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할 시간을 아까워하는 것이 얼마나 큰 우상숭배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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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할 시간을 아까워하는 것이 얼마나 큰 우상숭배인지 모른다. 기도할 시간에 다른 일을 하면 훨씬 더 능률적일 거라고 믿고 있는 한 그의 삶에 기도는 사실 없다. 하나님을 높인다고 하면서 정작 기도는 낮춰 보거나, 기도하는 시간을 최우선순위에 못 둔다면 그의 지식조차 그를 살리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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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 전 휴거론이 성경적 근거가 가장 풍부하고 논리적으로도 맞다 해도 굳이 환난 후 휴거를 고집하는 이들은 실제로 환난 중에 남아 할 일이 있어서일 듯싶다. 이 부분도 믿은 대로 된다면 그들은 환난 성도로 이땅에 남아 전도하고 순교하기까지 적그리스도를 대적할 큰 사명을 받은 건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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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개혁을 지금 누가 싫어하는가. 검찰의 제 식구 감싸기와 봐주기 수사에 제멋대로 뭉개기를 누가 좋아하나. 그 개혁을 개혁의 대상자가 하겠다고 덤비니 반대하는 것이다. 때마침 전에 없이 살아 있는 권력까지도 안 봐주겠다는 검찰은 연일 공격하면서 제 식구만 감싸려 드는 그것이 개혁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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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으로 분단된 한국의 특수 정황을 무시한 채 서구 이론가들의 말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면 무리수가 많다. 국민들은 현 정부가 사회주의적 성향으로 국가를 경영해가려 한다고 의심하고 경계할 자유가 있다. 서구인들이 사회주의를 대하는 태도와 한국민이 체감하는 위기감은 온도 자체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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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자기 앞자리가 나는데도 다른 손님 앉으라고 머뭇거리는 사람들을 보면 참 흐뭇하다.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인격의 힘이 느껴진다. 그나저나 내 바로 앞자리 승객은 주로 장거리를 지그시 여행하신다. 이것도 전문가가 있다면 나는 이 방면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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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난 죽어도 되는 거죠?" 생명보험 가입을 확인하며 던진 말이다. 죽음이 효력을 내는, 죽지 않으면 혜택이 없는 경우가 또 있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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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는 심도에 따라 상투적인 말, 사실을 전하는 말, 의견을 나타내는 말, 감정을 나누는 말, 투명한 말이 있다. 영혼끼리 교감되는 투명한 대화는 감정의 문이 깊이 열릴 때 가능하다. 가족이나 친한 사람과도 가끔 "요즘 괜찮니?" 같은 말을 던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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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영혼은 얼마나 신비롭게 결합되어 있는지. 영혼이 몸인지 몸이 영혼인지 쉬 구별되지 않을 만큼 하나로 움직인다. 그러나 영혼이 몸을 떠나는 죽음을 통해 내 몸은 땅으로 돌아간다. 몸은 일회용 전셋집이다. 타인은 그 집이 아무리 쓸 만해도 못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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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구도자, 무신론자, 안티기독교인들에게 주는 말씀도 더러 있다. 그들이 몰라 안타깝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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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소를 보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민 4:20). 이 땅에서 하나님이 계신 천국은 얼마나 먼가. 누가 감히 흘낏 쳐다볼 흉내라도 낼까. 그곳에 통할 유일한 출입증은 말씀을 통해 내 이름에 덧씌워진 예수님의 붉은 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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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들은 신을 증명해내지 못하면 자동으로 신이 없는 듯 억지만 부리지 정작 자신들은 신의 부재를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리차드 도킨스처럼 전투적인 무신론자들이 나타난 건 반가운 일이다. 무신론 변증이 구체적일수록 그 허구가 만천하에 드러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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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준비되어 쓰임받기도 하지만 쓰임받으면서 준비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너무 완벽하게 준비만 하는 데 시간을 보내기보다 하루하루 주어지는 일, 작은 일상에서 먼저 충실히 쓰임받기를 구해야 한다. 작은 일에 준비된 자가 그 외의 다른 일에도 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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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기도나 찬양을 중시하는 것은 거기에 자녀의 마음이 표현되어 하나님께 드려지기 때문이다. 