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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
그는 10년간 북한 최상위 로열패밀리 생활을 하다 지난 82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우연한 기회에 대한민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북한의 로열 패밀리였던 그는 망명 이후
1984년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
KBS 수습15기로 입사하여 국제방송국 러시아어 방송 담당 PD가 됨.
서울올림픽이 열리자 이씨는 러시아어 전문가로 활약함.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평범하게 살다가 어느 순간부터 북한의 실상들을 여러모로 폭로하기 시작.
한국에서 김씨 정권을 비판과 사생활까지 모두
언론에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당연하게 북한의 눈에 거슬릴 수 밖에 없었다.
빡친 김정일은 이한영
사살 명령을 내린다.
그래서 1997년 2월 15일 토요일
무장공비 2명이 한국으로 들어온다.
그때 당시 이한영은
지인과 술집에서 술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오후 9시 45분 경
암살조는 이한영이 퇴근하는 시간에 맟춰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차량을 대기시키고
미리 이한영이 사는 아파트 14층에 올라가 대기한다.
이때 이한영의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무방비 상태로 술병과, 딸에게 줄 초콜릿 바구니를 들고 귀가하는 중이었다.
이한영이 내리는 순간 문앞에 서있는
간첩들은 나타나 이한영에게 다가가 "나가서 이야기나 잠시하자. 함께좀 가자"등 대화를 계속했다.
이한영은 이때 무언가를 감지하고 순간적으로 북에서 내려온 간첩임을 눈치채고
이한영은 공비 2명과 몸싸움을 시작한다.
하지마, 이웃들은
처음에는 부부싸움하는 소리인 줄 알고
신경쓰지 않았다.
이때 주민 한분이 현관문 구멍으로 복도를 봤는데
당시 공비 한명이 소음기가 달린 권총으로 이한영을 암살하고 있었다.
총을 목격한 박씨는 즉시 112와 119에 신고
하지만, 이미 공비들은 아파트 비상계단으로 도주했다.
이한영은 주민들에 의해 119 구급차로 경기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 차병원 응급실로 옮겨져
즉시 수술해서 중환자실로 입원했는데
사건 발생 열흘 후, 중환자실에서 숨을 거두었다.
1997년 2월 27일 36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리고 이 사건에 투입됐던 간첩들은
안기부, 보안사, 경찰들 모두 투입이 되지만,
체포에 실패한다.
1997년 2월 16일, 김정일의 처조카로 남한에 귀순한 이한영씨가 분당신도시 자택에서 벨기에제 브라우닝 권총으로 피살.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이한영씨 피살사건은 두명의 북한 특수공작원이 저지른 것이라고 발표했다.
유해는 경기도 광주시의 공원묘지에 묻혔다.
1997년 의문의 피살을 당했는데, 당시 죽기 전 의식이 있을 때, 불안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간첩"이라고 말했던 바도 있고,
피살 현장에서 북한제 권총에서 사용되는 탄피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북한에서 보낸 간첩에 의해 피살된 것이 확실해 보인다.
당시 공안당국은 북한 사회문화부 소속 테러 전문요원인 일명 '최순호 조'가 암살을 저지른 것으로 결론지었다.
이것을 모티브로 한 영화가 '의형제'
https://cafe.daum.net/ok1221/6yIR/787722?svc=cafeapi
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자 국정원은 “이 씨가 김정일 로열패밀리를 저술해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라고 책임을 피했으나 유가족은 “국가에 막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국민에게 실상을 알리려 한 고인의 뜻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불복하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이 사건은 발생 11년 만인 2008년 국가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았다. 2008년 8월 대법원은 이 씨가 피살된 사건과 관련해 국가가 유족에게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이 씨의 아내 김모 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9699만 원을 지급하라는 원심을 확정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 씨도 국가안전기획부의 만류를 무시하고 언론 인터뷰와 TV 출연 등을 통해 노출한 책임이 있다며 국가 책임을 60%로 제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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