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www.fmkorea.com/6781713043
1637년 2월 24일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항복하고
청나라 황제를 향해 삼궤구고두례를 행하며
명나라를 버리고 청나라를 섬길 것을 천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삼전도란, 현재 석촌호수 부근으로,
이 당시 잠실은 여의도 같은 하중도(강 사이의 섬) 였으며
신천강보다 송파강이 유량이 훨씬 많았고
삼전도는 바로 이 송파강의 나루터였다
(현재 송파나루 지명의 위치도 송파강에서 유래함)
아무튼, 청나라는 삼전도에서 항복한 인조에게
"조선의 왕이 항복한 자리에 청나라 승리를 기념하는 비석을 세우라"
"시발...... ㅇㅇ;"
청나라의 요구대로 삼전도의 굴욕이 있었던 자리에
비석을 만들기 위해 공사를 시작했는데
청나라 사신들이 올때마다
이 공사가 제대로 이뤄지는지 감독하는게
관례가 되었다
"저거 비석 기초가 너무 작은데 더 큰 것으로 바꾸셈"
"(시발롬들 그럼 첨부터 크기를 정해주던가..)”
덕분에 아직도 삼전도비에 가보면
옆에 이전에 만들다 버려진 귀부 (비석받침돌)가 함께 있다
삼전도비의 내용을 쓰는 것도 난관이었는데
"비석에 들어갈 내용은 조선에서 직접 지어서 쓰라"
"....."
청나라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청나라 황제를 찬양하고 인조를 욕보는 글을 써야하니
비석에 들어갈 글을 지을 사람을 구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승리투수임에도 허용투수로 기억되신 분..)
비석에 들어갈 글을 지어 올리면
가문 대대로의 수치가 될 것이 뻔허다 보니
"갑자기 글이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팔이 마비가 되어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갖은 핑계를 대고 신하들은 발을 빼기 일쑤였고
겨우 겨우 비문에 들어갈 글을 쓰고
청나라에 확인까지 받아오게 된다.
이 삼전도비는 이후 나름 핫플레이스가 되어
"조선에 왔으니 삼전도비는 꼭 보고 가야지 ㅇㅇ"
청나라 사신들을 꼭 들러서
탁본을 떠가는 것이 관례가 되었으며
혹시나 비석이 손상되었다가
청나라에게 책잡힐 것이 두려워
조선은 비석 주변을 잘 관리하고 보존해야만 했다
그렇게 약 250년이 흐르고..
(1894년 청일전쟁)
(고종)
"뭐?? 청나라가 졌다고???"
와장창 1차 사망
고종은 그 즉시 250여년 눈엣가시였던
삼전도비각을 무너뜨리고 비석을 귀부에서 뽑아
바닥에 내동댕이 쳐버린다
(명줄이 긴지 그 와중에 부서지지는 않음)
그리고 20년이 지나 한일합방이 되고
"엥 이거 뭐여, 뭔 큰 비석이 하나 쓰러져 있네?"
"뭐여 내용 보니깐 조선의 치욕적 역사네??
이걸 이대로 둘 순 없지 ㅋㅋㅋ"
(개같이 부활)
한반도 각지의 유물을 조사하던 총독부의 눈에 띄어
삼전도비는 다시 세워지고 (1차 부활)
목책을 둘러 보존하고 보물 164호 (ㅂㄷ) 로 지정된다
삼전도비는 이후 그 유명한 을축년 대홍수에도
잠기기는 했으나 쓸려가지는 않았으며
6.25 전쟁통에서도 손상없이 무사히 살아남았다.
1955년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가 지정한 보물을
일괄적으로 국보로 격상했고
이 와중에 삼전도비 또한 국보 164호가 되어버린다 (ㄷㄷ)
"야 잠깐만,,, 164호 이거 뭐냐???!?"
뒤늦게 국보가 된 삼전도비를 인지한 이승만 정부는
국보에서 지정해제한 것도 모자라
비석을 뽑아버리고
다시 땅속에 묻어버린다 (2차 사망)
하지만 시행한지 5년도 되지 않아
대홍수로 토사가 깎여나가며
기껏 묻어놓은 비석이 다시 노출되었고 (…)
심지어 비석이 있던 자리가 물에 잠겨버렸다
"야 아무리 그래도 문화재인데 물속에 두는건 좀.."
이에 물에 잠길 우려가 없는
남쪽 석촌동으로 비석을 옮겨 다시 세운다 (2차 부활)
원래 있던 자리는 아니지만 새로운 자리에서
30년간 존재하던 비석은 새로운 문제를 일으켰는데
옮길 당시만 해도 허허벌판이었지만
주변이 개발되며 주거지로 탈바꿈 했고
국보에선 탈락했지만
여전히 사적 제 101호로 분류되어
주변 거주민들의 재산권 행사에도 제약이 되었기 때문
게다가 뭐 대단한 유적이면 모를까
치욕의 상징이니 비석을 치워달라는
민원은 끊이지가 않았고 결국...
2007년 스프레이로 훼손되는 사건이 터진다 (3차 사망)
하지만
?? (3차 부활)
문화재청의 노력으로
삼전도비는 다시 원형을 되찾았으며
참고로 이때의 경험은
작년 말에 발생한 경복궁 담벼락 훼손을 복구하는데도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
해당 사건 이후 송파구청은
미뤄두던 삼전도비 이전을 서둘렀으며
원래 위치가 석촌호수가 되어버린 관계로
거주민이 없는 최대한 원래 위치와 가까운
지금의 장소로 이전하게 되었다
삼전도비는 오늘도 자이로드롭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그 태생과는 관계없이
삼전도비의 내용은 한문 외에도 만주문자 몽골문자
3개의 문자로 같은 내용이 쓰여져 있기 때문에
17세기 당시 해당 언어와 문자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아주 소중한 필수 사료로
여전히 사랑 받고 있다 (동양의 로제타석..)
(설마 청나라는 이것까지 계산한 것일까..?)
첫댓글 삼전도비는 오늘도 자이로드롭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 나도 이부분에서 터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언어학적으로는 중요한 사료라니까 할말은 없다만… 질기다 질겨ㅋㅋㅋㅋㅋㅋ
런도 못한 조도 삼전도비처럼 땅속에서 매일 자이로드롭 비명소리 들어야하는디....
빡취네 ㅋㅋㅋㅋ
아 글 너무 재밌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익하고 재밌고 다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