표현하지 않고 묻어둔 마음도 하나님께서 받으실까. 찬양이나 기도로 표현하라. 표현하지 않고 마음을 자기에게만 보이며 사는 것을 영적 게으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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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필사본의 경우 원본과 현존하는 최고(最古) 사본 간의 시간 간격이 얼마나 짧은지, 또 똑같은 내용의 사본들이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지로 신빙성이 결정된다.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 필사본의 경우 이런 면에서 객관적으로도 탁월한 신빙성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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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의 기록연대는 AD 50-100년인데 현존하는 최고 사본은 130년 경의 것이다. 사본 수도 5,400여개다. BC 4세기 중반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대표작들의 사본은 1100년 경에 필사된 사본이 가장 오래 된 것이고 사본 수도 49개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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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신약성경의 신빙성이 문헌학적으로 볼 때 낮다고 느낀다면, 널리 정평 나 있는 인류의 대부분의 고전들이 과연 원본을 충실히 담은 내용인가를 일일이 다 의심해야 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원본이 안 담겨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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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독일의 요한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하여 성경이 대중화되기 전까지는 손으로 일일이 베껴야 했던 성경 필사본이 매우 귀했다. 그만큼 쉽게 구할 수 없어 신구약 성경에 속한 책들이 각 교회에 낱권으로 흩어져 있었고 필사본이어서 아주 비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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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한 권의 책으로 묶이기까지 성경은 정말 값비싼 희귀한 책이었다. 주로 교회의 성직자들만 읽고 교인들에게 강론해줄 정도였다. 지금은 성경이 너무도 흔해져서 귀한 줄 모른다. 그러나 홍수에 마실 물이 없듯 말씀은 다시 희귀해졌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 121:4).
왠지 이 말은 하나님이 실제로는 졸기도 하고 주무시기도 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을 거라는 경고 같다. 그렇게 보일 때 그럴 분이 아니라는 걸 늘 기억하라는 말 같다.
예전부터 하나님이 한 순간도 졸거나 주무시지도 않고 늘 깨어 계시면 아무리 하나님이지만 피곤하지 않으실까, 깨어 있는 게 행여라도 싫증나진 않으실까 염려해드린 적이 간혹 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켠에서는 하나님이 혹여라도 졸고 계시기라도 하는 그림은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끔찍하고 하나님께 무조건 안 어울린다고 당연시했다.
오늘 하나님은 내게 그러한 그림을 당연시하는 건 부당하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위해 안 졸고 안 주무시는 게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듯하다. 나를 지킬 일이 없으면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마음만 먹으면 잠깐 졸거나 주무실 능력 정도는 간혹 발휘하실 수 있을지 모른다.
이럴 때는 나와 다른 하나님의 유일한 특성이 안 졸고 안 주무시는 일 같다. 거기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안 드러나면 다른 무진장한 능력은 어차피 내가 모르는 거니까 아예 비교조차 않으실 요량 같다.
하나님의 그 최소한의 능력조차 나는 얼마나 믿고 사나. 하나님의 너무 큰 능력만 믿느라 그 작아 보이는 능력은 내내 무시하고 살고 있진 않나. 사람이 나를 24시간 밀착경호한다 해도 보통 일이 아닌데 실제로 나를 그렇게 지키시는 존재가 있다. 그분의 이름은 임마누엘, '하나님이 나(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을 이름으로 가지신 분이다.
내가 졸고 자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눈뜨고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 잠들었을 때도 나는 여전히 그분께 이스라엘이니까 그렇게 움직이지 않고 있어도 나를 경호해주신다. 주의 임재, 주의 동행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그분이 불철주야로 나를 24시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고 지키시는 분으로 모시지 못한 나의 무감각함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주여,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밤낮없이 빈틈없이 나를 인도하시는 분이 나의 하나님이신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금 확인케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다는 말씀은 마치 나는 졸고 잘 때조차도 주님은 내게서 눈길을 거두지 않으신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을 신학적으로만 인정하고 내 일상 속에서는 전적으로 인정치 못한 무감각함을 용서해주시고, 날마다 내 삶에 함께하시는 주의 임재가 내 삶의 유일한 능력의 통로가 된다는 것을 깨닫고 그 일상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누리는 복된 예배자로 살게 하소서!
- 안환균 목사의 SNS에 수년 전 어제 나눈 묵상과 단상 모음
첫댓글 아멘아멘 귀한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