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니님과 어동님의 충동질(?)에 못이겨 '한번 써볼까?'하는 충동적인 마음에, 역시나 충동적으로
글을 올려봅니다. 충동적으로 시작한만큼, 다음 글이 언제 나올지, 이 시리즈(사실, '시리즈'라고
하는 것도 어폐가 있습니다만...)가 얼마나 지속될지, 이번 한번으로 끝날지 말지, 심지어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어디까지 될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손 가는대로, 키보드 가는대로,
'수심을 알지 못하고 바다 위로 날아오른' 김기림의 <나비>같은 느낌이랄까...어쨌거나 그나마
확실한건, 이런 식으로 상황과 풍경과 함께 문학의 풍경, 그리고 종종 아니면 전부 다가 저라는
개인의 내면 풍경이 뒤섞인 글이 되지 않을까 싶긴 하다는 거 정도?
한쿡에서라면 비원 정도나 가야 편안함과 기원을 알 수 없는, 왠지 모를 익숙함을 느끼는, 왠~ㅅ지
전생에 로얄했을 것 같은 저로서는 예전에 해외 학회를 자주 다닐 때도 미쿡의 도시들은 정말 계통이 없고,
전통이 없고, 유서가 없고, 암튼 뭐 '있어 보이는 것'들이 너무 없는 상것들의 도시로밖에 보이지 않았더랬습니다.
그래서 닉네임도 '런던아저씨'인 제가 중년의 나이에 이 상것들의 동네인 뉴욕에 와서 유학 생활을 시작하면서도
대서양 건너 영쿡의 옥스포드 근처 시골 오래된 집에서 자폐적으로 문학 공부를 하고 있는 모습을
자주 상상하고 동경하고 있다는 것도 참 삶의 아이러니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설마 그런 분들은 여기엔 없으리라 생각이 되지만, 언론이나 일반 속세에서 보면 생각의 틀이 너무
편협하고 concrete한
(정신과나 심리학을 전공하시지 않은 분들은 익숙하지 않은 단어의 용법일 것
같은데요, 딱히 우리말로 번역할만한게 없는데, 말 그대로 콩크리트처럼 concrete란 단어는 생각의
융통성이 너무 부족하다는 의미로 많이 씁니다. 예전에 레지던트 동기 아저씨가 이 단어를 누구에게 적용하면서
'대가리에 공구리를 쳤나' 라는, 로얄을 지향하는 런던아저씨와는 졸라 어울리지 않는 열라 저속한
표현을 쓰는 걸 들은 적이 있는데, 네, 딱 그겁니다...ㅋㅋ)
사람들이라면 바로 '그럼, 미국 사는 사람들은 다 쌍놈들이냐?' 이렇게 공격이 들어올 지 모르겠는데요,
암튼 위에 말씀드린 대로 '상것'이란 표현은 어떤 유서와 전통이 부족한 그런 것에 대한 저 개인적인
rhetoric이라고 이해를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뭐, 이해가 안돼도 jolly(아,,,이 단어는 로열한 저로
서는 도저히...ㅋㅋ...암튼 영어에 jolly라는 단어가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습니다) 어쩔 수가 없을 것
같긴 합니다만...ㅋㅋ
어쨌거나, 여기저기 다녀본 대부분의 미쿡 도시들은 유럽 몇몇 나라의 짜가같은 느낌 이상은 잘 들지
않고, 게다가 최근엔 도시 풍경들이 세계 어디고 계속 닮아가는 추세라,,,그나마 미쿡에서는 뉴욕하고
보스톤 정도만이 제 로열한 안목의 한 발목쯤은 되는 동네라 현실적인 것들을 고려해서 이 동네에 오게
되긴 했습니다..
사실 좀더 생각해보면, 이 '상스러움'이라는 것, 말하자면 어떤 로열한 피를 물려받지 않은 사람들의 특성이
세계를 지배하고 주도하게 된 것은 소위 모더니티(근대성)와 관련이 있는 어떤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25년쯤 전 처음 들었던 문학 강의에서의 첫 주제는 역사와 문학의 쌍둥이성에 대한 것이었지요.
역사와 문학이 왜 쌍둥이냐,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너무 낯설게 느껴지는 전혀 다른 장르 아니냐,
왜 이 둘 사이의 구분이 문제가 되느냐라는 생각이 드실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저도 처음엔 참 이상했던 문제였으니까요...
어쨌거나, 서양 문학사에서 대표적으로 <일리아드>나 <오딧세이>를 예로 들면, 과연 이게 역사냐 문학이냐
하는 문제를 바로 던져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근대 이전의 세계에서 지금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많은 작품이나
장르는 '역사'와 구분이 가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 문학들은 이러한 비범한 사람들, 상스럽지 않은 사람
들과 사건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태어남으로부터 죽음까지를 모두 신의 섭리 아래
관통해서 관장하는 '운명'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비극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제가 좋아하는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첫부분 구절처럼, 세계와 삶의 '모든 것이 늘 새로우면서도 낯익은'
그리고 모든 것이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의 것' (Everything in such ages is new and yet familiar,
full of adventure and yet their own.)들이었습니다. 위에 런~이 말씀드린, 그리고 종종 얘기해 온 아이러니조차
포괄하는 커다란 어떤 섭리로서의 운명, 루카치의 용어로는 총체성(totality)이 지배하고 있던 시대였지요.
그러한 세계에서 신이 축출되고, 신이 있던 자리, 운명과 섭리가 있던 자리를 이성이 대신해서 이성과 논리
적 사고를 통해 이 세계가 궁극적으로 이해되어지고 납득되어질 수 있는 세계라는 인식이 출현한 시대가
바로 모더니티의 세계입니다. 이 근대성의 세계에서 삶과 세계의 원리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은 신도 아니고
로얄한 무엇도 아니고(이성이나 논리성의 면에서 보자면, 로얄한데 멍청한 인간들이 당근 많았을 테니까요),
결국 좀더 논리적 사고를 하는 인간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허울 좋게 이런 인간들에게 돈줄을 대는 중산층들,
기존 로얄한 인간들이 보기에는 돈 가지고 장난질 치는 상것들이 자신들의 이야기, 공감님이 잘 쓰는 표현으로
상것들이 자신들의 내러티브를 만들어 내기 시작한게 바로 근대 문학, 특히나 근대 소설의 시작이 아닐까
싶어요. 서양 문학사, 소설사에서 근대소설의 효시로 플로베르의 마담 보봐리를 꼽는 이유 중 하나도 이러한
맥락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이런 로얄한 것들과 상것들, 전근대와 근대성의 갈등과 충돌
과정에서의 얘기들을 약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한국 문학으로 박경리의 <토지>나 김영하의 <검은 꽃>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드네요..
어쨌거나 이런 정해진 어떤 길이 없어진 세계에서 문학은 세계의 '길 찾기'가 아니라 '길 만들기'의 역할,
상것들의 내러티브 만들기에 전념하도록 된 것은 당연했던 과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길 찾기든 길 만들기든, 이런 상것들의 거시기가 문학에서 때로는 염세적이고 비극적으로, 때로는 반대로
희망적이고 낭만적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터지기 일보 직전의 풍선이나 거품처럼 부풀어진 자아의 모습을
띠게 되는 건 어쩌면 이제 300년 남짓밖에 안된 상것들의 시대에서 상것들의 상것들을 위한 몸부림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쓰다보니 어째 전에 하던 시배달의 미쿡판이 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드는데요, 어쨌거나 오늘은
여기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