에서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수도복을
받았다.
프란치스코는 아직 여자 수도원을 세우지 않았으므로,
바스티아 근방 성 바오로(Paulus)라는 베네딕토
수도원에 그녀가 머물게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들이 그녀를 강제로 집으로
데려가려고 하므로 끝까지 항거하다가,
산 안젤로 디판초로 옮겼는데 그 얼마 후에
15세 된 동생 아녜스까지 언니에게 와서 함께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녀의 부친은 12명의 장정을 무장시켜 아녜스나마
데려오려고 하였지만, 클라라의 간절한 기도의 힘에
의해 끝내 아무도 데려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들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산다미아노(San Damiano) 성당을
모원으로 확정하였으며, 이들을 위한 생활양식을
써줌으로써 가난한 부인회가 탄생된 것이다.
이 회가 잉글랜드(England)에서는 작은 수녀회
(Minoresses)로 불리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클라라회이다.
클라라는 1215년 인노켄티우스 3세
(Innocentius III)로부터 ‘가난의 특권’을
얻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애긍에 의존해도
좋다는 허락이다.
그 후 클라라는 이 특권을 유지하는데 늘 고심하였고,
교황이나 다른 성직자들이 수녀들의 규칙이
너무 엄격하다고 반대해서 많은 곤경을 겪었다.
클라라회의 수녀들은 당시 어느 수도회보다도
엄격하고 가난하였다.
그러나 클라라를 비롯한 동료들은 높은 수준의
관상가들이었으며,
‘복음적 완덕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 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그녀는 약 40년 동안 공동체를 지도하였지만
늘 건강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
성 프란치스코의 뜻이 담긴 클라라회의 회칙은
그녀가 운명하기 이틀 전에야 겨우 승인을 받을
정도로 그 엄격성 때문에 논란이 많았던 것이다.
클라라회는 급속도로 이탈리아 전역과 프랑스,
독일로 보급되었고 교황과 추기경 및 주교들의
자문 역할로써 떨친 그녀의 영향도 지대하였다.
그녀는 수많은 기적으로 더욱 영광스럽게 되었는데,
1241년 그녀의 기도로 프레데릭 2세의 난폭한
군인들로부터 아시시를 구출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1253년 8월 11일에 아시시에서
운명하였는데, 2년 후에 곧바로 시성되었다.
클라라는 텔레비전의 수호성인이고 문장은
성체 현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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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필로메나(Philomena)
축일 : 8월 11일
1802년 이탈리아 로마(Rome)의 프리스킬라(Priscilla)
카다콤바의 한 벽감 속에서 젊은 처녀의 뼈가
발굴되었는데, 고고학자들은 초기 순교자의 유품임을
입증하고 그 순교자가 바로 필로메나임을 밝혀냈다.
1805년 이 유해는 나폴리(Napoli) 교외 무냐노(Mugnano)
교구 성당에 안치되었는데, 이 알려지지 않은
성녀에 대한 공경이 날로 퍼져나가 전 세계가
그녀를 공경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183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
(Gregorius XVI)가 성녀에 대한 공경을 승인하고
8월 11일로 축일을 정하였다.
그러나 1961년 그녀의 무덤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해 알 수 있는 사실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로마의 결정에 의해
공적인 공경이 금지되었다.
그녀는 필루메나(Philumena)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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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티브루시오(Tibrutius)
축일 8월 11일
로마의 차부제였던
성 티브루티우스(또는 티브루시오)는
배교자에 의해 밀고되어 순교하였다.
그는 종종 성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와
동일인으로 여겨지기도 하며, 그의 유해는
라비카나(Labicana) 가도에 묻혔다.
그는 참수되기 전에 불타는 석탄 위를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걸었다.
1969년 이후 그에 대한 공경은
그 지방 교회력으로 제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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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타우리노(Taurinus)
축일 8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