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아홉부터 지금까지 27년간 혈액 투석을 하고 있다. 투석을 시작하기 전 나는 동네에서 건강하다고 소문이 날 정도로 아픈 곳 하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소변에 보글보글한 거품이 심해지더니 온몸의 기력이 빠지기 시작했다. 병원 검사 결과는 만성 신부전증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하루 빨리 투석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믿기지 않았다. 평생 투석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안 좋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당시 중학생인 딸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복막 투석을 시작했다. 하루에 여섯 시간씩 투석액을 교환했다. 묵묵히 곁에 있어 주는 남편과 친정어머니 덕에 버틸 수 있었다. 그럼에도 치료 방법이 나에게 맞지 않았는지 매번 복막염이 찾아와 응급실을 제집 드나들 듯했다. 그때마다 칼로 도려내는 듯한 통증이 몸을 파고들었다. 결국 7년 만에 혈액 투석으로 치료법을 바꿨다. 혈관이 약하고 가늘어 투석을 위한 혈관 수술을 자그마치 여덟 번이나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최후의 수단인 인조 혈관 수술을 받고 이틀에 한 번, 네 시간씩 혈액 투석을 시작했다. 지금껏 나만 힘든 줄 알았는데 병원 인공 신장실에는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이 정말 많았다. 우리는 동병상련을 느끼며 서로를 언니, 동생이라 부르며 친해졌다. 투석 날 병원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전화를 걸어 무슨 일이 있는지 서로 걱정하고 의지하며 지냈다. 투석 날 새벽 다섯 시면 어김없이 삼삼오오 모여 춤을 추거나 농담을 나눴다. 그렇게 웃으며 시간을 보내다 투석을 받았다. 걷기 어려운 동료 환자가 있으면 딸이 대신 필요한 물건을 사 오기도 하는 등 서로의 정을 느끼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중 20년 가까이 나를 간호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평생 아픈 자식만 돌보다 정작 본인은 누구의 돌봄도 없이 요양 병원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나게 한 죄스러움에 눈물만 흘렀다. 이제는 시집간 딸이 찾아와 주곤 한다. 어제는 인조 혈관의 수명이 다 돼 재수술을 했다. 또 마음이 약해져 수술대 위에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래도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며 병을 이겨내려 노력하고 있다. 하루는 딸이 "엄마, 이틀에 한 번 병원에 간다 생각하지 말고 학교에 간다고 생각해 봐. 이왕 가는 거 즐겁게 가면 좋지 않겠어?"라고 말했다. 그 말이 큰 힘이 됐다. 생각을 뒤집자 어두웠던 세상이 밝아졌다. 요즘은 투석하러 병원에 갈 때 '또 굵은 바늘에 찔리겠지. 생각만 해도 너무 아프고 힘들다.'가 아닌 '내 몸을 깨끗하게 하는 법을 배우러 학교에 간다.'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루하루 살아 있음에 감사하면 언젠가는 더 좋은 날들이 우리를 향해 웃으면서 다가올 것이라고 믿는다. 최애숙 | 경북 고령군
영혼은 생각이라는 색깔에 물든다. _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살아 있다는 것
2024년 4월 1일, 누나에게 거짓말처럼 조현병이 찾아왔다. 군 복무 중인 내가 휴가를 나온 참이었다. 온 가족이 저녁 식사를 위해 집에 모였을 때 "흰 쌀밥을 대령해라!" "내가 이렇게 된 건 전부 너희들 탓이다!"라며 낯선 노인의 목소리로 말하는 누나의 호령에 소름이 돋았다. 갑자기 맞닥뜨린 상황에 가족 모두가 당황했다. 다음 날, 정신의학과 의사에게 간밤에 녹화한 영상을 보여주니 조현병이라고 했다. 집에서 누나를 돌볼 형편이 안 된 우리는 고심 끝에 누나를 정신 병원에 입원시키기로 했다.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가기 싫어, 너무 무서워!"라고 소리치던 누나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빠르게 회복할 것이라는 바람과 달리 병세는 쉽사리 나아지지 않았다. 엄마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점집에서 굿까지 했다. 누나는 그 뒤로 잠시 좋아지는 듯했지만 원상태로 돌아왔다. 짐을 정리하기 위해 누나의 자취방에 갔다. 그곳에 홀로 있으니 안개 자욱한 숲에서 길 잃은 아이가 된 것 같았다.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과 쌓인 빨랫감을 하나둘 정리하다 공책 하나를 발견했다. 앞 장에는 나와 띠동갑인 누나가 늦은 나이에 간호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한 흔적이 있었다. 비록 합격하진 못했지만 누나는 간호조무사로 대형 병원에서 근무했다. 코로나19 시기에는 몰아닥치는 환자들 때문에 힘들다고 투덜대기 일쑤였지만 누구보다 일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남을 돌보느라 자신은 돌보지 못한 걸까. 뒷장으로 갈수록 안쓰러운 일기가 눈에 띄었다. '오늘은 생일이었다. 어쩌다 보니 부모님과 또 싸웠다.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는 걸까.' 차마 읽을 수 없는 글로 빼곡한 공책을 덮으며 정리를 마쳤다. 후회와 죄책감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친구들이 꿈같은 20대를 즐길 때 나이 든 부모님을 대신해 누나를 평생 돌봐야 한다는 부담도 나를 괴롭혔다.
세상 모든 게 미워질 때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무심결에 받으니 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덜컥 겁이 났다. 누나가 또 어떤 말을 퍼부을까 두려웠다. "초록아, 아파보니까 다시 살고 싶어졌다." 누나가 말했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고마웠다. 누나가 살아 있어 다행이었다. 죽고 싶다던 누나가, 살고 싶다고 말했다.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누나는 퇴원한 지금도 여전히 병과 싸우고 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젠 온 가족이 함께 싸운다는 것이다. 조현병에 완치는 없다고 하지만 상관없다. 결국 남겨지는 건 죄책감과 절망이 아니라 희망과 용기라는 걸 알았으니까. 나는 굳게 다짐했다. 누나와 우리 가족을 사랑하겠다고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가겠노라고. 차초록(가명) | 경북 경산시 산다는 것은 자신 앞에 놓인 불완전한 삶을 한결같은 인내로 거침없이 걸어가는 일이다. _ 배철현
|
첫댓글
좋은글 감사 합니다
반갑습니다
동트는아침 님 !
고운 멘트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새로이 시작하는 한 주
설렘임 가득한 좋은시간
보내시길 소망합니다
~^^
안녕 하세요......망실봉님
오늘도 감동방에 좋은 글
고맙습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한 주의 출발...
포근하고 따뜻하게 보내세요^^
반갑습니다
고운 멘트주셔서
감사합니다 ~
오늘 하루도
수고많으셨습니다
편안하고 여유로운
저녁시간 보내세요
핑크하트 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