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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공(指空)선사는 천축국 사람으로 원나라에 불법을 전했으며 고려에도 잠시 머물며
불법을 널리 폈던 분이다. 나옹화상과 무학대사, 백운 경한스님의 스승으로도 널리 알려졌고
그의 부도탑이 양주 회암사에 있다.
가섭 이후 108번째로 의발을 전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증조부의 이름은 사자협, 조부는 곡반으로 모두 가비라국의 왕이었다.
아버지는 이름이 만이며, 마갈제국의 왕이었고 어머니는 향지국 공주였으며,
두 형은 ‘실리가라파’와 ‘실리마니’이다. 부모가 동방의 대위덕신에게 기도해서 낳았다고 한다.
나이 5세가 되자 스승에게 가서 나라의 글과 외국의 학문을 배웠고
아버지가 병이 들어 의원의 효력이 없자
어느 스님이 ‘적자가 출가를 하여야만 왕의 병이 나을 것이다’ 하였다.
그때 그는 아버지를 살리고자 출가하겠다고 하였고
어머니는 그가 막내라 해서 처음에는 몹시 난처하게 여겼으나
사랑하는 마음을 참고 불문에 내주기를 발원하니 어버지의 병은 즉시로 나았다.
8세에는 삼의(三衣)를 갖추어
나란타사(那蘭陀寺)의 강사 율현에게로 보내져서 머리를 깎고 오계를 받았다.
⟪대반야경 大般若經⟫을 배우다가 마음속에 얻는 것이 있는 듯 싶어서
제불(諸佛)의 세계와 중생의 세계와 허공의 세계 등 세 경계에 대해 물었더니
스승께서 대답하시기를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참된 반야(般若)이다.
이제 남인도 능가국(楞伽國,스리랑카) 길상산의 보명에게로 가서 심오한 뜻을 연구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19세였다.
이에 홀로 여행을 떠나 보명 스승을 정음암에서 뵙고 예배하니
스승께서 물으시기를 ‘중천축(中天竺)으로부터 여기까지 몇 걸음을 걸었는지 셀 수 있겠는가?’ 하시거늘
지공은 대답치 못하고 물러나와 석굴(石窟)에 앉아서 6개월을 보내다가 마침내 깨달았다.
자리에서 일어나고자 하였으나 두 다리가 서로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나라의 왕이 의사를 불러 약으로 치료하게 하자 이내 나았다.
스승에게 가서 아뢰기를 ‘두 다리 사이가 곧 한 걸음입니다’ 했더니,
스승께서는 의발(衣鉢)을 주시고 정수리를 만지면서 수기(授記)하시기를
‘산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곧 사자 새끼로구나!
내 법좌 아래서 법을 얻어 출세한 이가 243인이나 되지만
모두가 중생세계와는 인연이 적었다.
이제 네가 나의 교화를 널리 퍼뜨려라. 가서 힘쓰도록 하라’ 하며
‘소나적사야’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이것이 중국말로 지공(指空)이다.
이때 게송을 지어서 스승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나서 대중에게
‘앞으로 나아가면 허공이 텅 비어 트여 있고,
뒤로 물러나면 만법이 모두 물에 잠긴다’ 하고 큰소리로 할(喝)을 하였다.
처음에 그가 스승을 찾아갈 때에 라라허국을 지나게 되었다.
여기에는 ⟪법화경⟫을 강론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가 게송를 설해서 의심나는 것을 풀어주었다.
단치국(旦哆國)에는 남녀가 섞여서 살면서 나체로 지내고 있기에 대도(大道)를 알려 주었다.
향지국(香至國,달마대사가 향지국의 왕자였다)에서는 왕이 그가 왔다는 말을 듣고
나의 생질이 왔다고 기뻐하면서 머물기를 청하였으나 그는 머무르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여기에서는 ⟪화엄경⟫을 가르치는 법사가 20가지 보리심(菩提心)을 강설하고 있었는데
그는 ‘하나가 곧 많은 것이요, 많은 것이 곧 하나[一卽多 多卽一]’인 원리를 깨우쳐 주었다.
