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추기경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개천에서 용이 난 것은 아니다.
할아버지는 1868년 무진박해(戊辰迫害) 때 순교한 김보현이다. 뼈대 있는 집안의 후손이었다.
추기경은 옹기장사를 하던 아버지의 아호를 '옹기'를 물려받았다.
추기경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아버지가 별세를 했다. 많은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할 짐은, 어머니 혼자서 걸머져야만 했다.
어머니는 여덟 명의 아이들을 사랑으로 키워, 순교자의 후예답게 아들 둘을 천주교회 성직자로 만들었다.
서울 동성상업학교에 다닐 때, 일왕 생일을 축하하는 글을 쓰라는 학교 당국의 지시가 있었다.
추기경은 "나는 황국 신민이 아니다." 하고 거부하자 학교에서는 난리가 났다.
교장의 설득에도 듣지 않았다. 당시 교장은 이승만 시절 국무총리 장 면 박사다.
김수환 추기경은 일본 동경의 상지(上智)대학 철학과에 다닐 때였다. 학병으로 징집될 것이 뻔해서, 아예 간부후보생으로 지원했다.
일본인에 대해 불온한 발언을 했다고, 불경선인(不敬鮮人)으로 낙인 찍혀 강제 전역을 당했다.
해방을 맞아 귀국한 그는 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1951년 대구 계산 성당에서 서품을 받아 성직자의 삶을 시작했다.
학창시절 부산 범일동에 있는 형 김동환 신부가 시무하는 성당에 간 적이 있었다.
유치원에 근무하던 전형적인 조선 미인인 여성으로부터 뜻밖의 청혼을 받았다.
신도들이 뒷이야기를 물었으나 미소를 지을 뿐, 둘 만의 사연을 간직하고 싶었을 것이다.
가톨릭대학이 주최한 ‘열린음악회’에서 사회자가 노래를 한 곡 부탁하자, 곧바로 '등대지기'를 열창했다.
청중들의 앵콜에, 뜬금없이 김수희의 '애모'를 불렀다. 성직자가 부르기에는 좀 거시기한 노래다.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늘은 울고 싶어라, (중략)
사랑 때문에 침묵해야 할 나는 당신의 여자!
그리고 추억이 있는 한 당신은 나의 남자여!
"당신은 나의 남자"를 "당신은 나의 친구"라고 고쳐 추기경다운 재치를 보였다.
추기경의 인생덕목(德目)에 '노점상'이란 항목이 있다.
남루한 노인이 운영하는 작고 초라한 가게를 찾아가라, 물건을 살 때는 고마운 마음으로 돈을 지불하라.
노점상에게서 물건 살 때는 값을 깎지 마라! 그냥 주면 게으름을 키우지만, 제 값을 주면 희망을 선물한 것이다.
먼저 시장 안을 둘러보아라. 덥석! 물건부터 집지 마라. 한 번 산 물건은 물릴 수 없다.
가지려고 하는 것 중에, 제일 좋은 것을 골라 남에게 주어라!
짐이 무거워 불편하다면 욕심이 과한 것, 준비가 부족한 사람은 어려운 세월을 보낸다.
실제로 추기경은 명동성당 앞 노점상에서 묵주를 사셨다.
명동성당에서 군사독재를 반대하는 대학생들이 농성했다. 이에 경찰은 농성에 가담한 학생들을 검거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는 단호한 어조로, "추기경인 나를 먼저 끌고 가라! 그 다음에 신부 수녀, 그 뒤에야 학생들을 끌어갈 수 있을 것이다."
추기경은 오랜 투병생활을 했지만. 고통스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두 눈은 맑고 총명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아픔을 이겨냈다.
2009년 2월 어느 추운 날 하늘나라로 조용히 떠났다.
나는 바보인가 봅니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70년이 걸렸으니까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점이 많습니다. 그래서 밝은 태양은 물론 밤하늘의 별도 보지 못합니다.
"감사합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추기경 김수환
첫댓글 좋은글 감사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
샤프란님
감사히 즐감 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