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거리
모처럼 한가한 분위기다. 평소에도 그리 붐비지는 않았지만 심심찮게 손님들이 있어서 적당히 분주하더니 이번엔 나 혼자뿐이다.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손질해 준다. 20여 년의 단골이니 오죽이나 잘할까마는 내 머리 역시 처음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모양에 똑같은 색깔로 염색만 할 뿐이니 물어보나 마나다.
그래도 매번 시작 때는 썬득거리는 감촉이 그리 좋지는 않아서 긴장되곤 한다. 하지만 아직은 허연 머리칼을 그대로 놔두기는 정신연령이 허락하지를 않는다. 날짜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어느 날 거울 앞에서 자세히 들여다볼 기회가 생기면 ‘어느새’ 하며 화들짝 놀라곤 한다.
때론 흰 머리를 그대로 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 용기 있고 멋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나 자신에게만은 도리질을 하고 있다. 70이라는 고개 줄에 들어서면 모든 것 다 놓아버려야겠다고 했는데 막상 그 선에 다다르게 되니 전부 다 ‘아니올시다.’다. 염색도 더 하고 싶고, 운전도 더 하고 싶고, 등산도 더 하고 싶다. 아니 지금까지 하지 못하고 있던 일까지 덧붙이고 있다.
내 머리를 손질하던 미용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잠시 터덕거린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달거리 아픔’이란다. 달거리! 순간 내 동공이 확 커지면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환해 보였다. 거울을 통해 그녀의 이마, 코, 입술로 해서 목덜미까지 훑어보면서 나도 모르게 내 입술이 오므라들었다. 그녀의 모습이 갑자기 윤기 자르르해 보이면서 반사적으로 메마른 내 입술에 침을 바르고 있었다.
염색약을 다 바르고 잠시 기다리는 동안 미용실을 정리하는 그녀의 뒤태도를 보면서 그동안 잠시 잊고 있었던 젊음의 향기를 더듬었다. 그리 튀어나게 예쁘지도, 맵시 나는 몸매도 아니지만 움직일 때마다 도드라지는 탄탄한 근육들이 왜 그리 아름답게 느껴지던지. 그 근육들 사이를 걸림 없이 쭉쭉 밀고 나가는 핏줄의 역동성이 느껴졌다. 어쩌다 가시에라도 살짝 찔리면 해맑은 핏방울이 퐁 솟아올라 영롱한 구슬이 될 것 같다. 덧바른 화운데이션으로 희뜩하게 들떠있는 내 얼굴보다 민얼굴에 립스틱만 바른 그녀의 얼굴이 더 생기 있어 보이고 하늘하늘한 내 치맛자락보다 군데군데 얼룩이 묻어있는 그녀의 앞치마가 더욱더 싱그럽게 보였다.
달거리란 그 한마디가 이렇게 내 마음을 흔들어 놓을 줄 몰랐다. 그것이 젊음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걸 이렇게나 절실하게 느껴 본 적이 있었던가. 순간에, 꽃 떨어진 억새밭이나 갈대밭을 걸어가는 것 같은 퍼석한 마음이 되어 버렸다. 내게 없는 것이어서 더욱 간절한 아쉬움일 것일까. 이리도 소중하게 느껴지는 걸 젊었을 땐 왜 그리 귀찮게만 생각했었던가.
친정어머니를 닮은 나는 유난히 양이 많아 골칫거리였었다. 옛날 가제수건을 사용했을 땐 도랑이나 우물가에 흐르는 벌건 물이 부끄러워 저녁에만 빨래를 했고 온종일 받아내는 양을 감당하기엔 수건이 모자라서 애를 먹기도 했다. 후에 생리대를 사서 쓰게 되었을 땐 제일 두꺼운 것을 쓰면서도 행여 옷에 묻어 티가 나면 어쩌나 싶어 안절부절못했다. 나이 들어 그런 것들이 소용없게 되었을 땐 빨리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열심히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르고 하이힐을 신고 다니면서 아직은 여자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살고 싶었는데 달거리란 그 한마디 앞에서 모든 것이 다 무너져 버린 느낌이었다. 그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회복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자에겐 그것이 바로 건강의 증표이고 젊음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젊음, 그 자체만으로도 모두 그냥 예뻐 보인다. 이제야 옛날 할머니들이 우리들만 보면 ‘예쁘다, 예쁘다.’ 하셨던 말들이 뜻있게 다가온다. 우르르 몰려온 친구들을 향해 “예쁘다.”를 연발하시면 그리 곱지 않은 애들을 향해 ‘제가 예쁘다고?’ 하면서 입을 삐죽거리기도 했었다. 그땐 할머니가 참 바보처럼 보였다.
수고비를 건네주면서 ‘예뻐요!’ 했더니 “예, 이번엔 염색이 더 예쁘게 나왔네요.”하면서 활짝 웃는다. 내 말의 의미를 잘 못 알아들은 그녀가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보람으로 뿌듯해한다. 그 모습도 예쁘다. 아마 나도 바보할머니가 되어가나 보다.
미용실 문을 밀치고 나오니 새삼 가로수의 연초록 잎들이 더없이 예뻐 보이고 담장 너머로 이제 막 피기 시작하는 빨간 장밋빛이 유난히 선명하게 돋보인다. 그러고 보니 세상은 참 공평한 것 같다. 내게서 육체적 건강이 조금씩 스러져 갔다면 모든 것이 예뻐 보이는 정신적 건강을 얻었지 싶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제 부터는 바보할머니, 아니 바보여인으로 살아갈 듯싶다.
- 김재희 -
첫댓글 좋은글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