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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966년에 쓰여진 아랍의 책인 '창세와 역사서' 에는 '중국에 동쪽에는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땅이 기름지고 물이 좋을 뿐 아니라 주민의 성격 또한 양순하기 때문에 떠나려 하지 않는다.' 라고 써있다.
2. 아랍의 책인 '창세와 역사서' 에는 '신라인들은 가옥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하며 식사 때는 금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한다.' 라고 적혀있다.
3. 발해에도 독자적인 왕호가 있었다. 왕을 속칭 '가독부' 라고 불렀고 대면하여서는 '성' 이라고 불렀다. 왕에게 올리는 글에서는 '기하' 라고도 불렀다.
4. 발해는 여성의 권리가 강한 편이었다. 고구려, 고려에도 있던 창녀가 존재하지 않았다. 일부일처제가 확립되어 오직 한 명의 아내를 두었고 첩을 들이지 않았다. 만약 첩을 두었을 경우 아내가 그 첩을 죽이기 까지 했다.
5. 현재 해외에 유출된 우리 문화재는 15만 점 정도로 집계되고 있다. 이 중 43%인 6만 6천여 점이 일본에 있는데 일제강점기 시절 많은 문화재가 약탈 및 강탈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에는 일제강점기에 국보로 지정되어 아직까지도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있는 우리의 문화재도 존재한다.
6. 한국 이름이 써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세계지리서인 알 이드리시의 '천애횡단을 갈망하는 자의 산책' 에는 '그곳(신라) 주민들은 개의 쇠사슬이나 원숭이 목줄도 금으로 만든다.' 라고 쓰며 신라를 매우 부유한 곳으로 표현했다.
7.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이전에 건국됐을 가능성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900년 됐다, 800년 역사다, 주몽이 나라를 세운 게 아니고 왕위를 이어받았을 뿐이다는 기록도 있다. 중국 기록에는 기원전 37년 이전의 고구려에 대한 기록도 있다.
8. 이성계는 1393년에 국호가 조선으로 정해질 때까지 고려의 왕이었다. 이때에 이성계는 권지고려국사라 불렸다.
9. 조선 초기에는 일본이 조선에게 조공을 바쳤다. 실록을 보면 조선왕을 황제폐하, 조선을 상국, 일본을 누방이라고 부르며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이 강성해지자 조공 형태의 무역은 사라졌다.
10. 일제강점기에 많은 여성들이 납치 또는 속임수로 일본군 위안부가 되었다. 위안부 피해자에는 조선인들이 가장 많았지만 조선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만인, 중국인, 필리핀인, 인도네시아인, 베트남인, 미얀마인과 심지어 일본인과 네덜란드인 까지 있었다. 위안소는 일본의 침략이 있었던 거의 모든 지역에 만들어진 것이다.
11. 북한의 김일성도 독립운동을 했다. 특히 1937년 보천보 전투가 김일성이 이끈 일로 유명하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하지 않은 일도 창작하는 등 그의 항일운동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역사왜곡을 하고 있다.
12. 청나라도 조선을 자주국으로 보았다. 일본이 강화도 조약의 '조선은 자주국이다.' 라는 조항을 보여주자 청은 조선은 원래 그런 나라이니 아무 문제 없다고 하였다. 서양 선교사가 조선에서 천주교 포교 허락을 청에게 구하자 조선은 자주국이니 우리가 개입할 수 없다고 하였다.
13. 대한제국의 '대한'은 삼한을 모두 아우르는 '커다란 한'이라는 뜻이다. 고종은 조선왕조의 영토는 삼한을 통일한 고려의 땅을 바탕으로 조선에 들어와서 좀 더 넓힌 것인 만큼 삼한을 모두 아우른다는 의미에서 대한이라는 명칭이 적절하다고 여겼다.
14. 삼국시대에도 역사책을 편찬하였다. 고구려는 유기 100권을 편찬하였으며, 영양왕 때 이문진이 이를 간추려 신집 5권을 편찬하였다. 백제에서는 근초고왕 때 고흥이 서기를, 신라에서는 진흥왕 때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였지만 지금은 모두 전해지지 않고 있다.
15. 조선 고종 당시 경복궁은 5백여동의 건물이 있는 거대한 궁궐이었다. 그런데 일제가 4600여 칸의 건물을 철거하여 해방 직후에는 겨우 7개 동 남짓만 남았다. 1989년부터 복원을 진행하였으나 현재 경복궁은 고종 당시의 4분의 1정도 밖에 안 된다.
