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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업적/ 모셔온글
1. 1~3대 이승만 대통령 (1948~1960)
1875년(고종 12년) 조선에서 태어나 배재학당에서 수학하며 신학문을 연마하였고, 독립협회[20], 만민공동회, YMCA에서 활동하였다. 대한제국 하에서 관직을 맡기도 했으나, 고종이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체포 구금하고 만민공동회를 무력 진압하는 과정에서 박영효의 황제퇴위 음모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5년 7개월 간 한성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러일전쟁 중에 사면되어 을사조약의 국제법적 부당함을 주장하는 민영환의 밀사로 미국에 파견돼 활동하였고, 한국의 주권회복을 위한 청원외교를 전개하였다.
이후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고 이후 국무위원,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등을 지내며 주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광복 이후에는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를 반대했고,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을 주도했다.
초대 대한민국 국회의장을 거쳐서 1948년 국회 간선제로 치러진 제1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국독립당 김구 후보를 따돌리고 당선되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며, 이후 직선제로 바뀐 1952년 2대 대선과 1956년 3대 대선에서도 2연속으로 도전해 왔던 무소속 조봉암 후보를 이기면서 총 12년 동안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냈다.
대통령 재임 중 대한민국 정부 수립,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 농지개혁, 초등학교 의무교육,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대대적인 학교 건립, 평화선 선포 등과 같은 족적을 남겼으며, 6.25 전쟁과 같은 국가적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발췌 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독재 권력을 추구하여 국민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1960년 3.15 부정선거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4.19 혁명이 일어나자,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하야하였다. 이후 미국 하와이에서 말년을 보냈고 1965년 향년 90세로 세상을 떠나 고국에 안장되었다.
2. 4대 윤보선 대통령(1960~1962)
3·1운동 직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최연소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신규식 등 선배 독립운동가들의 권유로 영국 유학을 떠나 에든버러 대학교 대학원에서 고고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18] 1932년 귀국한 후 조선총독부의 요시찰 인물이 되어 칩거하다가, 광복 후 한민당 창당에 참여하고 신문사를 운영하며 언론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지명으로 서울특별시장 및 상공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행정을 맡기도 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계기로 이승만 대통령과 결별하고 야당의 지도자로 떠올랐으며, 4.19 혁명 후 제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헌정 사상 유일한 의원 내각제 정부의 대통령을 역임하였다.[19] 5.16 군사정변으로 장면 내각이 사실상 무력화된 후에도 1년간 대통령직을 유지하다가 1962년 3월 대통령직에서 하야했다.[20]
이후 1963년 민정이양을 위한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제1야당 후보로 출마해 박정희와 정면대결하여 15만여 표 차이로 석패하였고, 전직 대통령이었음에도 같은 해 제6대 국회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되어 다시 야당을 이끌었다.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인 박정희를 상대로 다시 대결하였으나 2위에 그친 뒤, 유신정권하에서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고, 김대중, 함석헌 등 재야지도자들과 함께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YWCA 위장결혼식 사건 등 민주화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하였다.
1980년 정계에서 은퇴하였고, 1990년 7월 18일 사망하였다.
<출처:나무위키>
3. 5~9대 박정희 대통령(1963~1979)
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구미에서 아버지 박성빈과 어머니 백남의 사이의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1940년 교사직을 사직하고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 입교하였고, 이후 1942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해 1944년 졸업한 후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때까지 만주국 육군 장교로 근무하였다.
8.15 광복 이후 한국광복군에 편입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다 1946년 귀국하여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단기과정을 마치고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임관하였다. 대구 10.1 사건에서 사회주의 성향의 독립운동가였던 셋째 형 박상희가 경찰에게 사살당한 일에 영향을 받아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하였으나, 1948년 김창룡이 주도한 군내 좌익분자를 색출하는 숙군 작업에서 여수·순천 10·19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되어 1심 재판에서 불명예 전역 및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후 백선엽 등에 의해 구제되어 1950년 6.25 전쟁 발발을 계기로 재임관하였다.
1961년 김종필 등과 함께 5.16 군사정변을 주도하여 제2공화국을 전복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수립하였다. 1962년에 5차 개헌[23]을 성사시켰으며 1963년 대장으로 전역한 후 제5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민정당 윤보선 후보를 제치고 당선되어 제3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첫 4년 임기를 마친 뒤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신민당 윤보선 후보를 다시 꺾고 재선에 성공하였다.
