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절필동(萬折必東)과 만동묘(萬東廟) ♣
이번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회식에 등장한 '한푸'(Hanfu)' 논란에 이어
쇼트트랙 편파 판정까지 더해지면서 국내 반중정서가 들끓고 있어요
개회식에서는 중국 소수 민족 대표가 한복을 입고 등장해
중국의 '한푸'라고 소개하면서 '한복공정' 논란이 불거졌는데
이후 쇼트트랙 오심 문제까지 일어나면서 반중정서가 폭발한 것이지요
일각에선 온라인을 중심으로 'NONO차이나'(중국제품 불매운동)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어요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지도층에는 반중(反中) 보다는 친중(親中)사상이 더 많이 배여 있지요
경기도 가평에 가면 '조종암'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곳에
선조(宣祖)의 친필휘호(親筆揮毫) '만절필동 재조번방(萬折必東 再造藩邦)'이 새겨져 있어요
이는 임진왜란때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에 감사하는 취지의 문장으로
'만절필동(萬折必東)'은 "황허강이 수없이 꺾여 흘러가도 결국은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이고
'재조번방(再造藩邦)'은 말 그대로 풀이하면 "번방의 나라를 다시 세워주셨다"는 뜻이지요
또 충북 괴산에는 명나라 신종과 의종의 신위를 모신 "만동묘(萬東廟)"가 있는데
우암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세운 사당으로 "만동묘(萬東廟)"라는 이름은
당연히"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따왔다고 하지요
원래 송시열은 사대주의가 극에 달한 친명(親明) 중화주의자 였어요
일상생활에서도 명나라 의복을 입고
명나라 예법에 따라 행동했을 정도로 극친명 주의자 였다고 하지요
그는 명나라는 임진왜란때 우리를 구해준 은인이자 중원(中原)의 문화 정통성을 이어받은
어버이 같은 나라라고 했어요
송시열(宋時烈, 1607~ 1689)이 죽은후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의 신원을 회복하고 제향하기 위해
노론계 관료와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화양서원(華陽書院)이라는 서원을 건립했지요
충북 괴산에 있는 화양서원(華陽書院)은 송시열이 병자호란 이후 이곳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던 곳이기도 하지만
특히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비례부동(非禮不動)’이란 필적을 구해다
화양계곡의 암벽에 새겨놓고 친히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이라 칭하며
존명대의(尊明大義)의 근본 도장으로 삼았던 곳이지요
그러니까 "해와 달을 숭상하듯 하늘과 땅처럼 큰 명나라를 숭상한다"는 뜻이지요
원래 서원(書院)이란 유생들의 사학기관으로서 명현(明賢)들을 섬기며 제사하고
청소년을 모아 유학을 장려함을 목적으로 세워졌으나
조선중기 이후 유생들이 곳곳에 서원을 짓고 이를 근거로 정쟁을 일삼으며
백성들을 못살게 괴롭히는 폐단이 크게 나타났어요
그 중에서도 화양서원(華陽書院)은 송시열의 명성과 권위를 내세우며
어느집 어느가문을 가리지 않고 성금을 종용 착취하고 유린하여
조선시대때 수많은 서원 중에서도 어진 백성들을 가장 많이 괴롭히는 대표적인 서원이었지요
그러므로 그가 제자들을 모아 가르친 속리산 화양계곡은
모화(慕華)사상의 요람이자 발상지가 되었으며 1689년 송시열이 죽자
제자들은 이곳에 그를 기리는 서원을 세우고 '화양서원(華陽書院)'이라 이름붙였지요
화양(華陽)은 "중국 문화가 햇빛처럼 빛난다"는 뜻이지요
송시열의 제자들은 한술더떠 이곳에 명나라 황제 신종(神宗)을 제사 지내기 위한 사당을 짓고
이를 '만동묘(萬東廟)'라고 이름 붙였어요
만동(萬東)이란 말은
'만절필동(萬折必東)'의 준말로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의 하나인 순자(荀子)가 쓴 말인데
"중원의 젖줄인 황하(黃河)는 수만번 물길을 꺾어 흐르지만 결국은 동쪽을 향한다"는 뜻으로
중국에선 충신의 절개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조선의 중화주의자들에겐 "중국 황제를 향한 변함없는 충절"을 뜻하는 의미로 쓰였지요
또한 만동묘를 건설함에 있어서도 만인이 우러르게 높은곳에
명나라가 있는 북향으로 지어놓고 엉금엉금 기어서만 올라 갈수 있도록 함으로서
모두가 강제로 자세를 낮추게하는 숭명의식(崇明儀式)이 도를 넘었던 곳이지요
이처럼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는 사자성어에는
역사적으로 뿌리깊은 사대주의 사상이 짙게 깔려 있는 용어 이지요
거기다가 중국 사신들이 오가는 서대문 근처에 영은문(迎恩門)이라는 커다란 문(門)을
세워놓고 근처에는 사신들을 영접하는 숙소로 모화관(慕華館)을 지었지요
'영은(迎恩)'은 '은혜로운 대국의 사신을 맞이한다'는 뜻이고
'모화(慕華)'는 '중국을 흠모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고종황제는 대한제국을 세우면서
서대문에 있던 영은문을 헐고 여기에 독립문을 세우며
대한제국은 자주독립국가임을 만천하에 선포하였지요