가릉가국(迦陵伽國)의 해안에 있는 귀봉산(龜峰山)에 범지(梵志)가 살고 있었다.
그는 ‘만길이나 되는 절벽에서 몸을 던져 죽는다면
마땅히 인간계와 천상계의 왕의 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기에
지공은 ‘도를 수행하는 것은 오직 마음에 있는 것인데 어찌 육신과 관계가 있겠는가’ 하면서
육바라밀, 십지(十地) 등의 법을 닦도록 하였다.
그리고 나서 마리지산에서 하안거(夏安居)를 난 뒤에 스승이 계신 능가국(楞伽國)으로 오게 된 것이다.
우지국(于地國)의 왕은 외도(外道)를 믿고 있었는데
지공이 살생, 도둑질, 사음에 대한 계(戒)를 지니고 있는 것을 알고서
일부러 기생을 불러 함께 목욕하게 하였다.
그러나 지공이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하지 않자
왕이 탄복하면서 ‘이 사람은 필시 이인(異人)일 것이다’ 하였다.
그곳의 외도가 나무와 돌을 가지고 수미산을 만들었는데,
사람의 머리, 가슴, 다리에 산 하나를 올려놓고
술과 음식으로 산에 제사지내면, 남녀가 그 앞에서 교합을 한다.
이것을 음양공양(陰陽供養)이라고 말한다.
이에 지공은 인간계와 천상계의 미(迷)와 오(悟)의 이치를 들어서 힘써 사교(邪敎)를 깨뜨렸다.
좌리국(佐理國)에서는 국왕이 불교를 믿었다.
지공이 게송으로 왕에게 아뢰자 왕도 게송으로 답하였다.
지공이 다시 게송을 읊자 왕은 진주 몇 개를 보시하였다.
여럿이 모인 가운데에 있던 비구니가 대중 앞으로 나와서 묻기를
‘저 스승과 이 제자의 중간에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기에
지공이 할(喝)을 크게 한번 하니 비구니가 크게 깨닫고는
‘바늘구멍 속으로 상왕(象王)이 지나간다’는 게송을 읊었다.
사자국(獅子國)에는 여래의 발우와 부처님의 족적(足跡)이 있었다.
그 발우 하나의 밥을 가지고 능히 만명의 스님을 먹일 수 있고,
부처님의 족적에서는 때때로 방광(放光)을 한다고 하기에 지공은 이것을 모두 우러러보며 예배하였다.
가라나국도 외도를 믿었다.
그 왕은 지공을 보고 몹시 기뻐하기에
지공이 대장엄공덕보왕경의 마헤사라왕인지품을 가지고 교시하였더니
왕이 ‘우리가 알고 있는 법 밖에 다시 정법(正法)이 있구나’ 하였다.
외도가 그를 해치려 하기에 그는 즉시 성을 나왔다.
날이 이미 깜깜해진 가운데 범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자(侍子)가 위험을 알리는 까마귀 울음소리를 알아듣고는 나무에 올라가 범을 피했다.
지공은 ‘네가 새소리는 알아들었다만,
내가 설하는 법문은 능히 알아들었느냐, 못알아들었느냐’ 했더니 시자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가 삼십방(三十棒)을 아프게 때렸더니 드디어 깨달았다.
신두국(神頭國)은 나는 모래가 아득해서 어디로 갈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복숭아 비슷한 열매가 나무에 매달려 있기에
몹시 배가 고픈 나머지 두 개를 따서 먹고 있었는데
다 먹기도 전에 허공계의 신이 그를 잡아끌고는 공거천(空居天)의 넓은 전각 위로 데려갔다.
노인 하나가 정좌하고 있다가 ‘너는 어찌해서 절을 하지 않는가.’ 하기에
지공은 ‘나는 불도(佛徒)이다. 어찌 그대에게 절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노인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미 불도라고 하면서 어찌해서 과실을 훔치는가’ 하기에
그는 ‘몹시 배고파서 그러한 것이오’ 하니
‘남이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은 도둑이다.