두 번째 임기 중이던 1969년에 3선 개헌을 단행하고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신민당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고, 세 번째 임기 중이던 1972년에는 10월 유신을 선포하여 제4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유신으로 대통령 선거 방식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간접선거로 바꾼 뒤 그해 실시된 제8대 대통령 선거에 본인만 출마해 당선되었다. 바뀐 6년의 임기를 마치고 1978년 제9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마찬가지로 당선되며 독재자의 길을 걸었으나, 1979년 10월 26일 서울 궁정동 만찬 석상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권총에 피격당해 향년 61세로 사망하였다. 사후 국장으로 장례가 거행된 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출처: 나무위키>
4. 10대 최규하 대통령(1979~1980)
가문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했으며,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와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과, 만주국 대동학원 정치행정반을 졸업(1부 15기)하였다. 졸업 후 만주국 길림성 통양현에서 행정과장으로 근무했다. 당연히 친일의혹이 제기되었지만, 뚜렷하게 드러난 행적은 없었기 때문에 결국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되지 않았다.
광복 이후에는 경성사범대학[18] 영문과 조교수로 영어를 가르치던 중 1946년 4월 미군정 중앙식량행정처의 기획과장으로 발탁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9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유엔식량농업기구(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FAO) 국제회의에서 유창한 영어 실력과 국제적 활동력을 인정받아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되어, 1951년 외무부 통상국장이 되고 1959년에는 마흔을 갓 넘긴 나이에 외무부 차관이 되었다. 1959년 12월 21일 조정환 외무부 장관이 재일교포 북송 사건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면서 1960년 4월 25일 허정이 외무부 장관에 임명될 때까지 외무부장관 대리로서 업무를 수행하였고, 4.19 혁명으로 허정 과도내각이 들어서고 얼마 뒤 5월 11일 차관직에서 경질되었다. 이후 이승만 정부에서 외무부장관 대리로 국무회의에 참석하여 3.15 부정선거에 관여되었을 수 있다하여 수사를 받았고 당시 고위공직에 있었다고 하여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따라 공민권을 제한받았다.
박정희는 최규하가 이승만 정권 시절의 외무차관이란 이유로 싫어했으나 외무장관 이동원의 강력한 추천으로 1964년 주 말레이시아 대사로 기용하였다가, 그 후 1967년 외무부 장관, 1971년에는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 1975년 국무총리로 중용하였다. 전임자인 김종필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의를 표하자[19] 박정희가 정치적 야심이 전혀 없는 관료출신 최규하를 후임자로 선택한 것이다.
<출처: 나무위키>
5. 11~12대 전두환 대통령
1951년 육군사관학교에 11기로 입교하였고, 1955년 육사 졸업과 동시에 군 생활을 시작하였다. 1961년 서울대학교 학생군사교육단에서 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육사 생도들을 동원하여 군부 지지 시가행진을 벌였고, 이 일로 인해 박정희의 신임을 얻어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 이후 노태우 등 육사 동기들과 함께 육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하여 박정희 전 대통령의 비호를 받으며 군에서 승승장구하였다. 1979년 3월에는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되었는데, 같은 해 10.26 사건이 터지자 계엄법에 의거하여 보안사령관으로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게 되었다. 이때 수사본부장이라는 직책과 자신이 이끌고 있던 하나회를 통한 12.12 군사반란으로 군을 장악하였고, 이듬해 1980년엔 5.17 내란을 일으켜 헌정을 중단하였다. 이후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신설하여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최규하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사임함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치러진 제11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올랐다. 7년 단임 대통령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을 통과시킨 후,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2대 대통령 선거(간접 선거)에 출마해 대통령에 당선되며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다.[15] 임기 말이던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인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시위가 더욱 거세졌고, 이를 불식시키고자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으나 오히려 역풍이 일어나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결국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대선 후보 노태우가 6.29 선언을 발표함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진행하였고, 이후 대통령 임기를 모두 마치고 퇴임하였다.
퇴임 후 역사바로세우기를 내세운 문민정부에 의해 1995년 노태우와 함께 구속 기소되었으며, 이후 반란수괴죄 및 살인, 뇌물수수 등으로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16] 하지만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 두 명에 대한 사면 여론이 생기면서 유력 후보 세 명(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모두 사면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결국 대선 이후 김영삼 대통령의 결단으로 인해 사면되었다.
