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에서 만난 여인
최용현(수필가)
11월의 마지막 토요일, 새벽 6시에 일어나 사냥 떠날 준비를 하던 영규는 함께 가기로 한 친구로부터
갑자기 일이 생겨서 사냥을 갈 수가 없다는 전화를 받았다. 결국 영규는 혼자 떠나기로 했다.
그는, 잠이 덜 깬 아내가 데워주는 우유 한 컵을 마시고 밖으로 나와 테라칸에 시동을 걸었다.
날이 새고 있었지만 바깥은 아직도 어두컴컴했다. 사냥가방과 엽견 ‘캐리’의 집인 나무박스를
뒷좌석에 실었다. 여명을 뚫고 차가 달렸다.
부산에서 조그만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사냥시즌만 되면 몸이 근질거리는 열성파 사냥꾼 영규,
오늘은 격주제로 쉬는 토요일이라 올 시즌 처음으로 강원도 삼척으로 사냥을 떠나는 것이다.
포항을 지나 해안도로에 들어섰다. 아침 해가 떠오른 동해바다의 풍광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조금 더 달리니 휴게소 안내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휴게소에 들어가 잔치국수 한 그릇으로 늦은
아침을 때웠다.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을 뽑아 들고 차를 세워둔 곳으로 왔다. 그가 차문을 열려는
순간, 뒤에서 ‘아저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한 아가씨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아저씨, 어디까지 가세요?”
“강원도 삼척으로 가는데….”
“저도 삼척 가는데요, 저 좀 태워주세요.”
‘요즘 아가씨들은 참 맹랑하구나.’ 하고 생각하면서도 혼자 무료하던 차에 잘됐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가 옆 좌석에 앉았다. 차가 출발했다. 아가씨가 자기소개를 했다. 부산대학교 국문학과 2학년이며,
이름은 유경희라고 했다.
어제 기말시험이 끝나고 방학이라 삼척 고향집에 가는 길이란다. 부산에서 첫 직행버스를 타고 가던 중
그 휴게소 부근에서 버스가 고장이 났단다. 금방 고친다고 해놓고선 30분이나 기다려도 감감 무소식
이더란다. 그래서, 아저씨가 혼자인 것 같고 마음씨가 좋아 보여서 염치 불고하고 나를 불렀다는 것이다.
그 아가씨는 상당히 발랄했고 성격도 시원시원했다. 얼굴도 상당히 예뻤다.
둘이서 한참 재미있게 얘기를 하고 있는 사이, 영덕을 지나 막 울진에 들어섰다. 그때 뒷좌석 박스 안에서
잠자고 있던 캐리가 일어나, ‘으응 으으응’ 하고 하품을 했다. 그 소리에 놀란 경희가 뒷좌석을 힐끔
돌아보고는 ‘엄마야!’ 하고 비명을 질렀다. 캐리가 박스 위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괜찮아. 캐리는 사냥개라 사람을 물지 않아.”
영규가 말했다. 그때서야 마음이 놓이는 듯 경희가 다시 물었다.
“아저씨, 그러면 삼척에 사냥 가세요?”
“응, 올해는 강원도에서만 사냥을 할 수 있거든. 삼척에는 4년 만에 처음 가는 길이야.”
어느덧 삼척 가까이 이르렀다. 오후 1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경희가 아무데나 차를 세워달라고 했지만
배가 고팠던 그는 ‘점심 먹고 가지 그래.’ 하면서 삼척에 오면 늘 가던 숙소 앞에 차를 세워놓고 경희와
함께 그 옆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삼척에는 누가 있어?’ 하고 물었더니 경희가 가족얘기를 해주었다. 아버지는 고혈압으로 몇 년 전에
돌아가셨고, 지금 이곳에는 어머니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남동생이 살고 있단다. 그가 생활이
어렵겠다고 하자, 아버지가 남긴 유산이 좀 있어서 그렇게 어렵진 않다고 했다.
경희는 고맙다는 인사를 연거푸 하며 차 태워주고 점심 사준 답례로 커피를 사겠다고 했다. 그러나 빨리
사냥터에 가고 싶은 그는 나중에 저녁 때 사달라고 하면서, 명함을 꺼내 건네주었다.
“여기가 내 숙소야. 이따가 전화 해. 그때 커피를 사든지 동해바다를 구경시켜 주든지….”
경희가 떠나자 그도 숙소에 여장을 풀고 바로 출발했다. 4년 전에 갔던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그가 삼척에 오는 이유는, 이곳이 그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사귀었던 명숙의 고향이고, 그녀와의
아련한 추억이 서린 곳이기 때문이다.
방학 때 명숙이를 따라 이곳에 몇 번 놀러온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지만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가 있는 동안 명숙이는 아버지의 강요로 이곳 삼척의 부잣집 아들한테 시집을 가고 말았다.
결혼식을 올리기 일주일 전 명숙이가 부대로 면회를 왔었다. 그날 외박을 나온 그는 명숙이와 함께 밤을
지새웠다. 그날 명숙이는 ‘절 가지세요.’ 하며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다음날, 그는 명숙이와 함께 어디 먼
곳으로 도망치고 싶은 심정을 애써 억누르며 귀대를 했다. 그것이 22년 전의 일이다. 명숙이는 지금도
이곳 삼척 어디에서 살고 있으리라.
그는 전에 갔던 사냥터를 찾아 산기슭에다 차를 세우고 사냥복으로 갈아입었다. 캐리는 신이 나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야단이었다. 캐리를 앞세우고 밭둑을 지나 눈 덮인 산등성이를 올라갔다. 꿩은커녕 새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4년 전에는 꿩이 많았는데…. 아마도 다른 사냥꾼들이 먼저 다녀간 모양이었다.
몹시 추웠다. 그만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캐리가 꼬리를 치켜든 채 잡풀이 우거진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뭔가를 발견한 것이다. 총 쏠 준비를 했다.
“캐리, 들어가!”
그의 명령과 함께 캐리가 풀숲으로 뛰어들었다. 순간 푸드덕~ 하며 장끼 한 마리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때 탕- 하고 총을 쏘았으나 장끼는 그냥 날아가고 말았다. 맞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가 ‘운이 좋은 놈이군.’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어느덧 저녁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했다. ‘내일은 다른 곳으로 가봐야지.’ 생각하며 산을 내려왔다. 캐리를
차에 태우고 다시 숙소로 향했다.
숙소인 여관 입구 주차장에 경희가 서있었다. 아까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었으며, 어머니를 모시고 왔단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명함을 찬찬히 훑어보던 어머니가 한사코 따라오겠다고 했단다.
저쪽 옆에 중년 부인이 다소곳이 서있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명숙이었다.*
첫댓글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자동차가 귀한 시절..
히치하이킹(hitchhiking) 지나가는 자동차를 얻어 탔다
지금은 보기 드문 장면이지만,
당시는 그 것이 유행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과감했었네요..
수필 잘 읽고 갑니다.
잘보고 갑니다
동해안에서 만난 여인
아목동아님
감사히 즐감 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