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어머니의 유언(遺言)/이일배
어떤 말이 그리 눈물 나게 했을까?
단 열네줄로 쓴 어느 어머니의
유서를 읽으면서 눈자위를 맴도는
눈물을 삭히기가 어렵다.
자려고 누워서도 유서의 말이 떠올라
눈시울이 젖는다.
그다지 가져보지 못한 눈물인 것 같다.
그 유서의 전문은 이러했다.
자네들이
내 자식이었음이 고마웠네.
자네들이 나를 돌보아줌이 고마웠네.
자네들이 세상에 태어나
나를 어미라 불러주고
젖 물려 배부르면 나를 바라본 눈길에
참 행복했다네.
지아비 잃어 세상 무너져
험한 세상 속을 버틸 수 있게
해줌도 자네들이었네.
병들어 하나님 부르실 때
곱게 갈수 있게 곁에 있어 줘서
참말로 고맙네.
자네들이 있어서 잘 살았네.
자네들이 있어서 열심히 살았네.
딸 아이야 -!
맏며느리, 맏딸노릇 버거웠지-?
큰 애야 -!
맏이 노릇 하느라 힘들었지-?
둘째야 -!
일찍 어미 곁을떠나
홀로 서느라 힘들었지-?
막내야 -!
어미젖이 시원치 않음에도
공부 하느라 힘들었지-?
고맙다. 사랑한다.
그리고 다음에 만나자.
(2017년 12월 엄마가)”
사십대 초반에 공무원이던
남편을 일찍이 떠나 보내고,
35년간을 홀로
오직 일녀 삼남 자식들만 바라며
살아온 어머니의 유서다.
78세에 난소암을 얻어 투병 하다가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이 유언이
공개된 장례식장은 흥건한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한다.
(조선일보 2017.12.27.)
무엇이 그토록 눈물겹게 했을까?
우선 자식들을 두고 "자네"라고 부르는
2인칭 대명사가 눈물겹다.
친구나 아랫사람을 대우하여
이르는 "자네"라는 말속에는
자식을 끔찍하게 위하고
사랑하는 어머니의 곡진한
마음이 녹아 있는 것 같다.
자식을 사랑 하는 마음이야
어머니로서 당연한 것 이겠지만,
요즈음 세상은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떠올리기조차 꺼려지는 일이지만,
부모의 학대로 어린 자식이
무도한 지경에까지 이르는 일들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고 있는가?
자식을 귀하게 대우하는
어머니 임에야 자식인들 어찌
바른 성정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을까?
유언 속을 들여다보면
자식들의 어머니를 위한 지성도
예사롭지 않았을 것 같다.
이 어머니는 자식들의 치성이
고맙기도 했겠지만,
그 ‘고마움’은 그것에만 있지 않았다.
어미라고 불러주는 것이 고맙고,
젖 배불리 먹고 어미를 바라보는
그 눈길이 행복을 주어 고맙고,
지아비 잃고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버팀목이 되어주어 고맙고,
세상을 떠날 때 곱게 갈 수 있게 해주어
고맙다고 했다.
아무것도 바랄 것 없이
거저 내 자식인 것만으로도,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고 있는 무위의 사랑이
눈물샘을 울컥 밀어 올린다.
노자(老子)가 말한
‘낳아주되 제 것으로 갖지 않고,
生而不有(생이불유),
위해주되 대가를 바라지 않고,
爲而不恃(위이부시),
자라게 해주되 간섭하지 않는
長而不宰(장이부재),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노자는 이를 일러 ‘현덕(玄德)’이라 했다.
‘인간이 아무리 알려 해도 알길없는
묘한 도덕’이라는 말이다.
이 어머니는, 당신이 있어
자식이 잘 산 것이 아니라 자식이 있어
당신이 잘살았다 하고,
당신이 자식을
열심히 살게 한 것이 아니라
자식이 있어
당신이 열심히 살았다고 했다.
당신 삶의 모든 공을
자식들에게 돌리고 있다.
이런 마음을 두고 노자는
‘공을 이루고도 연연하지 않는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라 하여
이는 곧 ‘자연’의 일이라 했다.
자연이 만물을 대하는
이치와 같다는 말이다.
이 어머니의 사랑이 이와 같을진대
이보다 더 순수하고 숭고한
사랑이 있을까?
그 순수와 숭고가
다시 누선(淚腺)을 솟구치게 한다.
마지막으로 이 어머니는
일녀 삼남을 일일이 다 부르면서
제 노릇 하며 사느라고
얼마나 버겁고 힘들었느냐고
오히려 위로해 주며,
‘고맙다. 사랑한다.
그리고 다음에 만나자.’면서
자식들을 토닥인다.
이에 이르러 방울 굵은 눈물을
지우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하물며 그 자식들은 어떠하였을까?
이 유언(遺言)을 들으면서
자식들이 흐느낀 울음이며
세상 사람들이 지은
눈물의 정체는 무엇일까?
물론 말할 수 없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깊은 감동의 눈물일 것이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애정이며
자식의 부모에 대한 경애심이
점점 흐려지고 거칠어져 가는
세태가 돌아 보일수록,
이 유언(遺言)에 어린 감동이
더할 나위 없는 큰 울림으로
새겨져 온다.
어찌 감동으로만 끝날 수 있는 일인가.
여기서 누구든 자신의 삶이
돌아 보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생의 종언(終焉)을
앞두게 되었을 때,
무슨 말을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을까?
아무리 돌이켜 보아도
나는 이 어머니만 한 자정으로
살아오지 못한 것 같다.
자식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를 생각하면
민연(憫然) 해 질 때가 있다.
하물며 어찌 이런 말을
남길 수가 있을까.
내가 못 한 것을
너희들은 잘해 달라는
구차한 말조차도 남기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일을 생각하다 보면
이 어머니의 유서가 다시 눈물겹다.
내 살아온 자취가 더욱 눈물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