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9주일(가해)
제1독서(1열왕 19,9ㄱ.11-13ㄴ)는 화가 난 엘리야가 하느님을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이방인 출신 왕비인 이제벨의 명령으로 우상을 섬기는 거짓 예언자들과 싸웠던 엘리야는 우여곡절 끝(40일에 걸쳐서)에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계약을 맺은 호렙(시나이)산 동굴에 도착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그랬듯이 엘리야가 많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인지 하느님 앞에 선뜻 나서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엘리야의 반항을 마치 다 잊은 듯이 당신과 당당하게 맞서라고 그를 부르십니다.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태풍과 지진이 일어난 듯했으며, 불이 타오르듯 했다는데, 하느님의 현존이 드러남을 말하기도 하지만, 엘리야의 반항적 기질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소란스럽고 파괴적이며 별안간 삼킬 듯이 활활 타오르는 불같은 마음으로는 하느님 앞에 나설 수 없습니다. 난잡하고 자기중심적인 행위로는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소용돌이가 지난 뒤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올 때, 엘리야의 마음이 차분해졌을 때, 비로소 엘리야는 얼굴을 가린 채 하느님을 만나러 동굴에서 나왔습니다. 높은 산의 고독함에 친숙해질 때, 파괴적인 소용돌이를 잠재우고 침묵과 고요함에 젖을 때 엘리야는 권능을 지니신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복음(마태 14,22-33)은 제자들이 유령으로 여겼던 예수님께 신앙을 고백합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신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으로 군중을 먹이신(13-21) 다음, 제자들에게 먼저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 하시고, 기도하시려고 외딴곳 산에 오르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뱃머리를 벳사이다로 돌리고 있었습니다(마르 6,45).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192m) 떨어져 있었다면 파도와 돌풍이 자주 분다는 호수 중간쯤 간 것입니다. 제자들이 탄 배가 파도에 시달리기 시작했다는데, 설상가상으로 앞을 가늠하지 못하는 밤(악의 세력이 움직이는 시간)에 맞바람(저항세력)에 시달렸음이 강조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안 계신 사이에 제자들은 마음이 산란해진 나머지(요한 14,1) 서열 다툼을 하느라(마르 9,34) 혼돈의 세력(돌풍)과 예상치 못한 파괴적인 힘(파도)에 휘둘렸음을 상징합니다. 새벽(3-6시: 부활하신 때)에 호수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뵌 제자들은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워 소리를 질렀습니다. 구약성경의 표현대로라면 하느님의 개입이 있는 시간(탈출 14,24; 시편 46,6; 이사 17,4)에 벌어진 일입니다.
만물을 당신 발아래 굴복시키시는(에페 1,22) 예수님께서는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십니다. 대단한 위로의 표현인 “나다!”라고 하신 것은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주님”으로 확실하게 드러내시면서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예수님을 헛되이 섬기는”(15,9) 제자들을 괴롭히는 파도(시기, 질투, 분열)를 제압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라고 청합니다. 베드로는 호수 위를 걸으시는 주님을 의심하면서도(“주님이시거든”) 예수님과 같아지고 싶었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아무도 믿지 않는데도, 베드로는 자기는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으로 청한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의 허락으로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었습니다. 우쭐해진 나머지 베드로는 예수님의 권능에 의심을 품는 순간 믿음이 약해졌고, 거센 바람을 보면서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 물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살려달라고 소리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손을 잡아주시면서 물에 빠진 이유를 깨닫게 하시려고 믿음이 약해서 당신을 의심했다고 꾸짖으십니다. 사도들의 으뜸일지라도 자기가 믿음이 약하다는 것(주님이시거든)을 알았다면, 이제부터라도 겸손해지라는 표징입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싸우느라(마르 9,34) 싸움판이 된 배(공동체) 위에 예수님(선장)께서 오르시자 즉시 바람이 그쳤습니다. 예수님 없이 제자들만 타고 있던 배는 악의 세력(바람과 파도)에 흔들리는 공동체(교회)를 뜻합니다. 복음사가는 “열두 제자들”이 아니라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공동체가 모두 같은 신앙으로, 서로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에(로마 1,19) 일치했음을 강조합니다. 한편 제자들은 물론 초기 교회가 많은 시련과 의심을 극복하고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고 고백했음을 암시합니다.
제2독서(로마 9,1-5)는 복음을 배척하는 유다인에게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간청합니다.
바오로는 몹시 격한 감정으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다인들을 향해 외칩니다(9-11장).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과 더불어 여러 약속이 주어졌음에도 복음을 거부하는 유다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기만 한다면 자신은 저주받아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이런 바오로의 소원과 그가 바치는 기도는 오로지 유다인이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받게 하려는 것입니다(10,1). 거룩한 민족이라는 유다인들이 바오로에게 거짓말로 하느님을 선포한다고 했기 때문에 더욱 화가 난 나머지 로마에 있는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받아들이라고 간청합니다. 하느님께 선택되었다고 당연히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9,6-7). 이러한 진리는 그리스도를 바탕으로 세워졌으며, 자기 양심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께서 증언해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즉시 격한 감정을 추스르려고 예수님을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 찬미하면서 마칩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해주셨건만 혼자 힘으로 이제벨의 거짓 예언자들과 싸워 이겼다고 착각하는 엘리야 같은 교만함과 격렬한 감정으로는, 베드로처럼 의심이 많은 작은 믿음으로는 결코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비록 격렬하게 흔들리는 내적인 소용돌이가 있을지라도 엘리야처럼 격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을 때, 바오로처럼 온갖 저항에도 차분하게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을 때, 베드로처럼 작은 믿음이었지만 풍랑을 재우시는 분의 실체를 알자마자 엎드릴 수 있는 용기가 있을 때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령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공동체 안에서 성경이나 교회의 가르침을 벗어나 자기 방식대로만 한다면, 엘리야처럼 교만과 완고함을 벗어던지지 못하면 하느님을 체험할 수 없을 것이고, 호수 가운데 있던 제자들처럼 서열 다툼으로 혼돈과 악의 세력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호수 가운데에서 광풍(자중지란)을 만나 두려움에 떨었던 제자들은 자비하신 예수님의 권능을 체험한 뒤 그분께 엎드려 경배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풍랑에 흔들리고 두려움에 휩싸인 공동체(배)를 구하러 늘 우리에게 오십니다. 신앙 공동체가 예수님과 함께하지 못할 때, “좋은 일이 생기도록, 교회의 성장이 이루어지도록, 저마다 이웃이 좋을 대로 하지”(로마 15,2) 않는다면 악의 세력인 암흑과 거친 풍랑에 휩싸일 것입니다. 믿음이 약해질 때는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발버둥 칠 것이며, 섬김을 받으려고 몸부림칠 것이며, 하느님께서 주신 권능을 남용하려고 만용을 부릴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 공동체는 늘 흔들리고 악의 수렁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공동체가 예수님의 말씀을 잣대로 삼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에 자신을 송두리째 맡기지 못한다면, 성장은커녕 늘 파괴적인 격정과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이며, 무서운 풍랑에 흔들리면서 두려움과 아픔을 겪을 것이고, 자기들이 부리는 온갖 재주도 쓸모없을 것입니다(시편 107,23-32).
- 방효익 바오로 신부 -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