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ghshffnfffn1/222004960875)
충청북도 북서부에 있는 음성군쪽에 음성읍 신천리 남천동입에서 갈라지고 있는 삼거리를 지나 금왕읍 무극리로 행하는 차도를 따라 약 1km 지점의 주막거리 근처로 가면 완만한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흔행이 고개'라고 합니다.
이 고개는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직접 넘지 말라고 명할 만큼 출입이 금기시 된 곳이었다고 하는데, 그정도로 이상하고 무서운 소문이 많이 나돌던 곳입니다.
흔행이 고개는 조선왕조의 14대 왕이었던 선조때 그 유래가 시작됩니다.
최초에는 특별한 명칭 없이 단순히 전염병으로 사망한 사람의 시체를 버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다 붙은 명칭이 처음에는 흉행이 고개라는 이름이였는데 이 이름이 시간이지나 흔행이 고개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당시 전염병으로 사망한 사람의 시체를 버리는 행위를 "더금뫼"라고 일렀는데, 세월이 흘러 더금뫼라는 풍습은 서서히 사라졌지만 흉흉한 이미지가 남은 탓인지 조선 18대왕 현종때는 음성 현청에서 죄수를 효수하는데 이 곳 고개에서 참수를 했고 죄를 지어 장도 지내지 못하는 죄인들의 시체를 가매장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다 조선왕조 제 20대왕 경종때에 이르러서는 한 무리의 산적떼들이 이 흥행이 고개에 자리를 잡아 이 고개를 넘는 사람들의 돈을 뺏고 살해하는 등의 행위를 일삼았다는데요.
백성들의 피해가 계속되자 관아에서 군졸들을 보내 토벌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수차례 실패했고, 지속적인 토벌 끝에 군졸들은 한 토굴에 숨어 있던 산적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산적들은 이미 미치거나 죽은 상태였다더군요.
산적떼들이 잡힌 이후로도 흉흉한 소문은 사그라들지 않았는데요. 밤에 고개를 넘는 사람들 앞에 이제는 산적이 아닌 머리를 산발한 귀신이 출몰하기 시작했습니다.
흔행이 고개서 귀신을 보고 혼절해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점점 조선의 다른 지방으로 알려졌고 결국 당시 조정까지 이 이야기가 들어가게 됩니다.
조선의 22대 왕 정조시절에도 이 고개를 넘다가 뭔가에 홀려서 실성하거나 다치고 죽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정조가 직접 "부정한 고개이니 넘는것을 금하라."며 그곳으로 출입을 금하는 왕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 흔행이 고개에는 대충 묻힌채 썩어가는 시체의 흉한 모습과 참을 수 없는 냄새로 코를 둘 수가 없었으며, 비가 오는 날에는 사람들의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리기도 해서 그 주변 마을에 사는 백성들은 절대 가까이 가지않으려 했다고 합니다.
이곳은 이후에도 출입이 금기시 되었고 일제강점기 시절 이곳에 별장을 지은 한 일본 상인 가족이 있었는데, 별방에서 며칠 머물던 도중 한꺼번에 떼 죽음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독립이 되자 이 고개에 치성을 지내고 큰 성황당을 세워 이 고개에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을 위로 했다고 합니다.
현재는 전설이 되었지만 그 근처의 사람들은 지금도 이 고개를 넘는걸 기피한다고 하네요.
* 자료출처 : 음성문화원
일본놈 남의 땅에 맘대로 별장 짓더니 쌤통이노
첫댓글 더금뫼... 산이 한자로 뫼산이니까 더금산...? 더금은 무슨뜻일까...... ㅠㅠ 근데 좀 슬프다ㅠㅠ 자꾸 저쪽으로 사람들이 다녀버릇해야 실제 안좋은기운이 있더라도 어느정도 몰아낼수있을텐데... 근데 사는사람들 입장도 또 다르겠지ㅠㅠ
함 가보고 싶다
우와 오래전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왜 저렇게 죽어나갈까
눈물나잉...다들 승천하소ㅠ
재밌다 다들 성불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