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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 이야기 (1)
황폐한 무덤 속에서 잠을 자던 원효(元曉, 617-686)대사는 심한 갈증으로 잠이 깼다.
곁에서 의상(義湘, 625-702)대사의 고른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모범생처럼 행동거지가 반듯한 의상대사는 잠자는 모습조차 단정했다.
당나라로 유학을 가기 위해 항구로 향하던 두 사람은 직산(樴山:천안)에서 밤을 맞아 무덤 속에서 눈을 붙였다.
그들은 현장(玄奘)법사가 주도하는 중국의 새로운 불교학풍을 배우고 싶어 당나라 유학을 결정했다.
공부에 대한 열망으로 가슴이 뜨거워진 두 사람은 한시가 급했다.
편안한 잠자리를 구하기보다는 항구에 가서 배를 타는 것이 급선무였다.
더구나 이번 유학행은 처음이 아니었다.
10여 년 전에도 그들은 유학을 시도했다.
그러나 고구려와 당나라의 국경인 요동에서 변방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첩자로 오인 받아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다행히 수십 일 만에 간신히 빠져 나와 목숨은 건졌지만 당나라 유학은 좌절되었다.
그런 후 10년 세월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덧없는 것이 세월이었다.
당나라에 가서 공부하려면 몇 년이 걸릴지 몇 십 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원효대사의 나이도 어느 덧 45세였다.
공부만 할 수 있다면 이까짓 무덤에서 자는 것이 문제겠는가.
더구나 수행자는 편안한 잠자리를 구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컴컴한 어둠 속에서 타들어가는 갈증을 느낀 원효대사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초하루 그믐밤에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눈은 있으나 마나였다.
원효대사는 손으로 더듬거리며 물을 찾았다.
뭔가 손에 잡혔다.
물이 담긴 바가지였다.
이곳을 지나던 사람이 버리고 간 바가지에 빗물이 고인 듯했다.
원효대사는 바가지를 들어 시원하게 물을 마셨다.
물맛이 아주 좋았다.
생명수를 마신 듯 갈증이 해소된 원효대사는 편안하게 다시 잠이 들었다.
다음 날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원효대사 눈에 어젯밤에 물을 마셨던 바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해골바가지였다.
설마 저기에 담긴 물을 마셨단 말인가.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다른 그릇은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자신이 생명수라고 느끼며 마신 물이 시체 썩은 물이었다.
갑자기 속이 뒤틀린 원효대사는 심한 구토를 느꼈다.
웩웩거리며 토하는데 그 순간 벼락같은 깨달음이 내려쳤다.
똑같은 물인데 어젯밤에는 맛있던 물이 오늘 아침에는 역겨웠다.
이것은 물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마음이 더럽다고 느낀 것이 아닌가.
원효대사는 마음에 대해 크게 깨달았다.
그리고 탄식하듯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듣건대, 부처님께서는 삼계유심(三界唯心)이요,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 하셨다. 그러니 아름다움과 나쁜 것이 나에게 있고, 진실로 물에 있지 않음을 알겠구나."
이 진리를 깨치자 더 이상 당나라로 갈 필요가 없었다.
원효대사는 의상대사를 뒤로 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문무왕 원년(661)의 일이었다.
초등학생조차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이 이야기는 중국의 영명연수(永明延壽)선사의 [종경록(宗鏡錄)]에 적혀있다.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워낙 드라마틱해서인지 중국에서도 인구에 회자되었다.
여러 책에 전한다.
[송고승전(宋高僧傳)] [의상전]을 비롯하여 송나라의 각범혜홍(覺範慧洪, 1071-1128)이 쓴 [임간록(林間錄)], 원나라의 보서(普瑞)가 쓴 [화엄현담회현기(華嚴懸談會玄記)], 명나라의 구여직반담(瞿汝稷盤談)이 쓴 [지월록(指月錄)] 등에 중요한 행적처럼 기록되어 있다.
다만 [송고승전]에는 해골물 대신 귀신이 출현했다고 표현한 것이 다르다.
원효대사는 성이 설씨(薛氏)로 동해 상주(湘州) 사람이다.
어릴 때 이름은 서당(誓幢)으로 15세쯤 출가했다.
그는 낭지(郞智), 보덕(普德) 스님에게 배웠다.
항상 구리로 만든 바릿대를 치면서 "대안(大安), 대안(大安)" 하고 소리쳤던 대안대사도 원효대사의 스승이었다.
노비 출신으로 삼태기를 지고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춘 혜공(惠空)대사도, 장애인 출신이었던 사복(蛇卜)도 나이를 떠나 모두 원효대사의 스승이었다.
자신보다 8세 어린 의상대사와는 평생 불법을 함께 한 도반으로 지냈다.
원효대사가 젊은 시절에 어떻게 수행했는가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원효대사가 쓴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을 보면 그가 참된 수행자가 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천당에 가는 것을 막아놓음이 없는데도 이곳에 가는 이가 적은 것은 삼독의 번뇌를 자기 집의 재물로 삼기 때문이고, 지옥에 오라고 유혹하지도 않는데 많은 사람이 가는 것은 네 독사와 다섯 욕망을 망령되이 마음을 보배로 삼기 때문이다.
좋은 음식으로 길러도 이 몸은 무너질 것이고, 부드러운 옷으로 보호해도 목숨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
백 년이 잠깐인데 어찌 배우지 아니하며, 일생이 얼마라고 닦지 않고 방종하랴.
사대는 흩어지니, 내일 살기 기약 없고, 오늘은 이미 저녁, 아침부터 서둘러야 하리라.'
[발심수행장]은 출가수행자를 위한 필독서이다.
그런데 쉬운 문장과 교훈적인 내용으로 기술되어 있어 재가수행자에게도 수행에 큰 도움이 된다.
당나라 유학길에서 되돌아온 원효대사는 요석(瑤石)공주를 만나 설총(薛聰)을 낳은 후 환속한다.
승복을 벗은 후부터는 자신을 소성거사(小性居士) 또는 복성거사(卜性居士)라 부르며 대중교화를 펼친다.
소성(小性)은 '마음이 작다'는 뜻이고, 복성(卜性)은 '아래 하(下)자도 못된다'는 뜻이니 지극히 낮은 사람을 의미한다.
파계한 스님인 만큼 걸림이 없었다.
그는 술집이든 기생집이든 여염집이든 산수간이든 마음 내키는 대로 다녔다.
광대, 백정, 술장사 등 누구라도 만났다.
그들 모두 불성에 있어서는 귀족과 한 치의 차이도 없는 똑같은 부처였다.
원효대사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교화했다.
그는 수없이 많은 시골마을을 노래하고 춤추고 돌아다니면서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사람들까지도 부처님의 이름을 알게 하고 모두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했다.
우연히 광대들이 춤출 때 쓰는 큰 박을 얻어 무애(無碍)라 이름 짓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무애는 <화엄경{에서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는 구절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무애는 곧 '한마음(一心)'이다.
#원효대사 #법보신문
첫댓글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금강경독송을 게을리하지 않겠습니다. 서가모니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