퇴임 후 상당 기간 동안 건강을 유지하였으나 2021년 8월 악성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 확진 판정을 받았고, 2021년 11월 23일 오전 8시 40분경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향년 9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17]
전두환의 사망을 끝으로 20세기에 집권한(임기 시작부터 퇴임까지) 대한민국 대통령들은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퇴임 후 생존한 기간은 33년으로 역대 대통령 중 최장 기록에 해당한다.[18]
전두환 - 나무위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내외귀빈 여러분! 오늘 새 역사의 장을 여는 뜻깊은 식전에서 먼저 본인을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해 주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과 국민 여러분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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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3대 노태우 대통령
제4공화국 당시 전두환과 함께 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하였으며 전두환이 집권한 뒤에는 정치인으로 전향했다.
6월 항쟁 직후 6.29 선언을 발표하여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였고, 신헌법에 따라 국민 직선제로 치러진 최초의 대선인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정의당 후보로 출마하여 보통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당선되어 1988년 2월 25일 대한민국 제6공화국을 출범시켰다.
대통령에 취임하자 5공 청산론을 받아들여 군부 출신 인사들을 대거 정리하였고, 정치 활동이 금지된 재야인사들을 대거 복권시키고 언론의 자유를 확대하며 중도통합에 나섰다. 세계적인 데탕트 분위기에 발맞추어 북방정책을 펼치고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하고 한반도 비핵화를 선언하였으며, 북한과 유엔에 동시 가입하는 등 제6공화국 모든 정부에서 추진할 대북정책의 기초를 수립했으며 1988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대통령 퇴임 후 12.12 군사반란 및 5.17 내란을 주도한 혐의 등으로 1995년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구속 기소되어 1997년 4월 17일 반란모의참여죄 등으로 징역 17년을 선고받아 확정되었다.[17] 이에 전두환과 더불어 헌정사상 첫 번째로 구속된 대통령이 되었으나 같은 해 12월에 김영삼 전 대통령에 의해 사면되었다.
2002년 전립선암 수술 이후 건강 악화로 인해 연희동 자택과 병원을 오가며 칩거생활을 했다. 희소병인 소뇌위축증을 앓고 있었으며 기본적인 거동조차 하지 못해 휠체어를 타고 지팡이를 쥐고 움직이는 불편한 모습을 자주 보였다.[18] 2007년 6월 6·29 선언 20주년 만찬장 참석을 마지막으로 공식석상과 매스컴에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었다.[19]
2021년 숙환으로 인하여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2021년 10월 26일, 향년 88세로 병상에서 사망했다.[20] 이로써 대한민국 현대사를 주름잡은 1노 3김시대는 완전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21]
노태우 - 나무위키
영남 출신: 전두환은 경상남도 합천군 태생이고, 노태우는 대구광역시 태생이다. 물론 전두환은 태어나기만 합천에서 태어났고 실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곳은 대구이기에 둘 다 대구 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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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4대 김영삼 대통령
국회부의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정치인 장택상의 비서로 일하다가,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국회의원 당선 당시 만 26세 5개월로, 현재까지도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기록되고 있다.
자유당에서 정치를 시작했으나, 1954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사사오입 개헌이 통과되자 이에 반발하여 민주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제3공화국~제5공화국 치하에선 군사정권에 맞서 야당 지도자로서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당시 같은 당의 김대중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함께 동고동락한 동지였다. 그러나 1987년 6.29 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진 후 치뤄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과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갈라서게 되었다. 이후 1990년 3당 합당으로 노태우, 김종필 등과 단일화를 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김영삼이 이끌었던 정부를 문민정부라고 칭하는데, 이는 지난 30여년 동안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져온 군인 출신 대통령이 아닌 '민간인 출신 대통령에 의한 정부'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취임하자마자 전격적인 숙군 작업을 펼쳐 군내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를 뿌리뽑는 데 성공했고, 5.18 민주화운동을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 하였으며 금융실명제를 도입하는 등의 성과가 있었다.
퇴임 후 상도동 자택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2015년 11월 22일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패혈증과 급성 심부전증으로 사망했다. 사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출처:나무위키>
8. 15대 김대중 대통령
헌정 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호남 태생 대통령이자 직접 선거로 선출된 최초의 민주당계 정당 소속 대통령이다.[21] 삼김시대의 일원 중 한 명이다.
본래 해운 회사와 신문사를 경영하던 청년 사업가 출신으로 민주당 신파에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군사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전개한 야당 정치인이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까지 대통령 선거에서 계속 낙선을 거듭해왔으나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종필과 DJP 연합을 통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꺾으며 네 번의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는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였다. 또한 1998년 대통령 취임 당시 74세로 역대 대통령 중 최고령이었다.
