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동전 한 닢과 어머니가 남긴 수표 두 장
1970년 학생들의 아침 등교 모습
함경도 회령에서 결혼하고 서울 변두리로 온 어머니의 일생은 독한 삶 이었다. 적은 수익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 같았다. 평생 옷 한 벌 제대로 해 입는 걸 보지 못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시절 학교로 오는 엄마의 옷은 장 속에 오래 묵었던 옛날 옷의 접힌 주름이 그대로 보였다. 어머니는 옷이 없어서 학부형 회의에 오기가 꺼려진다고 했다. 어머니는 먹는 것에도 인색했다. 생선이나 과일, 달걀이 어머니의 입 속에 들어가는 걸 보지 못했다. 고기도 먹지 않았다. 찬밥과 오래된 김 치 조각이 어머니의 식단이었다. 수은주가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가는 일월의 칼바람 치는 날이다. 연 탄을 때는 작은 무쇠 난로의 공기구멍은 항상 닫혀 있었다. 내가 공기 구멍을 조금 열어놓으면 어머니는 다시 와서 그걸 닫아버렸다. 연탄 한 장으로 하루를 버텨야 한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한겨울에도 불기가 없는 방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방 안의 구석에 놓아두었던 그릇의 물이 얼음 덩어리로 변해 있기도 했다.
1960년 말 서울시내 주변 전차
초등학교 사학년 시절 나는 어머니와 처음으로 부딪혔다. 거리가 얼어 붙은 겨울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와 나는 찬바람이 이는 도로가에서 전 차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이 천천히 뛰는 정도로 느릿느릿 가 는 전차는 삼십 분이 넘도록 오지 않았다. 얇은 신발 속의 발가락이 냉 기로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나는 어머니에게 버스를 타고 가자고 졸랐다. 어머니는 나를 보고 정신 빠진 놈이라고 욕을 했다. 당시 버스비는 이원오십전이고 전차는 이원었다. 아침마다 학교를 갈 때 어머니는 오원짜리 은빛 동전 하나를 내게 주었다. 그 돈으로 전차 표를 사서 학교를 갔다 오라는 것이었다. 추우니까 자주 정류장으로 오는 버스를 타자는 나를 보고 어머니는 정 신이 썩은 놈이라고 욕을 했다. 그 추운 자리에서 벌로 한 시간을 더 서 있으라고 했다. 전차가 와도 어머니는 타지 않았다. 칼바람이 부는 거리 에서 나는 한 시간 동안 서 있는 벌을 받았다. 어렸던 나는 도무지 그 벌이 납득 되지 않았다. 아버지의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아이도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버스를 타고 다녔다. 나는 그 버스조차 탈 자격이 없다는 사실에 반항기가 일었다. 어머니한테 벌을 받은 다음 날부터 나는 버스도 전차도 타지 않았다. 신설동에서 광화문까지 초등학교 사학년 아이의 걸음으로 걸어갔다가 또 걸어왔다. 그렇게 하면 은빛 나는 동전 하나가 생겼다. 나는 마당 한 구석에 조그만 깡통을 묻어놓고 매일 학교에서 돌아오면 그 깡통에 은 빛 동전 하나씩을 넣었다. 먼 길을 걸어갔다 오면 동전 한 닢을 버는 셈 이었다. 그렇게 일 년쯤 지났다. 어느 날 어머니에게 동전이 가득 든 깡통이 발각됐다. 어머니는 그걸 내가 도둑질한 것으로 확신하고 얼굴이 분노로 시퍼렇게 되어 있었다. 나는 사실대로 어머니한테 말하고 돈이 좋으면 그 돈 다 어머니가 가지 라고 했다. 어머니는 외아들인 너를 교육시키려고 했던 건데 라고 혼잣 말 같이 말하면서 침묵했다. 내가 변호사를 개업하고 나서부터는 매달 얼마씩의 용돈을 어머니에게 드리기 시작했다. 그 돈으로 친구나 이웃에게 밥도 사고 편안히 지내셨 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평생 철저했던 절약하는 습관은 버리기 힘든 것 같았다. 어머니 삶의 형태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달라진 점이 엿보였다. 동네에 가난한 사람 이 있으면 쌀집에 부탁해서 쌀가마를 보내기도 하는 걸 알았다. 성당에서 어떤 행사가 있으면 손이 크게 헌금을 한다는 소리도 들려왔 다. 2016년 새해가 밝아왔을 때였다. 어머니는 나의 세배를 받으면서 말했다. “내가 이제 아흔 살이다. 만주에서 전쟁을 겪었고 대동아 전쟁 을 겪었고 6·25 때도 남아서 오래도 살았다. 산다는 게 이제 지겹다.” 어머니는 이제 스무 살 때 북에서 헤어진 돌아가신 부모 곁으로 가고 싶으신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두 달 후였다. 어머니가 은행에서 찾은 수표 두 장을 내게 주면서 말 했다. “네가 나한테 준 용돈을 거의 쓰지 않고 모아뒀다. 오억 원을 채 우려고 했는데 모자란다. 아무래도 그렇게 못할 것 같다.” 어머니는 내게 받은 용돈을 쓰지 않고 돌려주셨다. 어린 시절 깡통 속 의 동전들을 어머니께 반납했던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그 다음 달 어머니는 저 세상으로 가셨다. 요즈음 내가 깨달은 게 있다. 적은 수익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먼 길을 간다. 그러면서도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한 발자국도 땅에서 떼지 않으 려고 한다. 기억 저쪽에서 초등학생인 내가 은빛 동전 한 닢을 위해 먼지가 날리는 우중충한 거리를 걷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노인이 된 이제는 진리를 위해 성경의 한 페이지를 넘긴다.
1964년 촬영한 서울 교동국민학교 학생들. 마스크를 쓴 채 올망졸망 앉아 독감 예방주사 접종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모습 (당시 화생방 훈련 모습이라는 반론도 있다.)
글 / 엄상익 변호사
|
첫댓글 좋은글 감사 합니다
반갑습니다
동트는새벽 님 !
고은 걸음으로
소중한 댓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일교차 큰 환절기,
감기 유의하시고
행복한 주말되시길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