이번에는 그대를 놓아주겠으니 불계(佛戒)를 잘 수호하라’고 하였다.
눈을 감게 하고 잠깐 사이에 이미 저쪽 언덕에 이르렀다.
쓰러져 있는 나무 위에서 물을 끓이다가 보니 그 나무는 큰 뱀이었다.
적리라아국(的里囉兒國)의 여자가 교합하기를 청하였다.
그는 배가 고프기 때문에 먹을 것을 얻고자 해서
그녀의 요구에 응하는 척 하면서 그녀가 가진 말 중에서 잘 달리는 말이 있는지 물었더니
그녀는 사실대로 가르쳐주었다. 이에 그는 곧장 그 말을 타고 빠져나왔는데
그 말은 과연 나는 듯이 달려서 문득 딴 나라 국경에 이르렀다.
이때 갑자기 한 사람이 나타나 그를 묶어서 데려 가더니 자기의 양(羊)을 치라고 하였다.
때마침 큰 눈이 내렸으므로 그가 동굴에 들어가서 선정(禪定)에 들어가
7일째 되는 날 밤에 흰 빛이 동굴 속에서 뻗쳤다.
그 사람이 눈을 치고 들어와서 지공이 가부좌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여 옷과 보물을 시주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받지 않았다.
그곳 남녀들이 곧 보리심을 발하여 그에게 바른 길을 일러주었다.
한참 동안 길을 가도 사람 모습을 보지 못하다가
홀연히 한사람을 길에서 만나게 되어 마음속으로 기뻤는데,
그 사람이 지공을 붙잡아 가지고 왕이 있는 곳으로 끌고 가더니
왕 앞에 그를 꿇리고는 ‘지금 몹시 가문 것은 필시 이 요물 때문일 것이니 청컨대 죽이시옵소서’ 하였다.
왕은 ‘우선 놓아주어라. 앞으로 3일 안에 비가 오지 않거든 그때 죽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그가 향을 사르고 한 번 축원을 하자 큰 비가 사흘 동안이나 내렸다.
니가라국(禰伽羅國,네팔)에서는 왕이 지공을 맞아 안으로 맞아들여 설법해 주기를 청했다.
거기에는 보봉(寶峰)이라는 자가 있어서 불경을 강설하고 있어서 그와 함께 서로 강론을 하였다.
동쪽으로 수일 동안을 가니 높은 산이 나타났는데 철산(鐵山)이라고 하였다.
흙이나 돌도 없고 초목도 나지 않았다. 아침에 해가 비치면 마치 불과 같았다.
이 산을 화염산(火焰山)이라고도 한다. 7,8일을 가야만 산마루에 오를 수가 있다.
그 주위에 모두 17,8개의 나라가 있다.
가로로 하늘 의 북쪽과 접해 있는데, 몇 천만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그 동쪽에서는 하수(河水)가 흘러나오는데,
높이 솟아 있는 양쪽 언덕사이로 다리를 통해 건너갔다.
얼음과 눈이 사철 녹지 않기 때문에 그곳을 설산(雪山)이라고 부른다.
그는 외로운 몸으로 굶주림이 극도에 달하여
들판에 있는 과일을 씹으면서 서번(西蕃,티벳) 국경에 도달하였다.
그가 중국에서 교화를 펼 때에
북인도의 마하반특달(摩訶班特達)을 서번(西蕃:티벳)에서 만나서 연경에 함께 왔었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서쪽으로 안서왕부(安西王府)에 노닐게 되었는데
그곳의 왕인 부가제(傅可提)와 만났다.
부가제는 지공을 보고는 그곳에 머물면서 불법을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다.
하지만 지공의 뜻은 두루 돌아다니면서 교화를 행하는데 있었기 때문에 말하기를
‘나의 도는 자비를 근본을 삼는다.
