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는 “나에게 여자는 두 종류만 있다. 여신이거나 도어매트”라고 얘기하곤 했다. 내가 너무 여신같이 느끼고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나를 도어매트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 프랑수아즈 질로
피카소가 만난 여자들 중 2명은 자살하고, 1명은 신경쇠약에 걸리고,
피카소에게서 탈출한 프랑수아즈 질로의 책
한명은 탈출해서 피카소에 대한 책을 쓰고 화가로 전향함
그리고 피카소의 손녀는,
<내갈배 피카소>라는 책을 써서 수많은 여성, 자식들을 고통에 빠트린 피카소를 신랄하게 비판함 (갈배를 곁들인. 그러나 지금은 절판된) 아들은 알콜중독으로, 손자는 락스 마시고 자살했음
이 모든게 우연일까? 대체 어떤새끼였기에..? 피카소의 끔찍한 두 얼굴에 대해 araboza
오데트, 제르메인, 마델레인, 페르낭드 올리비에, 에바 구델, 올가 코크로바(결혼), 마리 테레즈 월터, 도라 마르, 프랑수아즈 질로, 제노비에브 라포르트, 재클린 로케(결혼). 이들 11명은 공식적으로 피카소와 사랑한 여자들이다. 스쳐간 여자들을 포함하면 100명이 넘을 것이라고 한다. 오데트를 시작으로 결혼 전 만난 여자들은 모두 모델들이고, 올가는 러시아 무용수로 피카소가 장 콕토의 부탁으로 그의 발레 무대와 의상을 맡아 이탈리아에 갔다가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결혼 후에도 5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금발에 건장한 체형인 마리 테레즈는 미성년인 17세 때 이미 유명해진 45세의 피카소가 지하철역에서 말을 건 뒤 서점에 데리고 가 자신에 대한 책을 보여주고 사귀기 시작했다. 그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되자, 올가는 아들을 데리고 피카소를 떠났다. 도라는 사진작가로 28세 때 한 카페에서 54세인 피카소를 만났다. 역사적인 ‘게르니카’ 작업을 사진으로 기록했고 지적인 스타일로, ‘우는 여자’ 등 불행한 여자의 모델로 등장한다. 질로는 21세 때 62세인 피카소를 만났다. 아버지가 법대를 보냈지만 화가를 희망해 학업을 때려치운 독립적인 성격으로 피카소와 10년을 살다가 떠났다. 제노비에브는 10대에 피카소 집을 찾아와 시를 읽곤 하다가 25세 때 70세의 피카소와 관계를 갖기 시작했다.재클린은 피카소와 결혼한 두 번째 부인이자 마지막 여자이다. 26세 때 도자기 공방에서 일하던 시절 도자기 작업을 하러 온 72세의 피카소를 만났고 34세 때 80세인 피카소와 결혼했다. 피카소는 부인 올가와의 사이에서 장남을 낳았고 마리 테레즈와는 딸 하나, 질로와의 사이에서 딸과 아들을 낳았다. 올가 이후 만난 6명 중 두 명(올가와 도라)은 정신병원에 가야 했고 두 명(도라와 재클린)은 피카소가 죽자 자살했다. 불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장남은 알코올중독으로 죽었고 그의 아들, 즉 피카소의 손자는 자살했다.
피카소는 “사랑은 인생의 가장 위대한 청량제”이며 “섹스와 예술은 같은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이들 여자를 주제로 그가 만든 수많은 작품들이 보여주듯이, 이들이 그의 창조력의 중요한 원천이 되고 자극제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페미니즘적 시각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가 위대한 예술가라는 이유로 미성년자 등 수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맺어온 것을, 그리고 이들을 제멋대로 갈아치운 것을 용납해야 하는 것인가? 단연코 아닐 것이다.
질로는 “나를 떠나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피카소의 경고에도 제 발로 피카소를 떠났다. 이후 피카소에 대한 책을 써서 수백만부를 팔았고 피카소의 경고와 달리 화가로 성공했고 재혼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그는 회고록에서 피카소의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피카소는 질로에게 “내가 너에게 영원히 매여 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나는 독립적인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철저한 굴종을 요구했다. “나에게 여자는 두 종류만 있다. 여신이거나 도어매트”라고 이야기하고, 질로가 너무 여신인 것 같으면 도어매트로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내게 중요하지 않다. 다른 사람들은 햇볕에 날아다니는 먼지 같아 내가 빗자루질 한번 하면 다 사라진다”는 이기주의자였다. 질로는 피카소가 위대함과는 별개로 “이기주의자에, 마초이며, 감정 기복이 크고, 변태적이고, 때로는 폭력적이었다”고 고발하고 있다.
