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3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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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노벨로네(Novellone)
축일 8월 13일
노벨로네는 파엔그라 출신으로서
신기료장수로 지내던 사람이다.
그가 어릴 때에는 하느님을 두렵게 생각하지 않고
성장하였으나, 혼인성사를 받을 때부터
그의 무신론적인 생활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는 24세 때에 중병을 앓았는데
그는 이 병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였고,
회복되자마자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어
스스로 고행을 시작하였다. 그는 로마(Rome) 순례 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순례할 때에는 맨발로 여행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책망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는 그의 아내가 문제였다.
가사는 돌보지 않고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만 돌보는
남편을 야속하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아내가 죽자, 그는 은수생활을 꿈꾸고
의논한 결과 카말돌리회에 들어가라는 충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카말돌리 은수자들의 움막 곁에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고 철저한 기도생활을 하여 높은
경지에까지 도달하였다. 그는 46세의 일기로 운명하고,
파엔그라 대성당에 안장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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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라데군다(Radegund)
축일 8월 13일
성녀 라데군다(Radegundis)는 프랑크족의
침략으로 인하여 고향을 등지고
투린지아(Thuringia)로 이주하였고,
20세 때에 클로타르 1세 왕과 정략적인 결혼을
하였다. 남편의 성격은 매우 난폭하였지만,
그녀는 인내하여 10여 년을 살다가 자기 오빠가
살해되는 기회를 이용하여 왕을 떠났다.
그녀는 누아용(Noyon)에서 주교의 도움을 받아서
은신하다가 푸아티에(Poitiers)에 수녀원을 세웠다.
그녀는 이곳에 살면서 시인
성 베난티우스 포르투나투스(Venantius Fortunatus)와
우정을 나누었는데, 그는 나중에 이 수녀원의
고문이 되었다. 이 수녀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정되는 유물로써 유명한데, 베난티우스는
이 수녀원의 십자가를 보고 저 유명한 찬미가인
“왕의 깃발이 앞장서니…”(Vexilla Regis),
“내 혀는 영광스런 승리를 노래하리…”
(Pange, lingua, gloriosi lauream certaminis)
등을 만들었다. 또한 그는
성녀 라데군다의 전기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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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막시모(Maximus)
축일 8월 13일
성 막시무스(또는 막시모)가 증거자로 불리는
이유는 참 진리를 전하려는 그의 노력과 그가
받은 고통 때문이다. 그는 7세기 최고의 정통교리
수호자였고, 성좌의 최고 권위를 열렬하게
옹호했던 인물이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태생으로
헤라클리우스 1세 황제의 비서로 있다가
사임한 뒤에 크리소폴리스(Chrysopolis)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그 후 그곳의 원장으로
여러 편의 신비적인 논문들을 남겼다. 그는
특히 그리스도 단성설을 주장하는 이들과 또
이를 옹호하는 칙서를 낸 콘스탄틴 2세 황제와
투쟁하는 사람들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황 호노리우스 1세(Honorius I)를
도와 교황권의 확립을 위해 적극 헌신했으며,
콘스탄틴 황제의 단성설을 옹호하는
‘티포스’라는 칙서를 단죄하기 위하여 649년의
라테라노 공의회(Council of Laterano)에 참석하여
맹활약하였다.
그는 그 때문에 비치아(Bizya)로 유배되었고,
그 후 페르베리스에서 6년을 지내야만 하였다.
그 후 그는 또 콘스탄티노플로 송환되어 고문을 받고
투옥되었는데, 이 무시무시한 여행으로 인한 후유증
때문에 흑해 연안에 있는 라지카에서 662년 8월 13일
운명하였다. 막시무스는 비잔틴 신비주의의
핵심 인물이며 신학, 신비신학 그리고 수덕신학에 대한
많은 글을 포함하여 성서주석, 영적인 대화집 및
전례적인 상징에 관한 논문 “신비 안내서”
(Mystagogia)를 저술한 장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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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닐도(Benildus)
축일 8월 13일
프랑스인들이 풍요의 땅이라고 부르는
리마뉴에는 투레라고 부르는 조그마한 마을이 있는데,
이곳에는 12세기의 로마네스크풍의 멋진 성당이 있다.
성 베닐두스(또는 베닐도)는 이곳에서 세례를 받고
베드로 로망송이라 불렸다. 12년 후 그는
같은 성당에서 첫 영성체를 했으며, 영적인 기질도
뛰어났지만 지적인 면도 아주 우수한 학생이었다.
그는 그 후 성 요한 세례자 드 라 살
(Joannes Baptista de la Salle)이 세운
‘그리스도교 학교 수도회’에 입회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2년 동안 인내와 기도로써
더 준비하여 마침내 입회 허락을 받았다.