대북 유화책인 햇볕정책을 추진하여 2000년 6월에는 사상 최초로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가지기도 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한국과 동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공로 그리고 남북화해와 평화에 대한 노력'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2003년에 임기를 마치고 2009년 8월 18일 폐렴으로 인한 다발성 장기부전과 호흡곤란증후군으로 향년 85세로 사망했다. 사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출처:나무위키>
9. 16대 노무현 대통령
고졸 학력으로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29]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었으나 7개월 만에 사임하고 1978년 부산에서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1981년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은 일을 계기로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인권 변호사 활동 경력을 눈여겨본 김영삼의 제의를 받아 1988년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였고, 같은 해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제5공화국 청문회에서 초선의원임에도 불구하고 전직 대통령, 재벌 회장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질의하는 모습이 국민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서 이른바 청문회 스타[30]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며 김영삼과 결별하여 민주당계 정당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이후 지역주의 타파를 내걸고 민주당 소속 후보가 당선되기 어려운 부산에 출마하여 낙선하는 그에게 지지자들은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이때 대한민국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인 노사모가 탄생하기도 했다.
국민의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거쳐,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04년 선거 관련 발언이 논란이 되어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소추를 당하기도 했으나, 이후 헌법재판소에 의해 기각되어[31] 직무에 복귀했다.
역대 대통령 중 처음으로 퇴임 후 서울이 아닌 고향 봉하마을로 귀향[32]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박연차 게이트 등 친인척 비리로 인해 검찰의 수사를 받다가 2009년 5월 23일 김해 봉화산 부엉이바위에서 스스로 투신하였다. 투신 직후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으나[33] 결국 6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국민장 기간 동안 봉하마을과 전국의 분향소에 1000만 명에 달하는 조문 인파가 몰렸다.[34]
원래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었지만, 본인이 유서에서 화장해 달라고 의사를 밝힘에 따라 수원연화장에서 화장되어 봉하마을 대통령 사저 근처 묘역에 안치되었다.
<출처:나무위키>
10. 17대 이명박 대통령
오사카부 오사카시에서 태어나 경상북도 포항에서 자랐다. 1965년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현대건설에 평사원으로 입사하여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12년 만에 현대건설 대표이사 사장 자리까지 올랐다.
1992년 김영삼에게 발탁되어 민주자유당에서 정치에 입문하였다.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다. 서울시장 재임 당시 추진한 청계천 복원사업과 대중교통 환승할인제 개편을 완수하며 호평을 받았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를 득표율 차이 22.53%p, 득표수 차이 5,317,708표로 꺾고 제17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39] 이는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 평화적 정권교체에 해당한다.
2021년 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이 연이어 사망하면서 현재 생존한 전직 대통령 중 최고령이다.
<출처:나무위키>
11. 18대 박근혜 대통령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12살이 되던 1963년, 아버지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며 청와대 생활을 시작했다. 1974년 서강대학교 공과대학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교육자가 되기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동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가 북한의 지령을 받은 재일교포 문세광에 의해 피살되자 교육자의 꿈을 접고 어머니를 대신하여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마저 서거하자 16년 만에 청와대에서 퇴거하며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이후 20년 가까이 세간에서 잊혀졌다가[27] 1997년 11월, IMF 사태를 계기로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 이회창을 지지하며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이듬해 대구 달성군 지역구에서 제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이후 제15대-제19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의 역풍으로 기존 한나라당 주요 인사들이 몰락한 상황에서 한나라당 당대표로 선출되었고 여당인 열린우리당을 상대로 각종 선거에서 승리[28]를 이끌며 선거의 여왕이란 별명을 얻었다.
2012년 2월, 총선을 앞두고 또 다시 구원투수로 등판하여 새누리당을 출범시켰고[29] 승리를 이끌었다. 제18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민주통합당 소속 문재인 후보를 상대로 승리하며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 타이틀을 거머쥐었다.[30]
하지만 2016년 10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의혹이 본격화되면서 여론이 악화되었고 결국 2016년 12월 9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며 대통령으로서의 직무가 정지되었다.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에 따라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퇴진하였다.
<출처:나무위키>
12. 19대 문재인 대통령
1953년 경상남도 거제군에서 출생해 경남고등학교,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부산의 4대 재야 인권변호사[25]로 활약하다 법무법인 부산에서 동업한 친구 노무현과의 인연으로 참여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시민사회수석비서관,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다.
