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다방 이야기
/
나이 70대 지난 사람 치고
옛날 다방에 잊지 못할 추억이 한 자리 없는 사람 있을까요?
당시의 다방에는 낭만도 있었고, 남자의 자존심도 있었고, 사랑도 있었고,
눈물 쏟아내는 이별의 장이기도 했었다.
가끔 열리는 국가대표 축구경기의 단체 관람 장이기도 했으니,
그 당시 다방은 ‘한국적 명물’로 어른들의 사랑방, 대학생의 만남 방,
직장인의 휴식 공간, 동네 한량들의 아지트였으며, 데이트와 맞선 공간,
가짜 시계 등이 거래되는 상거래 공간,
음악 감상 공간 등 '거리의 휴게실’이자 만남의 장소 역할을 톡톡히 했다.
/
1945년 해방 무렵 서울에 60개 정도의 다방이 있었고
1950년대 말엔 1,200개로 늘었다고 하는데
1990년대 후반 들어 커피전문점 ‘카페’로 대변되는
원두 커피전문점이 부흥하기 이전인 30년간 다방은
한국 문화를 이끌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
본격적 음악 감상실이 생겨나기 전까지 항구도시 부산의 광복동과 남포동에도,
대구 반월당에서 동성로를 거쳐 대구역으로 이어지는 큰 길, 골목길에도
우후죽순처럼 다방이 마구 생겨나고 있었다.
작은 부스에 DJ가 들어 앉아 김추자 노래도 송창식의 고래사냥, 팝송도 틀어주면서
때로는 “양복점 이 사장님 카운터에 전화 왔습니다.”는 소식도 들려주었으니.
음악실의 역할까지 하면서 “읍내다방” "향촌다방" "심지다방'' "수다방"
"왕비와 왕다방" "황금다방" “중앙다방”에서 서서히 이름이 바뀌어
“송죽다방” “준(JUN)다방” “뉴욕다방”까지, 한 시대를 풍미했다.
/
젊은 청춘을 위한 시내 중심가를 벗어난 다방은
카운터에 중년 여성인 ‘마담’이 앉아있고
‘레지’(영어로 lady)라고 불리는 젊고 예쁜 아가씨들이 커피를 날라주는 동안에
구슬픈 뽕짝가락이 손님들의 가슴을 저윽히 적셔주는 그런 형태였다.
그 당시 사람치고 시골 읍내는 말할 것도 없고
시내 중앙통에 있는 다방의 마담이나 레지와의 사연 하나 없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냥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내려고
주막에서 세련된 다방으로 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
다방에 들어서면 낮 익은 마담과 레지가 경쟁하듯 환하게 맞아줬고
손님이 자리에 앉으면 어김없이 옆자리에 살포시 앉으면서 속보이는 친절을 떨었다.
손님들은 오랜만에 만난 친정 오빠보다 더 정겹게 팔짱을 끼며
애교까지 부리는 그 분위기를 우쭐하며 즐겼으니.
"커피 한 잔 가져와!"하는 손님의 주문이 떨어지자마자
"저도 한 잔하면 안 될까요?"가 곧바로 이어졌고
그 상황에서 "NO!"는 존재하지 않았다.
/
70년대 후반 들어 야쿠르트로 바뀌기도 했지만.
요즘이야 맹숭커피 한잔에도 돼지 국밥 한 그릇 값을 지불하지만
그 당시 커피 한 잔은 실없는 농담에 가벼운 신체접촉 권한(?)까지 주었으니
참으로 옹골진 값어치였던 셈이다. 분위기가 넘어왔다 싶으면
마담이나 레지의 "우리 쌍화차 한 잔 더하면 안 될까요?"
라는 비싼 차 주문이 발사되고 여기에도 "NO!"는 거의 없었다.
/
그 시절 그렇게 분위기가 익어가는 것이 뭇 사내들의 멋이었고 낭만이기도 했지만
마담이나 레지에게는 매출을 올려 주인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인사고과였으니.
그런 손님과 레지의 의기투합(?)은 나중에 티켓 다방으로 발전하기도 했지만
그 당시 인기 레지는 거의 연예인 대접을 받았던 것 같다.
( 모셔온 옛날 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