그대가 배우는 것을 보면 이와 어긋나니, 어찌된 일인가’ 하니
부가제는 ‘중생들이 아주 먼 옛날부터 지어 온 그 악업이 이루 헤아릴 수가 없기에
내가 진언(眞言) 한 마디로 저들을 제도하여
중생의 몸을 벗고서 하늘의 즐거움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지공이 ‘네 말이 망령되도다. 사람을 죽이면 남이 또 그를 죽이는 법이니,
이처럼 생사를 윤회하면서 서로 원수를 갚는 것이 바로 괴로움의 근본인 것이다’ 하니
‘그것은 외도이다’ 하였다.
지공은 ‘자비를 행하는 자야말로 참으로 불자(佛子)요,
이에 어긋나게 행하는 자가 실로 외도인 것이다’ 하였다.
왕이 희사하려는 물건이 있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촉(蜀) 땅에 이르러 거대한 보현보살상(像)에 예배하고 나서 3년 동안 좌선하였다.
운남성(雲南城) 서쪽에 절이 있었다. 성의 문루에 올라 선정(禪定)에 들어갔다.
그곳에 사는 스님이 성 안에 들어오기를 청하여 조변사(祖變寺)로 갔다.
오동나무 아래에서 좌선하였는데, 이날 밤에 비가 왔건만 날이 밝고 보니 옷이 하나도 젖지 않았다.
그곳 성(省)으로 가서 날이 개기를 빌었더니 바로 감응이 있었다.
용천사에서 하안거를 하면서 범자(梵字)로 된 반야경(般若經)을 베꼈다.
이때 대중이 모여들어 물이 부족하게 되었으므로
지공은 용(龍)에게 샘물을 끌어오도록 명하여 여러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대리국(大理國)에서 그는 여러 가지 음식을 물리치고 다만 호도 아홉 알을 먹고 날을 보냈다.
금치(金齒)와 오철(烏撤)과 오몽(烏蒙)은 같은 씨족 부락인데
그를 스승으로 받들어 예배드리면서 그의 모습을 조각하여 사당에 모셔 두고 있었다.
무뢰배들이 그의 소상(塑像)에서 선봉(禪棒)을 떼어내 땅에 던지자 다시는 들 수가 없었는데,
뉘우쳐서 사과하고 나서야 그것을 가져다가 예전처럼 봉안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안녕주(安寧州)의 스님 하나가 지공에게 ‘옛날에 삼장법사가 당나라에 들어갈 적에,
땅에 한 번 엎드리고 나면 그 지방의 언어를 알아들었다는 게 사실입니까?’ 하고 물었는데
이는 그가 당시에 운남(雲南)의 말을 알아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그가 ‘옛날과 지금은 시대가 같지 않고,
성인과 범부는 가는 길이 서로 다른 것이다’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그에게 계경(戒經)을 설해 주기를 청하여
정수리와 팔에 연비(燃臂)를 해 주었고 관민들도 모두가 따랐다.
중경로(中慶路)의 여러 절에서 설법해 주기를 청하였으므로 모두 다섯 차례 법회를 가졌다.
태자(太子)가 그를 스승으로 받들며 예배하였다.
나라(羅羅) 사람들은 본래 부처나 스님을 알지 못하다가
그가 도착하자 이를 계기로 모두 발심하였으며
날아가는 새들까지도 부처님의 명호를 노래할 정도가 되었다.
귀주(貴州)에서는 원수부(元帥府)의 관원들이 모두 그에게 계(戒)를 받았다.
진원부(鎭遠府)에는 마왕신(馬王神)의 사당이 있었는데,
배를 타고 지나는 자들은 반드시 고기를 놓고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배가 뒤집힌다고 하였는데 지공이 크게 한마디 꾸짖고는 배를 출발시켰다.
상덕로(常德路)에서는 금강(金剛)과 백록(白鹿)의 두 조사(祖師)에게 예배하고,
백의관음을 조각한 상(像)에 경배하였다.
동정호(洞庭湖)에서는 신령스러운 이적(異蹟)이 자못 많았는데,
그 귀신에게 성대하게 제사를 올리면 비바람도 멈출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공이 그곳에 갔을 때 마침 바람이 불면서 물결이 거세게 일어났으므로,
그가 중국말과 인도말로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의 뜻을 번갈아 설하자 풍랑이 잔잔해졌다.
