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 엘프리데
“서울 올라갈 때 패물 가져가는 것 잊지마오!”
1년 전 유럽유학을 떠난 남편이 강원도 농촌 시댁에 살고 있던 나에게 보낸 편지 속 외국어 암호였다. 모든 우편물은 제일 먼저 사랑방의 시아버님께 배달되었다. 며느리인 내 앞으로 오는 아들의 편지도 우선 열어보신 후 건네주신다는 걸 남편도 알고 있었다. 조촐하지만 결혼 때 시부모님이 정성들여 장만해주신 패물이 몇 가지 있었다. 그것들을 팔아 나의 유럽행 비행기 값에 보탤 계획을 하고 있는 우리의 속심을 차마 말씀드릴 수 없었다.
사랑부엌 쇠여물 솥에 불을 땔 때는 허리춤에 숨겨 넣은 외국어 회화책을 꺼내 아궁이에서 타오르는 불빛에 비춰 보고 중얼거리며 탈향의 꿈을 키웠다. 떠남의 열병은 인간의 원초적 속성이긴 하지만 나같이 혹독한 역마살을 끼고 태어난 사람이 지구의 반대편 유럽땅으로 날아갈 꿈을 꾸는 것은 남편이 그곳에 있어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서울로 올라와 독일 대사관에서 입국사증을 받는 날 뜻밖에 얻은 정보가 독일행을 앞당겨 주었다.
마침 파독간호사를 태우고 가는 전세기가 며칠 후 떠나는데 아주 파격적인 요금으로 편승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달러로 계산되는 정규 여객기 요금이, 조그만 영단주택 한 채 값과 맞먹던 때였다. 집값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이 싼 것을 감안해도 불과 반세기 전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은 그랬다. 정규 여객기의 몇 분의 일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싼 요금으로 전세기에 편승해서 날아갈 수 있었으니 패물의 값어치는 졸지에 상한가를 올린 것이었다. 남편이 장학금을 모아 비행기표를 보냈다는 우리의 말을 부모님은 곧이곧대로 믿으셨다.
내가 도착한 후 남편은 방값이 저렴한 독신기숙사를 나와야 했고, 소액의 장학금으로는 집 얻고 먹고살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서울의 독일대사관에서 받은 내 입국사증에는 ‘노동 불허’라는 스탬프가 찍혀 있었지만 사정을 노동청에 탄원하고 노동허가를 받았다. 원리원칙에 요지부동이라고 소문난 독일도 역시 사람 사는 곳이구나 싶었다.
조용한 대학도시의 노동청 직원을 면담하러 가기 전 나는 병원이 공장보다 임금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담당직원이 독일어 소통이 가능하냐고 묻는 순간 눈 딱 감고 독일어 실력을 부풀렸다. 학창 시절의 독일어 원서강독이 회화에 별 도움이 안 될 것을 알면서도 젊음의 용기는 닥쳐올 후유증은 안중에 없었다. 이튿날부터 내가 일할 곳은 시내 대학병원이었다.
독일어 능력을 묻던 노동청 직원이 나에게 호감을 가졌다면 아마도 전국에 퍼져 있는 파독간호사들의 좋은 평판이 선입견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내가 사는 도시에는 없었지만 이미 만여 명의 한국간호사들이 독일 전역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2차대전의 패전국인 반쪽짜리 나라 서독으로 약 400만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그리스, 터키, 이태리, 스페인 등 한때 인류문명사에서 모두 한자리하던 일등국들이었다. 개인의 삶이란 예나 지금이나 모국의 탯줄에 운명적으로 매여 있기 마련이다. 언어 때문인지 그들 대부분은 병원이 아닌 생산직 단순노동에 투입되었다.
독일병원에서 일하는 한국간호사들에겐 도착 후 어느 정도의 언어교육도 있었겠지만, 병동 안에서 돌아가는 의료시스템이 그리 낯설지 않았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일에도, 언어에도 아무런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나 같은 외톨에게 선진국의 병원이 보여준 호의는 설명하기 어려운 신뢰였다. 신뢰를 감당해내야 하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가장 긴장되는 시간은 낮 1시부터 4시까지 병동에 혼자 근무하는 날이다.
한 번은 병실에서 나오는 당직 의사가 한 환자에게 무엇을 갖다주라며 병동을 떠났다. 얼핏 찻숟가락 ‘레펠헨’으로 들렸다. 찻숟가락이라면 환자들 스스로 해결할 터. 미심쩍었다. 찻숟가락을 유니폼 주머니에 넣고 병실로 환자를 찾아갔다. 상황으로 보아 틀림없이 약 이름일 터였다. 달려가 약장을 훑었다. 알파벳 순으로 정리된 약장에 ‘레펠틴’이 있었다. 가려움증에 먹는 약이었다. 환자의 카드 기록, 증상과 일치했다.