그는 이 수도회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고
또 학교들을 세웠다. 36세 때 그는
오트-로르의 소그스에 학교와 수도원을 세운 후
그곳에서 일생을 보냈다.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오로지 사도직을 위하여 산다. 만일 내가
잘못을 행하면 아이들은 올바르게 성장할 수 없으니,
나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이 말은 곧
그의 교육철학이자 삶의 지표였던 것이다.
그를 평한 어느 제자의 말은 다음과 같다.
“베닐도는 천사처럼 선하고 성인처럼 사신 분이다.
훌륭한 교사였다. 엄격했지만 항상 따뜻한 분이었다.
격려와 사랑을 주셨지만 고된 일은 스스로 하도록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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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비그베르토(Wigbert)
축일 8월 13일
성 비그베르투스(Wigbertus, 또는 비그베르토)는
젊어서 세상을 멀리하고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가 그를 초청하여
독일 민족의 개종을 돕게 한 후에 카셀(Kassel)에서
3마일 떨어진 프리츠랄(Fritzlar)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그 후 그는
투린지아(Thuringia)의 오르드루프(Ohrdruf)로
옮겨갔는데 그는 이 두 곳의 수도원을 모두
성공적으로 운영하였다.
그러나 그의 전기 작가는 그의 일상생활보다는
기적을 많이 기록해 놓을 정도로 초자연적인
은총을 많이 받은 듯하다. 그는 지나친 단식과
엄격한 생활로 인하여 운명했다고 한다.
위그베르투스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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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심플리치아노(simplician)
축일 : 8월 13일
성 암브로시오와 절친한 친구이던
성 심플리치아노는 성 아우구스띠노의 믿을만한
동료로서 그의 개종에 큰 영향을 끼친 분이다.
성 암브로시오는 심플리치아노의 인품과 성덕을
찬양했으며, 늙은 나이로 밀라노의
주교가 되었다(397년). 그는 불과 3년동안
교구를 위해 헌신하다가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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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John)"알베르니아"
축일 : 8월 13일
그가 태어난 지명을 따서 "페르모의" 성 요한이라고도
부르나, 그가 라 베르나 산에서 운명하고 완덕을
닦았으므로 "알베르니아의" 성 요한으로 통용된다.
그는 1272년에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하고,
성 프란칫꼬가 오상을 받았던 라 베르나에서 지냈다.
그는 이곳의 동굴에 거처를 마련하고, 잠은 별로
자지 않았으며, 대부분 맨땅에서 지냈다.
그는 일년 내내 고독 속에서 보속과 관상으로 지냈는데,
자주 환시를 보았으며, 주님과 성인들의 환시가
대부분이었다. 한번은 성 프란치스꼬를 환시로 보고
이웃 사람들을 도우라는 명을 받고, 처음으로
라 베르나 지역을 순회하며 설교한 적이 있다.
그는 천상의 지혜와 남의 영혼상태를 읽는 능력을
받았고, 지식인을 능가하는 놀라운 설교와 권고로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또한 그는 저 유명한 시인이며 동료 수고자인
야꼬뽀네 다 또디의 절친한 친구였다.
임종 때에 그의 동료들에게 준 권고는
그의 위대한 성덕을 표현한 것이다.
"그대가 착한 마음 갖기가 소원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만 알기를 바라시오. 그분은 길이시니...
그대가 지혜를 소유코져 하면, 예수 그리스도만
알기를 바라시오. 그분이 진리이시니...
그대가 영광을 맛보고져 하면, 예수 그리스도만
알기를 바라시오, 그분이 생명이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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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베르크만(John Berchmans)
축일 8월 13일
성 요한 베르크만(Joannes Berchmans)은
어느 구두 수선공의 맏이로 벨기에
브라반트(Brabant)의 디스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사제가 되는 꿈을 꾸다가 13세 때
요한 프로이몬트(John Froymont)라는 사람의
하인이 되었다. 마침내 그는 1615년
말리네스(Malines)에 새로 세워진 예수회 대학에
들어갔고, 그 다음 해에 예수회 수련자가 되었다.
그는 1618년 로마(Rome)로 가서 학업을 계속하였는데,
미소한 일에서 완덕을 추구한 그의 성덕이 널리
알려지고 그의 근면함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은 감명을 심어주었다. 그의 사후에는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났다. 그는 1888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요한 베르크만은 복사들의 수호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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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윌리엄 프리먼(William Freeman)
축일 8월 13일
윌리엄 프리먼은 영국 요크셔(Yorkshire)의
이스트 라이딩(East Riding) 태생으로 옥스퍼드의
막달렌 대학에서 수학하던 중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으나
1586년까지는 드러내놓고 신자생활을 하지 못했다.
1558년 그는 타이번(Tyburn)에서
성 에드워드 스트랜스햄(Edward Stransham)의
순교 현장을 목격한 뒤 큰 감명을 받아
프랑스의 랭스(Reims)로 가서 사제가 되었다.
