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에 진척이 없다며 선납자들이 찾아올 때면 경봉은 언제나, `일단 바보가 되라.'고 일렀다.
`바보가 되는데서 참사람이 나오는 법'이라며, `나무칼로 물베듯 하지 말고 단박에 결판을 지으라.'고 강조했다.
그가 주석하고 있는 극락암의 문턱은 낮았다.
때문인지 그의 육성을 들으려는 수행자와 신도들로 인해 극락암은 늘 붐볐다.
그러나 경봉은 이를 조금도 귀찮아하거나 꺼려하지 않았다.
언제나 밝은 표정으로 신도들에게 감로의 법문을 내렸다.
82세 때부터는 아예 일요일에 정기법회를 열었고, 90을 넘어 부축을 받으면서도 법상에 오르는 일을 빼 놓지 않았다.
노구를 이끌고 법상에 올라 법을 설하면서, “내가 이렇게 설법을 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원이 그러하기 때문”이라고 말을 하곤 했다.
법문을 듣는 청법자는 언제나 1천명을 밑도는 일이 없었다.
경봉은 법문이나 게송을 내림에 있어 언제나 `자기 목소리'를 냈다.
대다수의 선사들이 흔히 중국의 조사어록이나 염송 등에서 게송을 차용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는 현실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스승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그렇기에 공부하는 이들은 경봉을 찾아 법문 듣는 일이 많았다.
그의 법문이나 가르침은 언제나 확신에 차 있었으며 또 쉽고도 간결했다.
평상심이 도(平常心是道)라는 사실을 실천으로 보여 준 것이었다.
강원에서 한창 공부를 하던 시절에도 경봉은 시간만 나면 행방포교(行方布敎)의 길을 나섰다.
일터든 장터든 잔칫집이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라도 가리지 않았다.
6척의 훤칠한 체구의 잘생긴 청년승려가 불교의 깊은 묘리(妙理)를 정연한 논리로 설파할 때면 사람들은 넋을 잃고 경청을 했다.
젊은 시절의 이러한 경험들이 훗날 청법(請法)을 원하는 일반인들이 별 어려움 없이 극락암에 운집할 수 있는 토대가 된 것일 터였다.
실제 경봉은 이 시절, “나는 선재동자(善財童子)처럼 도를 구하고 보현보살의 행원으로 중생을 제도하리라.”는 서원을 세웠고 실제의 삶 속에서 그 원을 지켰다.
깨달음을 이룬 후 경봉은 보임(保任)에 철저한 모습을 보였다.
`경봉의 위대성은 바로 철저한 보임에 있다.'는 세간의 평가는 그의 보임행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견성으로 모든 것이 다 마쳐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어렵게 찾은 옥(玉)을 정성들여 갈고 닦는 데 추호의 소홀함이 없었다.
당대의 선지식이었던 한암, 제산, 용성 등과 수시로 서신을 주고 받으며 지도를 받았다.
특히 한암과의 교유는 16년이라는 나이의 격차를 넘어서 서로를 존경하고 아끼는 지극한 경지에서 이루어진 진정한 도반(道伴), 그것이었다.
당시 한암은 경봉이 보내온 오도송을 보고는 찬탄을 하면서 보임을 위한 일구를 남겼다.
“만약 일생의 일을 원만하고 구족하게 수행하고자 한다면 옛 방편어구(方便語句)로써 스승과 벗을 삼아야 합니다.
제일 요긴한 책은 대혜(大慧)의 `서장(書狀)'과 보조(菩照)의 `절요(節要)'와 `간화결의(看話決疑)'입니다.
이 활구법문(活口法門)을 항상 가까이 두고 때때로 점검해서 자기에게 돌리면 일생의 일이 거의 어긋남이 없을 것입니다.”
이 때 한암의 영향으로 경봉은 주로 보조국사 지눌의 종풍을 중시했다.
한암이 입적하자 경봉은 추도제에 참석하여 영전에 한편의 마지막 애틋한 편지를 지어 올렸으니, 이렇다.
눈빛을 거두는 곳에 오대산이 서늘해꽃과 새 슬피 울고 달에까지 향 연기 어리는 듯 격식 밖의 현담을 누가 아는가 만산엔 의구히 물이 흐르네.
안광수처오대청(眼光收處五坮淸)
화조염비월송향(花鳥念悲月送香)
격외현담수득거(格外玄談誰得去)
만산의구수류장(萬山依舊水流長)
(계속)
첫댓글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
옴 아비라 훔캄 스바하()()()
고맙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