이후 퇴임한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봉하마을을 근거지로 정치와 거리를 두며 생활하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의 2대 이사장으로 활동하였고, 2011년 문재인의 운명이라는 책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정치의 길에 뛰어들게 된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부산광역시 사상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안철수와 함께 제18대 대통령 선거의 야권 양대 대선주자로 발돋움한 후 경선과 단일화 과정을 거쳐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와 양강구도를 형성했으나 최종 48.02%를 득표해 3.53%의 근소한 차이로 낙선한다. 이후 의원직을 유지하며 평당원으로 잠행을 이어오다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의 2대 당대표로 선출, 제20대 총선을 이끄는가 했으나 연이은 재보궐선거 패배와 극심한 당내 계파갈등으로 인한 대대적인 야권 분열이 이어지면서 당명을 더불어민주당으로 개정한 뒤 김종인을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임명하고 당대표직에서 사퇴한다.
이후 20대 총선 국면에서 물밑에서 여러 지원을 하며 총력을 기울였고, 야권의 일방적인 참패가 예상되었던 해당 선거에서 대반전으로 새누리당이 패배하는 여소야대의 결과가 나옴으로서 정치생명 최대의 위기를 극복한다.[26] 그 영향으로 지지를 회복하여 2016년 하반기부터 야권의 압도적인 대세 대권주자로 인식되었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통령직에서 파면된 이후 조기 대선으로 치러진[27] 제19대 대통령 선거에 더불어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41.08%의 득표율[28]을 기록하며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다음 날인 5월 10일 대통령직에 곧바로 취임한 뒤 2022년 5월 9일까지 국정을 수행하였다.
<출처:나무위키>
13. 20대 윤석열 대통령
1983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9수 끝에 1991년 제33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1994년 검사로 임용되었다. 2013년 수원지방검찰청 여주지청장으로 부임한 직후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 특별수사팀장을 맡아 검찰 수뇌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정원에 대한 압수수색을 집행하고 국정원 직원들을 체포하는 등 적극적으로 수사하였고, 이 때문에 박근혜 정부와 정면 충돌하여 직무배제 및 정직 1개월 징계처분을 받고 대구고등검찰청으로 좌천당했다.
이후 지방에서 한직을 전전하며 검사로서 향후 커리어패스가 불투명해지는 듯했으나, 2016년 12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규명을 위한 특별수사를 맡게 된 박영수 특검팀에 합류하게 되면서 재기하는 데 성공하였다. 해당 사건으로 인하여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파면되었고, 동년 5월 10일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자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등용되어 이명박 정부 및 박근혜 정부에 대한 이른바 '적폐청산' 수사를 진행하며 승승장구하였다.
이러한 성과를 인정받아 2019년 제43대 검찰총장으로 임명되었으나, 검찰총장 취임 직후 발생한 조국 사태를 기점으로 문재인 정부를 겨냥한 수사를 진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문재인 정부와 갈등을 빚어 2020년 말 추미애 전 법무부장관에 의해 헌정 사상 최초로 검찰총장 정직 사건을 겪었다. 이듬해 3월 3일엔 검찰로부터 수사권을 분리 및 박탈하려는 문재인 정부 및 더불어민주당의 검찰개혁 방향에 대해 '검수완박은 부패완판'이라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대통령이 임명한 현직 검찰총장임에도 불구하고 보수 대선주자로서 지지율이 폭등하였다. 이후 3월 4일에 검찰총장직에서 자진 사퇴하였다.
2021년 6월에 제20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였고, 동년 7월 국민의힘에 입당하며 정계에 발을 내디뎠다. 이후 자신의 선거캠프인 국민캠프를 조직해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하여 11월 국민의힘 제2차 전당대회에서 국민의힘 제20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이것으로 본인의 첫 공직선거를 제1야당 대통령 후보로서 대선으로 치르게 되었다.
이듬해에 실시된 20대 대선에서 역대 대선 최다 득표인 16,394,815표를 받아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단 0.73%p 차이라는 역대 대선 최소 득표율 차로 꺾고 첫 공직선거 출마에 바로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13]
2022년 5월 10일 대한민국의 제20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고, 2027년 5월 9일까지 대통령으로서 직무를 수행할 예정이다.
<출처 : 나무위키>
이렇게 초대 대통령부터 지금까지 모든 대통령을 알아보았네여.
보면서 뉴스나 드라마를 통해서 여럿 들었는 정보를 기억하게 되고
그로인해 이분들이 진짜로 우리에게 도움을 주신게 뭘까?
그리고 전국민한데 나한데 도움이 되는건 무엇일까 라는 생각도 하게되네여.
과거는 과거지만 현재라도 좀 좋은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저는 이렇게 해서 끝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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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건강하세요.
행복하세요.
응원합니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업적
감사히 즐감 합니다
수고 많으셨어요.맹꽁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