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amu.wiki/w/%ED%8C%8C%EB%A6%AC%20%EC%99%B8%EB%B0%A9%EC%A0%84%EA%B5%90%ED%9A%8C
<파리외방 전교회> 심볼도 뭐 딱 제수이트네
교황청 직속이고 죽을 결심하고 아시아 정착한 순교자들인데
꽤나 우리나라에 잘 정착하고
자국민 포섭해 천주교도나 사제 성직다 등으로 만들고
외국으로 유학도 보내줘서 해당 국가의 제수이트 위해 희생가능하겠끔
교육시켜왔네. 그러면서 계몽하며 아시아 전쟁을 유도했던 거고.
이게 우리나라 제수이트의 가장 전신이자 핵심 역사 아닌가 싶음.
종교의 원리 자체는 죄가 없지만
그 안에 임하는 이들이 종교를 권력 위해 정치적으로 남용했던 것이 언제나 문제였지..
제일 인상 깊은 건 교황 핵심 세력인 오페르트 도굴 사건의 당사자 스타니슬라스
안중근 종부성사 집권(?)한 니콜라 빌렘
미국 기반으로 정부에서 인정해주는 독립운동가들은 다수가 천주교거나
이들 중 제수이트와 관련 인물들도 꽤 있을 듯.
진짜 순수하게 나라 기반으로 독립 운동한 분들은 행적이 묘연하고. 그게 포인트더라)
그래서 근현대사에서 주요 요직을 차지하게 된 인물들 (정치계 재벌 등) 중에
천주교 가입한 인물들이 대부분이고 그 당시 부와 권력을 축적해
현재 부유하게 사는 상류층 중에도 천주교도들이 많지.
나는 개인적으로 피에르 모방 ( 이 사람 매우 중요.우리나라에 천주교(대외적으로는 천주교나)
제수이트 세력을 확장시킨 인물)
피에르 모방은 로마 카톨릭 교회 신부 >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이 된 후
청나라에 분란일으키려고 파견되다 조선에 선교하기를 결심하게 됨..
국내 최초의 천주교 선교사였음. 제수이트에 대해 알면 외방전교회가 교황청 직속이니
프랑스혁명부터 시작해서 아시아 전쟁에 얼마나 내밀하게 관여했는지 이해가 갈 거임....
그리고 뤼네 뒤퐁(드봉) 이 안동교구 초대교구장이네.
그래서 영국 왕실이나 부시 등 본인 세도가들의 기틀을 가진 조상과 연관이 있으니
안동을 그렇게 좋아했구나 싶네
그 외 대구부터 뭐 서울은 당연한거고 꽤나 지금도 입김이 센 지역들이
다 천주교 근간의 지역들이라 신기했음. 당연히 현재 세도가들 정치인 재벌들과 연관 있겠지?
현재 UN 같은 국제기구 관련된 인물들 보면
천주교 관련 자선사업이나 적십자 등 전쟁 고아나 치료 관련한 내부자들 곁에 배우던 사람들 많음.
제수이트가 사상 전파 등으로 각국에 분란,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이 난 곳에는 어김없이 적십자가 달려오며 고아원이나 여러 치료 관련 운영시설이 동반함.
이게 오늘날의 군산복합체와 거대 제약사가 세트로 움직이게 되는 양상의 시초라서.
천주교 믿으시는 분들에게는 유감 없지만
다수가 표면적인 종교 안에 뿌리내려진 제수이트 세력의 존재를 알까?
다 성인으로 추대되거나 당시 행적이 영웅화되어
역사를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기 어려울 거 같기도.
1825년, 사제 파견을 요청하는 한국인 교우들의 편지를 접하게 된 교황 레오 12세는, 1827년 9월 1일 파리외방전교회에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서는 외국인 입국을 금지하였고, 파리외방전교회 역시 프랑스 혁명 때문에 회원이 10여 명밖에 없었고 돈도 없었기 때문에 어려운 형편이었다. 여기에 포르투갈에서 파견한 마카오 총독과 포르투갈의 후원을 받으며 활동하는 예수회 등의 동아시아 지역 다른 수도회에서도 프랑스 출신 선교사들이 설쳐대는 꼴을 못 봐준다는듯 견제를 시작했다.