그동안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던 자들이 밤에 명주실로 짠 신을 제물로 바치면
그 다음날 아침에 그 신들이 모두 찢어져 있었다고 하는데,
그가 이 일을 행한 뒤로는 바치는 제물을 모두 없애고 소찬(素餐)으로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여산의 동림사(東林寺)를 지나다가
전신탑(前身塔)이 우뚝한 것을 보았는데 뼈가 아직 썩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회서(淮西)의 관(寬)이 「반야」의 뜻을 물어보기에,
지공은 ‘삼심(三心)은 얻을 수가 없다’고 설하였다.
양주(楊州)에서 태자(太子)가 배에 태워 보내 주어서 연경(燕京)에 이르게 되었다.
대순승상(大順丞相)의 아내 위씨(韋氏)는 고려 사람인데,
숭인사(崇仁寺)에서 계(戒)를 베풀어 달라고 지공에게 청하였다.
이윽고 난경(灤京)에 도착해서는 태정(泰定) 황제의 후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원나라 태정(泰定)연간에 난수(難水) 위에서 천자(天子)를 뵙고
불법을 논하여 천자의 뜻에 맞는 일이 있었다.
이에 유사(有司)에 명하여 해마다 옷과 양식을 주었다.
이에 선사가 “내가 이런 것을 원한 게 아니다” 하고
그곳을 떠나서 동쪽으로 고려(高麗)에 놀았다.
이때 금강산(金剛山)의 법기도량(법기보살은 담무갈보살)에 참례하였다.
이때 중국 황제의 명령이 있어 연경(燕京)으로 돌아갔다.
천력(天曆)초년에 조서를 내려,
천자의 총애를 받는 여러 스님들과 함께 궁궐 안뜰에서 불법을 강론하게 하고
천자가 여기에 친히 나와서 들었다.
이에 여러 스님들이 천자의 은총을 믿고 기세등등하게 날뛰면서,
혹시 그가 자기들의 은총을 앗아갈까 미워한 나머지
앞을 가로막고 서서 법문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얼마 뒤에 여러 스님들은 혹은 베임을 당하고 혹은 내쫓기기도 하였는데,
이 일로 인해서 선사의 명성이 안팎에 진동했다.
지정(至正) 연간에 황후와 황태자가 그를 연화각(延華閣)에 맞아들여 불법을 묻자,
선사는 “불법이란 배우는 자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마음을 오로지 하시어 천하를 다스리시옵소서” 하였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두 분 모두 만복을 갖추소서.
만 가지 중에서 한 가지만 없어도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고는
희사한 구슬과 옥도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대부태감(大府太監) ‘찰한첩목아’의 부인 김씨도 역시 고려 사람이었다.
선사를 쫓아 출가한 뒤에 징청리(澄淸里)에 집을 사서 절을 만들고는
선사를 맞아 그곳에 거쳐하게 하였다.
선사는 그 곳에 법원(法源,나옹화상이 지공선사를 만난곳)이라는 편액을 내걸었으니
이는 대개 천하의 물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오기 때문에
이를 취해서 자신을 비유한 것이었다.
선사가 흰 수염에 변발을 한 모습을 보면
정신과 풍채가 검은 옥돌처럼 은은하게 빛이 났고,
의복과 음식은 몹시 사치스럽게 하였으며,
평상시에는 엄격하고 숙연해서 사람들이 바라보고는 두려워하였다.
1361년 11월 20일에 선사는 귀화방장(歸化方丈)에서 입적하시니
이곳은 선사가 집을 짓고 선사가 이름을 지은 곳이다.
황제의 명령으로 성(省)⋅원(院)⋅대(臺)의 여러 관청에서 의례(儀禮)을 갖추어
천수사에 있는 감실(龕室)로 영구(靈柩)를 호송하였다.
이듬해에 어사대부(御史大夫) 도견첩목아⋅평장백첩목아가
향수(香水)를 상자에 담아 선사의 유체를 배알하고
향수를 배합한 찰흙에다 매실과 계피와 얼음 덩어리를 섞어
선사의 유체 위에 덧바름으로써 유체가 부패하지 않도록 하였다.
