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하는 습관 고치기
"우리 더 이상 이러지 말자." 대로변에서 친구와 아웅다웅했다. 손에는 각자의 지갑을 꼭 쥔 채. 어깨를 밀치고 팔을 끌어 내리며 상대를 향해 뭔가를 호소하는 두 여자. 모르는 사람이 보면 금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딱 좋은 풍경이다. 하긴, 따지고 보면 일종의 금전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친구와 나에겐 '계산병'이 있다. 뭐라도 먹으면 꼭 자신이 계산하겠다고 나서는 습관이다.
같은 대학과 직장을 다니며 15년 넘게 알아 온 사이라 함께 먹고 마신 밥과 커피가 수두룩한데도 그렇다. 그날도 한참 실랑이한 끝에 앞으로 이러지 말자는 다짐을 하고서야 헤어졌다.
언제부터 그랬을까. 비교적 이른 나이에 취업을 하면서? 아니, 생각해 보면 용돈 받아 생활한 대학생 시절에도 곧잘 계산을 하고 다녔다. 형편이 빤한 대학생들이니 각자 내도 될 텐데 꼭 내가 사고 싶었다.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
이 습관이 극에 달한 때 회사 근처 식당에서 우연히 한 선배를 마주 쳤다. 나는 선배 자리의 밥값까지 계산하고 도망치듯 나왔다. "제가 계산 했어요!"하고 의기양양하게 외치는 나를 바라보던 선배의 황망한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쩌면 기분이 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참 후에야 들었다. 자신이 대접하거나 동석한 일행이 계산하려던 자리였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한 식당에 있었다는 이유로 밥값을 낸 것이다. 선배 입장에서 따져 보면 난데없이, 강제로 계산 당한 셈이다.
습관을 고쳐 보자고 마음먹은 건 그래서였다. 마음 편하자고 먼저 계산하고 다녔지만 배려 없는 행동일지도 몰랐다. 때에 따라서는 상대가 무시당하는 것처럼 느낄 가능성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호의를 호의로 잘 받아들이고 싶기도 했다.
마침 코로나 19로 사람들과 약속이 줄어 계산할 일이 드물어졌다. 오랜 계산병을 고칠 기회였다. 가끔 누군가 밥이나 커피를 산다고 하면 계산대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다음을 기약했다. 몇 번하다 보니 생각 처럼 불편하지 않았다. 때론 홀가분하고 즐겁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터졌다.
지인 가족이 집으로 놀러 왔다. 오랜만에 만난 터라 밀린 안부를 쏟아 내고 저녁까지 함께 먹었다. 그 뒤 자리를 피하려는데 갑자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계산 해야지!'
집에서 먹었으니 계산은 할 수 없고 뭔가 들려 보내기라도 해야 했다. 나도 모르게 부엌 찬장을 열어젖히고 가장 먼저 손에 집히는 걸 내밀었다.
"이거라도 가져가!"
왁자지껄한 소란이 잦아든 뒤, 남편이 조용히 말했다. "혹시……. 얼마짜리인지 알아?"
나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날 지인 가족에게 들려 보낸 건 고급 양주, 그것도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30년산 양주였다. 심지어 내 것도 아니었다. 남편이 누군가에게 선물할 일이 생기면 쓰려고 고이 아껴 둔 것인데……
결국 계산하는 습관을 고치는 데는 장렬히 실패했다. 계산병이 있는 친구를 만나면 여전히 계산대 앞에서 서로를 밀친다. 단돈 천 원짜리 커피라도 내가 사게 해 달라고, 저번에 네가 사지 않았냐며 옥신각신한다. 계산 싸움에서 진 쪽은 황급히 가방을 열어 뭐라도 줄게 없나 찾는다.
뒤늦게 내가 강제로 들려 보낸 양주 소식이 들려왔다. 마침 칠순을 맞은 지인 어머님의 잔칫상에 비장의 무기로 올랐다고 한다. 잔치 분위기가 다소 미적지근했는데, 30년산 양주가 등장하자 후끈 달아오르며 어른들이 만면에 미소를 띠었단다.
뿌듯한 후일담이었다. 어느 잔치 자리를 즐겁게 했다니, 이보다 더 즐거운 실패가 있을까.
오늘도 호시탐탐 계산대로 향할 기회를 엿본다. 어쩌면 계산할 수 있다는 게 고마운 일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면서. 아무래도 내 오랜 계산병은 앞으로도 고치지 못할 것 같다. 아니, 고치지 않을 것 같다.
박정연 | MBC 라디오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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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반갑습니다
한결같이요 님 !
고운 걸음으로 소중한
공유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가슴 설레는
좋은 하루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