하지만 방콕의 보좌주교이던 브뤼기에르(Bruguiére, 蘇) 주교가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였다.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조선대목구를 설정하고,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조선대목(朝鮮代牧)으로 임명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즉시 입국하기 위하여 여행을 떠나 3년이 지난 뒤 만주에 도착하였지만, 조선으로 입국하기가 어려워 기회를 보던 중 1835년 10월 조선을 바라보면서 만주의 교우촌 마가자(馬架子)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https://namu.wiki/w/%ED%8C%8C%EB%A6%AC%20%EC%99%B8%EB%B0%A9%EC%A0%84%EA%B5%90%ED%9A%8C#fn-4" style="font-size:0.8em;vertical-align:super;font-family:'Pretendard JP', Pretendard, '-apple-system', BlinkMacSystemFont, 'Apple SD Gothic Neo', 'Noto Sans KR', 'Noto Sans CJK KR', NanumBarunGothic, Roboto, 'Segoe UI', 'Malgun Gothic', 'Apple Color Emoji', 'Segoe UI Emoji', 'Segoe UI Symbol', sans-serif, emoji;background-color:rgb(28,29,31);">[4]
1836년 모방(Maubant, 羅) 신부, 1837년에 2대 조선 대목인 앵베르(Imbert, 范) 주교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입국하였다. 그들은 곧 파리외방전교회의 본래 목적에 따라 소년 3명https://namu.wiki/w/%ED%8C%8C%EB%A6%AC%20%EC%99%B8%EB%B0%A9%EC%A0%84%EA%B5%90%ED%9A%8C#fn-5" style="font-size:0.8em;vertical-align:super;font-family:'Pretendard JP', Pretendard, '-apple-system', BlinkMacSystemFont, 'Apple SD Gothic Neo', 'Noto Sans KR', 'Noto Sans CJK KR', NanumBarunGothic, Roboto, 'Segoe UI', 'Malgun Gothic', 'Apple Color Emoji', 'Segoe UI Emoji', 'Segoe UI Symbol', sans-serif, emoji;background-color:rgb(28,29,31);">[5]을 선발하여 마카오에 보내 교육을 받고 사제서품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그리하여 1845년엔 최초의 한국인 사제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1849년에는 2번째 한국인 사제로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배출했다.
이에 앞서 1839년 1월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시작되면서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고 1839년 9월에는 마침내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3명도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그 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제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조선 입국을 시도하여, 1845년 10월 3대 조선대목 페레올(Ferréol, 高) 주교, 다블뤼(Daveluy, 安) 신부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충청도 강경(江景)에 도착하였다.
1846년 병오(丙午)박해https://namu.wiki/w/%ED%8C%8C%EB%A6%AC%20%EC%99%B8%EB%B0%A9%EC%A0%84%EA%B5%90%ED%9A%8C#fn-6" style="font-size:0.8em;vertical-align:super;font-family:'Pretendard JP', Pretendard, '-apple-system', BlinkMacSystemFont, 'Apple SD Gothic Neo', 'Noto Sans KR', 'Noto Sans CJK KR', NanumBarunGothic, Roboto, 'Segoe UI', 'Malgun Gothic', 'Apple Color Emoji', 'Segoe UI Emoji', 'Segoe UI Symbol', sans-serif, emoji;background-color:rgb(28,29,31);">[6]를 치른 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비롯하여 메스트르(Maistre, 李),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푸르티에(Pourthié, 申), 페롱(Féron, 權),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볼리외(Beaulieu, 徐), 도리(Dorie, 金), 위앵(Huin, 閔) 신부 등이 계속 입국하였다. 하지만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모두 순교하고 살아남은 선교사 리델, 페롱, 칼레 신부 등 3명도 중국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고, 10년이 지난 1877년이 되어서야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신부들이 순교할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관례에 따라 '원한다면 고국으로 돌려 보내겠다.'고 권고했으나, 신부들은 귀국을 거부하고 순교를 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