무신년 가을에 병림성(兵臨城)에서 다비하여 유골을 넷으로 나누어
달현(達玄)⋅청혜(淸慧)⋅법명(法明)과 내정(內正) 장녹길(張祿吉)이 각각 가져갔다.
선사의 제자 달현이 바다를 건너올 적에 사도(司徒) 달예(達叡)는
청혜(淸慧)에게서 유골을 얻어 가지고 수천리나 되는 험한 길을 건너
마치 살아있는 분을 섬기듯 스승의 유골을 받들고 함께 고려로 돌아왔다.
지공(指空)의 유골을 왕이 친히 왕륜사(王輪寺)로 가서
불치(佛齒)와 지공의 두골(頭骨)을 머리에 이고 궁중으로 옮겼다고 한다.
고려로 옮겨진 지공의 유골은 양주 회암사를 비롯하여 묘향산(妙香山) 안심사(安心寺),
장단(長湍)[현재의 개성]의 화장사(華藏寺), 3곳의 부도에 봉안되었다.
임자년(1372년 공민 21) 9월 16일에 왕명으로 회암사(檜巖寺)에 부도를 세웠으며,
장차 탑속에 넣으려고 유골을 물로 씻다가 사리 몇 과를 얻었다.
선사가 서천(西天)에서 ⟪문수사리무생계경文殊師利無生戒經⟫두 권을 가지고 왔는데,
참정(參政) 위대박(危大朴)이 서문을 썼고,
선사가 손수 ⟪원각경圓覺經⟫을 서사(書寫) 했으며, 구양 승지(歐陽承旨)가 책 끝에 발문을 썼다.
고려 충숙왕 13년(1326년)애 27세의 나이로 고려에 불법을
전파하려 왔던 지공화상은 충숙왕 15년 금강산 법기도량(法起道場)에 예배하고,
그 해 7월에 연복정(延福亭)에서 계를 설(說)하였다 한다.
1326년(충숙왕 13) 3월부터 1328년(충숙왕 15) 9월까지 고려에 머물면서 여러 사찰을 방문하였는데,
그 중 회암사는 지공화상이 불법을 펼친 중심 도량으로 가장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부도를 건립하게 되었다.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 15년(1328) 지공(指空)화상이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 )를 본떠 창건했고
그후 나옹화상이 266칸짜리 거대한 사찰로 중창했다고 한다
목은 이색이 지공선사의 탑묘에 적은 글이다
스님의 발자취를 살펴보건대, 저 멀리 서역(西域)에서부터 시작되었네.
만왕(滿王)의 아들이요, 보명(普明)스님의 의발을 받은 적손일세.
난경(灤京)에서 알아주는 이 만나니 참으로 그때에 걸맞은 일이었건만
연화각(延華閣)을 방문한 것은 왜 그다지 늦었던가.
우리나라에 남긴 자취는 유력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인데
옥상에서 병의 물을 쏟는 것 같고, 물에 던진 돌과 같았어라.
천력 연간에 승려가 은총을 믿고 날뛰었지만 선사의 명성은 더욱 드러났고
승복을 벗고 속복을 입기도 하였지만 도의 명예[道譽]는 갈수록 높았어라.
미치광이 같은 말과 농담을 하였지만, 속인들이 그 뜻을 어찌 헤아릴까
전쟁이 터지기 전에 군사 일 예언하여, 흑백을 구별하듯 분명히 밝혀냈네.
그 선견지명(先見之明)은 바로 스님의 도가 정밀했기 때문이니
혹은 의심하고 혹은 비방했지만 스승의 마음은 그저 편안했다네.
영롱하게 빛나는 사리가 나오자, 모두가 경외하며 숨을 죽였나니
누가 말했던가 사람의 성품이, 끝내 선(善)으로 합치되지 않는다고.
여기 회암사(檜巖寺)에 터를 잡고 부도명을 새겨 탑을 세우나니
감히 혹시라도 와전(訛傳)되지 말게 하고, 영원히 귀감으로 삼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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