피카소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것은 손녀이다. 피카소의 장남 딸인 마리아는 피카소가 할머니 올가와 헤어진 뒤 생활비를 주지 않아 아버지가 피카소를 찾아가 몇 시간씩 길에서 기다렸다 간신히 돈을 받아 술로 날을 새우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결국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으로 죽었고 오빠는 피카소의 새 부인이 유산 갈등 탓에 피카소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자 표백제를 먹고 목숨을 끊었다. 마리아는 피카소의 재산 중 5분의 1인 1만점의 작품을 상속받았다. 이는 3000억원이 넘는 엄청난 재산이지만, 마리아는 “애정 없는 유산은 의미 없다”며 이를 팔고 있다. “파는 것이 과거를 치유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 돈으로 자선사업을 하고, 베트남 아이들을 입양해 키우고 있다. 그는 <피카소, 나의 할아버지>에서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우리 가족 누구도 천재의 올가미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의 그림 하나하나의 서명에는 내 아버지, 오빠, 어머니, 할머니, 그리고 나의 피가 필요했다. 그는 여자들을 자신의 동물적 성욕에 복종시키고, 길들이고, 마술을 걸고, 집어 삼키고, 그림 속에 부숴 넣었다. 그는 수많은 밤 동안 그들의 에센스를 다 빼어 먹은 뒤 피가 말라버리면 그들을 버렸다.”
“그가 여자들을 좋아한 것은 그들이 그에게 불러일으키는 동물적 성 충동 때문이어었다. 여자들은 자신들의 신비를 토해내야만 했다. 신선한 육체를 좋아하는 그는 그들을 서둘러 죽였고, 강간했으며, 영양분으로 섭취했다. 피와 정액으로 범벅이 된 그들을 자신의 화폭에 열광적을 되살렸으며, 그들에게 자신의 폭력을 받아들이기를 강요했고, 그들이 불러일으키는 성적 힘이 무뎌졌을 때는 가차없이 그들에게 죽음을 선고했다. 그가 섹스와 그림에서 끌어내는 관능은 본질이 동일 했다.” - 마리나 피카소
피카소미술관을 나오며 곰곰이 생각해 봤다. 피카소는 20세기 최고의 예술가였고 평화운동 등에 적극적인 진보적 운동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가부장주의자, ‘여성비하’주의자였던 것 같다. 피해자에는 아들, 손자 등도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여성비하주의자를 넘어 철저한 이기주의자였다. 그는 자주 말했다. “모든 긍정적 가치는 부정적 희생이 따른다. 아인슈타인의 천재성이 히로시마를 가져왔다.” 과연 그래야만 하는 것인가?
그리스신화에는 하반신은 인간이지만 상반신은 황소인 반인반수의 미노타우로스가 나온다. 피카소는 미로에 갇혀 살면서 주기적으로 제물로 바쳐지는 젊은이들을 잡아먹고 생명을 유지하는 이 괴물에 매료되어 연작을 만들었는데, 그중에는 ‘어린 소녀에게 이끌려가는 눈먼 미노타우로스’가 있다. 이 그림이야말로 피카소를 가장 잘 상징하고 있다. 그는 반은 ‘예술의 신’이었지만, 반은 ‘짐승’이었다.
첫댓글 세상에....
어우 자아도취 예술남
쓰레기
예술하는 여혐남들이 진짜 역겨운게 뭐냐면 여혐을 예술로 포장을 존나 열심히함
역겨운새끼
퉤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네
역시 예술남.. 예술하는 남자 존나 시름
포장남이엇군....ㅡㅡ
아 역겹다
내가 이래서 피카소 안좋아함.. 작품도 작가의 삶이 영향을 미치니 평가와 별개로 안찾게 되더라
양심없는 변태새끼였구만
아 ㅅㅂ ................. 진짜 역겹다 저런 사람들에게 여성은 철저히 도구로서 소비되네 ; 여자랑 섹스 없으면 예술 못해? 그런 것도 예술이라 할 수 있는지.. 심지어 예술을 빙자한 폭력인데
개쓰레기새끼네;;
너무 자신한테 취해있네 ;
어 뭔가 시선으로부터 <- 이 소설이 질로라는 저 피카소의 부인에게서 영감을 받아서 쓴 소설같다! 대가의 여자였고 엄청난 가스라이팅에 지지않고 벗어나와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구 화가로 성공해서 큰 가족을 꾸린이야기! 진짜재밌게읽구 하와이도 가고싶어졌는데....
와 교육적 자료로 써야겠네 이런건 참,,,,역사가 더러움을 증명하는군,,,쯧쯔
헐...처음 알았어
ㄱㅅㄲ 였네…
동시대 미술가들도 피카소랑 싸우고 지지고 볶고 그랬음 ㅋㅋㅋ 성공에 미친넘이라고 욕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