16. 1000년 전 한국 사람들은 '주령구' 라는 14면체의 술게임 용 주사위를 만들어서 술자리를 즐겼다.
17. 이봉창 의사는 3.1 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무슨 이유로 일어난 운동인지 몰랐을 정도로 조선인으로의 민족의식이 낮았고 일본 황국 신민이 되고 싶어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일본어가 유창하고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어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현실에 분노하여 독립운동가가 되었다.
18. 거북선은 임진왜란 훨씬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태동이 거북선과 왜선의 전투를 보았다는 기록도 있었다. 이미 고려시대에는 거북선과 비슷한 과선과 검선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발명한 게 아니라 기존의 거북선을 새로 개조한 것이다.
19. 이성계는 왕으로 즉위 후 나라 이름을 뭘로 바꿀지 신하들과 의논하였다. 그 결과 화령과 조선이 나왔는데 이 중 무엇으로 할 지 그들 스스로 정하지 않고 명 황제에게 정해달라 하였다. 명 황제는 조선으로 정했고 결국 1393년 국호를 조선으로 고쳤다.
20. 발해 3대 왕 문왕의 존호는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이었다. 대흥과 보력은 발해의 연호이고 효감은 유교용어, 금륜과 성법은 불교용어이다. 이를 통해 발해 문왕이 무력(武力)이 아닌 불법(佛法)으로 나라를 통치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21. 야인시대로 유명해진 '심영'은 본명이 심재설이고 배우였다. 일제강점기 그는 친일 연극을 하다가 광복 후 좌익 계열 공연을 하였다. 그는 1946년 김두한에게 하복부에 총격을 맞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전 월북해 1971년 북한에서 죽었다.
22. 첨성대는 647년 선덕여왕 때 세워진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실제 천문대였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그래서 천문대가 아니라 다목적 관측대, 수학적 상징물, 불교 우주관인 수미산 보영을 본 단 제단이라는 등 여러 주장이 제기되었다.
23. 광복 직전 남북한 총인구는 2500만 명 정도였으나 1953년 휴전 이후 출생률이 갑자기 높아져 베이비 붐이 나타났다. 1955~1960년 평균 출산율은 6.3명에 달해 1955년 2150만 명의 남한 인구가 1960년에는 2500만 명을 넘었다.
24.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온 때는 남북국시대다. 기독교 종파 중 하나인 네스토리우스교가 경교라는 이름으로 발해와 통일신라에 들어왔었다. 실제로 만주와 경주에서는 십자가나 성모마리아상이 발견되었다.
25. 고구려에는 대장장이 신이랑 수레바퀴 신도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통해 고구려에서는 대장장이나 수레바퀴 장인 같은 기술자도 대접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6. 3.1운동 당시 유관순 열사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살해당하고 만세시위의 주동자로 잡혀서 고문을 받았었다. 그녀는 징역살이 중 1920년 19살의 나이로 죽었는데 당시 이화학당의 교장과 선생이 형무소로부터 받은 유관순의 시체는 토막나있었다고 한다.
27. 조공을 바친다고 속국이 되는 것이 아니다. 조공은 일방적인 상납이 아니라 일종의 무역이었다. 고구려 같은 우리 역대 국가들이 조공을 한 것도 무역을 위해서였다. 조공을 바친다고 속국이라면 청과 조공 형식으로 무역한 대영제국도 속국이라고 해야한다.
28.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에는 우리나라에서 오로라를 본 기록이 매우 많이 기록되어있다. 과거에는 지구 자기장의 북극이 한반도에 가까웠기 때문에 오로라를 볼 수 있었다. 현대에도 태양활동이 활발할 때 매우 드물게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한다.
29.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약 4만 기 정도가 있다고 한다. 이는 전 세계 고인돌의 무려 40%나 되는 양이다.
30. 고구려의 주몽설화와 부여의 건국신화인 동명설화는 매우 비슷하다 고구려가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것을 보아 고구려가 부여의 설화를 베껴 쓴 것으로 보인다. 당시 부여족에게는 공통적인 건국설화가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1. 명량해전 때 일본수군이 몇 척인 지는 기록에 따라 다르다. 당시 이순신 장군이 직접 쓴 난중일기에는 130여척이라고 나온다. 당시 기록인 선조실록에도 130여척이라고 나온다. 333척이란 숫자는 그로부터 약 200여년이 지난 이충무공전서에 처음 나온다.