1589년 그는 영국 선교사로 파견되어 주로
우스터셔(Worcestershire)와 워릭셔(Warwickshire)
변경 지방에서 6년 동안 성공적으로 활동했고,
또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친구들과도 접촉하였다.
그 후 그는 체포되어 사제임이 드러나서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는 1929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빌리암 프리먼으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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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제르트루다(Gertrude)
축일 8월 13일
1227년 9월 성지의 십자군에 가담했던 남편이
죽은 뒤에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Elisabeth) 왕비는
세 번째 딸을 낳고 게르투르다
(Gertrudis, 또는 제르트루다)라고 불렀다.
남편이 출정에 앞서 만일 딸을 낳으면 알텐베르크의
프레몽트레 수녀회에 입회시키라고 했기 때문에
어린 게르투르다는 곧 그곳으로 보내졌다.
장성한 그녀는 본인의 의사에 따라 수녀가 되었고
22세 때에는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어머니의 뜻을 따라 그녀는 자신이 물려받은
유산 대부분을 수도원을 짓거나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 사용하였다. 그녀는 15년 동안
원장직을 맡아 봉사하다가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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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첸톨라(Centolla)
성녀 헬레나(Helena)
축일 8월 13일
성녀 첸톨라와 성녀 헬레나(Helena)는
에스파냐 출신 여성으로 로마제국의 박해 동안
부르고스(Burgos) 부근에서 살해되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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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카시아노(Cassian)
축일 8월 13일
성 카시아누스(Cassianus, 또는 카시아노)는
성 폰티아누스(Pontianus)에 의해 개종한 후
그를 계승하여 이탈리아 토디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에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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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카시아노(Cassian)
축일 8월 13일
자료는 희박하지만 이몰라에는
성 카시아누스(Cassianus, 또는 카시아노)라는
순교자 이야기가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데
사실 여부를 밝히기는 어렵다. 그는 원래
그리스도인 교사였는데, 이방신에게 희생제물
봉헌을 거부했기 때문에 학생들에 의하여 경원시
당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학생들의 철 펜에 찔려
순교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형태의 죽음은 다른
순교자들에게도 일어났다 하는데, 그 대표적인
성인은 아레투사의 성 마르코(Marcus)이다.
이 성인은 시리아에서 순교하였고,
축일은 3월 29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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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폰시아노(Pontian)
축일 8월 13일
로마인 칼푸르니우스의 아들인
성 폰티아누스(Pontianus, 또는 폰시아노)는
230년 7월 21일에 교황
성 우르바누스 1세(Urbanus I)를 계승하여
교황위에 올랐다. 그는 232년 로마 교회회의를
소집하고 오리게네스(Origenes) 일파의 단죄를
확인하였다. 막시미누스 트락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그가 맨 처음으로
사르데냐(Sardegna) 섬으로 추방되었는데,
그는 여기서 대립교황인 히폴리투스(Hippolytus)를
만나 교회와 화해토록 하였다.
그는 235년 10월 29일 또는 30일에 이탈리아
사르데냐(Sardegna) 섬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시신은 히폴리투스의 시신과 함께
파비아누스(Fabianus) 교황에 의하여 로마(Rome)의
성 칼리스투스(Callistus) 카타콤바에 새로
마련된 교황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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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히폴리토(Hippolytus)
축일 8월 13일
학덕이 뛰어난 로마의 사제였던
성 히폴리투스(또는 히폴리토)는
성 이레네우스(Irenaeus)의 제자이며 초대교회의
저명한 신학자였다. 그는 교황
성 제피리누스(Zephyrinus)를 공공연하게
비난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로마에서 퍼지기
시작한 그리스도론적 이단, 특히 모달리즘
(Modalism, 삼위일체 하느님은 한 분이신
하느님의 세 형태에 불과하다는 樣態說)과
사벨리우스주의(Sabellianism, 사벨리우스의
이단적인 삼위일체설)에 대한 교황의 관대한
태도 때문이었다.
교황 성 칼리스투스 1세(Callistus I)가
217년에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히폴리투스는
자신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대립교황으로
등극하고 칼리스투스의 후계자인 교황
성 우르바누스 1세(Urbanus I)와
성 폰티아누스(Pontianus)를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그는 235년 막시미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교황 폰티아누스와
함께 사르데냐(Sardegna) 섬으로 추방되었는데,
여기서 교황과 화해하였다. 그는 사르데냐에서
운명하였는데, 갖은 고문 끝에 죽었기 때문에
순교자로 간주되고 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모든 이단을 반박함”이란 저서이다.
이외에도 그는 다니엘서와 아가에 대한
주석을 하였고, “사도적 전승”이란 책을
저술하였다.
그는 그리스 교부의 한 사람으로
교회 저술가이자 최초의 대립교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