미지의 땅 유럽을 향한 나의 그리움 속엔 항상 유서 깊은 학문의 전당이 어른거렸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일터에서의 긴장은 덜어졌지만 학업에 대한 조급함은 더해갔다. 남들이 기피하는 주말 근무를 자청하고 주중에 휴일을 얻어 학교로 달려갔다. 고학생의 향학 열정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강렬했다. 일자리의 관례와 규정을 피해서 은밀하게 학교 수업에 매진하는 일탈이 정신적 육체적 과부하를 불렀다.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마침 멀지 않은 도시의 종합병원에서 여고 동창생이 수련의 과정을 밟고 있었다. 기왕이면 친구가 일하는 병원으로 가고 싶었다. 친구의 지도교수인 병원장은 기초보험자로 등록되어 있는 나를 사보험 환자만 입원하는 고급 병동에 입원하도록 배려해주었다. 친구의 지도교수는 혼신을 다해 일하는 제자에게 뭔가 마음을 써주고 싶었던 것 같다. 뜻밖의 신분상승이 처음엔 불편하기까지 했다.
일등실 환자 노릇이 익숙해질 무렵, 완치는 아니지만 치료의 희망을 안고 귀가할 수 있었다. 이번엔 한국에서 오는 소식이 어둡기만 했다. 고향에 계신 시부께서 폐결핵 진단을 받고 치료에 들어갔으나 병세가 점점 나빠진다는 소식이었다. 공부를 집어치우고 보따리 싸서 귀국할까 마음먹을 적마다 “너희들은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더라도 공부가 끝나기 전에는 돌아와서는 안 된다.”는 시부의 단호한 편지가 날아왔다.
가도 불효 안 가도 불효였다. 생각해 보니 폐결핵은 의사가 환자를 직접 진찰하지 않더라도 X-ray 사진만으로도 약처방이 가능할 것 같았다. 근처 도시의 외곽 숲 속에 5명의 한국간호사가 일하고 있는 결핵요양원이 있었다. 고향에서 보내온 여러 장의 필름들을 들고 나는 요양원을 찾아갔다.
외래환자도 입원환자도 아닌 원외 상담자에게 의사가 그토록 호의적인 상담을 해준 것은 그곳에서 일하는 한국간호사들이 쌓아놓은 이미지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간호사들이 독일 환자들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었던 자산은 한국여성의 모성애가 아니었나 싶다. 환자의 열을 잴 때 체온계의 숫자만 읽지 않고 환자의 이마에 손을 얹어 열을 느껴볼 때 간호사의 체온이 환자에게 따스하게 전이되었을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기술보다, 언어보다 더 효과적인 소통은 마음이었다.
사진을 판독한 의사는 결핵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라며 치료할 수 있는 약을 메모지에 적어주었다. 그것은 처방전이 아니었다. 입원환자도 외래환자도 아닌, 한국땅에 있는 환자에게 처방전을 써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약값의 고하간에 처방 없이는 살 수 없는 약이었다. 나를 의사에게 소개해 준 한국간호사 말이 그 약은 한국에 없는 약이라고 했다. 반세기 전 우리나라의 제약 수준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게 빈약했다. 약 이름이 적힌 메모지는 나를 아무 일에도 집중할 수 없게 했다.
엘프리데!
내가 일하던 병동의 수간호사 이름이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맺고 끊음이 분명한 칼칼한 성격에다 책임감이 강한 50대 여성이었다. 고향의 시부모님 밑에서 자라고 있는 어린 두 딸의 안부를 가끔 물어주곤 했다. 그날도 나의 침울한 얼굴이 아이들 때문이라고 추측했던 모양이다. 나는 결핵요양원에 다녀온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내가 그분에게 보여준 메모지의 약이 다음 날 병동의 다른 약들과 함께 올라왔다. 말없이 나에게 약을 건네주는 그분의 얼굴에서 무언가 결심할 때의 결연함 같은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입술을 옆으로 꽉 문 채 “받기만 해요.” 하는 것 같았다. 고마워하는 내 마음을 그분은 표정으로 받아주었다.
한세상 사는 동안 누구에게나 가장 잊히지 않는 일이 가장 의미있는 일 아닐까 생각해본다. 귀국 후 사반세기가 지난 다음에야 다시 독일을 방문했다. 수소문해서라도 그분을 찾아보고 왔어야 했는데 바쁜 일정에 밀려 다음으로 미룬 것이 잘못이었다. 지금은 90세가 훨씬 넘었을 그분의 이름을 하릴없이 불러본다.
결핵 환자가 없는 일반 병동에서 상비약으로 결핵약을 주문한 선진국 수간호사의 배려는, 살면서 내가 남에게 해준 덕행이 얼마나 가벼웠는지 저울에 올려놓게 한다. 종교를 수도 없이 바꾸어 본 볼테르가 자연종교로 돌아온 후 “하느님에 대한 유일한 예배는 덕목의 실천”이라고 했다. 나 또한 회향이라는 말의 뜻이 아니라 회향의 삶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고향으로 우송된 신약은, 오래 걸리긴 했지만 아버님을 살려냈다. 아버님은 우리가 귀국한 후 20여 년을 우리 곁에 머물러주셨다. 결혼예물로 내려주신 소중한 패물이 비행기 값으로 쓰였다는 고백을 아버님 생전에 드린 적은 없다.
- 홍혜랑 -
첫댓글 좋은글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가슴 뭉클한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