32. 고조선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전 7세기 또는 5세기의 상황을 적은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의 '관자'라는 책에 있다. 여기에는 발조선이라는 이름으로 제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33. 고구려를 연개소문이 집권하는 동안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중국에서 연개소문은 두려운 인물로 전해졌고 중국의 전통극인 경극에서도 당 태종을 위협하는 인물로 등장하게 되었다.
34. 우리나라 역사에도 동성애자들이 존재한다. 고려의 7대 왕인 묵종과 26대 왕 충선왕, 31대 왕 공민왕, 조선 세종의 며느리인 순빈 봉씨 등이 있었다.
35. 한국전쟁 이전에도 남북한은 38선을 경계로 소규모 전투를 벌였다. 북한은 1949년 1~9월에 38선 이북에 대한 침략이 432회 있었다고 밝히고 있고 남한 역시 한국전쟁 이전까지 침공 빛 불법사격 횟수가 874회 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36. 현재 국방부에서 주장하는 한국전쟁 당시 소녀병 수는 23명이나 6.25참전소년병전우회에 기록된 소녀병 수는 80여명, 국방부 군적에 남아있는 소녀병 수는 467명, 군번이 없다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하는 소녀병 수는 2400여명에 달한다.
37. 1902년 헝가리인 가운데 최초로 고종 황제를 알현한 것으로 알려진 헝가리 신부 '버이 삐떼르'가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펼치며 당시 시대 상황과 자신의 느낌을 적은 일기 및 저서에는 한국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한국은 극동의 가장 매혹적인 지역이다.', '선량한 일본의 애국자임은 틀림없을지 모르겠으나 통감(이토 히로부미)은 잔학하고 냉혹한 인물이었다. 그는 결국 그가 한국인들에게 행한 범죄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일본의 지배와 엄격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국에 대해 영원한 지배를 존속 시킬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침략자들보다 우수하며 한국은 다시 주권을 찾을 것이다.', '나는 한국과 한국인이 미래에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항상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38. 충무공 이순신 후손들의 다수가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충무공 이순신 후손들 중 10명이 건국훈장을 받았고 1명은 건국포장을 받았다.
39. 조선은 강간죄에 엄격한 나라였다. 미성년자를 겁탈한 경우 사형에 처하였다. 강간미수도 기본 곤장 100대, 유배 1000리였고 노비를 겁탈하는 것도 강간으로 보고 처벌하였다.
40. 조선에도 이슬람교인(회화교인)들이 정착해서 살았었다. 하지만 회화교인들이 조선문화에 동화되어 살려고 하지 않자 엄격하게 다스려 화회교인들이 조선에 융화되지 않을 경우 처벌하였다. 이로인해 불교, 천주교, 동학은 완전히 없애는데 실패하였으나 세종 이후로는 화회교에 대한 기록이 없다.
41. 조선시대에는 남성도 똑같이 살림을 하였다. 박지원도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들에게 직접 밥을 해먹였고 박제가와 정약용은 요리법을 공유하는 사이였다. 제사상도 원래는 남자들이 직접 차렸고 딸이 지내는 경우에 딸이 차리는 방식이었다. 현재 제사문화와 가정문화는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의 가정문화가 들어오면서 변하기 시작하였다.
42. 조선에서는 장애인도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하였다. 능력만 있으면 관리가 될 수 있었고 벼슬길에도 오를 수 있었다. 실제 조선의 인재 중에는 장애인도 많았다. 세종은 장애인에게 환곡을 우선으로 베풀고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명통시' 라는 시각장애인 고용 기관이 있었고 다양한 전문직을 만들고 그들을 고용함으로써 자립을 이끌어갔다. 또한 장애인 보조도우미를 두어 그들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였다. 장애인 부양 가족에게는 병역을 면제하여주었고 장애인이 살해된 고을은 단계를 강등하거나 장애인 학대에 대해서는 중죄로 다스려 장애인 차별을 방지하였다.
43. 강원 평창군 하리 유적지에서 발굴된 비파형동감 주인 청동기제사장 인골은 20대 여성으로 밝혀졌다. 또한 단군왕검은 제사장이었고 한국식 전통 샤머니즘은 모계 세습형태를 띄며 철저히 여성중심적인 형태를 보이기에 단군할아버지가 아닌 단군할머니의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이다.
https://twitter.com/krhistory?s=20
여기서 참고 많이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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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존잼ㅎㅎㅎ!!!!!!
와우 이봉창 의사 …
이야기 다 흥미롭다
넘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