그런데 몇년전 우리나라 국회의장이 국회대표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하여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에게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는 친필 휘호를 선물했어요
"우여곡절을 겪어도 결국 북핵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의미로 선물했다고 하지요
그러나 이 사자성어가 '외교관계에서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평이 나왔지요
황허가 결국은 동쪽으로 흘러가는 모습은
"중국의 천자를 향한 제후들의 충성"이란 뜻이 내포되어 있고
우리 역사에서도 사대주의 사상의 표본(標本)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었지요
실제로 조선시대 때에는 이 사자성어가 명나라에 감사하는 표현으로 많이 쓰였어요
그런데 문희상 국회의장의 만절필동(萬折必東) 휘호 선물도 문제지만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있던 노영민(盧英敏)도 중국대사로 부임시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면서
방명록에 "만절필동 공창미래(萬折必東 共創未來)"라고 쓴 것으로 알려졌지요
노 대사는 "한·중이 곡절을 겪었지만 결국 좋은 관계를 회복할 것이란 뜻"으로 이글을 썼다지만
실제로 이 말은 사필귀정(事必歸正)과 비슷한 뜻으로 쓰이기도 하지요
그러므로 이 말은 우리 역사에서 쓰인 배경과 맥락을 살펴보면 쉽게 사용해서는 안될 말이지요
일각에선 대통령의 전권을 부여받은 대사가
"의미를 알고 썼다면 국가 독립을 훼손한 것이고
모르고 썼다면 나라 망신"이라는 말이 나오는것은 당연지사가 아닐런지요
그런데다 문제인 대통령은 방중기간중 베이징대 연설에서 중국을 '높은 산'에 비유하면서
"높은 산봉우리가 주변의 산봉우리와 어울리면서 더 높아진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한국은 "작은 나라지만 책임 있는 중견 국가로서 그 꿈을 중국과 함께할 것"이라고 했지요
이는 나라의 크고작음을 떠나 일국의 대통령으로서 자존심도 없는 망발(妄發)에 가까운 연설이었어요
거기다가 3부요인의 한사람인 문희상 국회의장은 역사적으로 문제가 있는
만절필동(萬折必東)을 또 들고 나왔지요
그는 몇년전 방한한 미국 전직 의원단,·언론사 대표단을 국회에서 접견했을 때도
한반도 평화를 얘기하는 과정에서 '만절필동(萬折必東)'을 언급했어요
이러다 보니 이 정권 사람들은 모두 모화사상(慕華思想)에 물들어 있는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 정도 이지요
더욱이 외교관계에서 상대국과 주변국의 오해를 살수 있는 일일뿐만 아니라
이 때문에 불편해하는 국민도 있는 사자성어를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묻지 않을수 없어요
행여 수많은 사자성어 중 만절필동(萬折必東)만 알고 다른 사자성어는 모르고 있는것인지
아니면 이 정권의 핵심 인사들은 사대주의 사상이 뼈속깊이 배어 있어
존중대의(尊中大義)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묻지 않을수 없어요
대저 한 나라의 존망(存亡)은 그 나라의 지도자들의 마음자세에 달려 있다 했는데
어찌하여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3몰(三沒) 즉 몰염치(沒廉恥), 몰이성(沒理性), 몰지각(沒知覺)하고 있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런지요?
다행히 이번 베이징 올림픽을 계기로 반중사상이 고조됨으로 해서
뿌리깊은 모화사상과 사대주의 사상을 이번 기회에 청산하고
굽신외교에서 당당한 외교로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 언제나 변함없는 녹림처사(일송) *-
▲ 문희상 국회의장이 미국 하원의장에게
"萬折必東(만절필동)"이라는 친필 휘호를 선물하는 모습...
▲ 노영민 비서실장이 주중대사 신임장 제정시
방명록에 쓴 "만절필동 공창미래(萬折必東 共創未來)" ...
▲ 문재인 대통령은 방중시 베이징대 연설중
중국은 높은산에 비유하고 우리나라는 작은산에 비유했지요...
▲ 암벽에 새겨져 있는 만절필동...
▲ 친명(親明)모화(慕華)사상의 극치를 이룬 만동묘(萬東廟)
만동묘는 중국을 바라보는 북향(北向)으로 지었어요...
▲ 화양동 만동묘는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그의 제자들이 지은 것인데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신종과 임진왜란 때 군대를 보내 도와준 의종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사당이지요 ...
▲ 기어서만 오를수 있는 돌계단...
▲ 송시열이 화양계곡의 암벽에 친히 새긴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 각자.
그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필적 ‘비례부동(非禮不動)’ 넉 자와 함께 새기고
화양동을 존명대의의 근본 도장으로 삼았지요...
▲ 사대주의자 송시열(宋時烈)을 기리는 화양서원(華陽書院) ...
▲ 송시열이 독서하며 은거했던 화양동 암서재. 화양계곡엔 송시열과 관련된 유적으로 가득하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