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fmkorea.com/6878122167
(우리나라의 국새)
도장은 동아시아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생활용품 중 하나이다.
도장은 주인의 권위, 직책, 확인 등의 여부를 나타내주는 중요한 생활용품으로써
우리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물건으로 자리 잡았다.
역사 속에서도 도장이 찍힌 흔적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군주의 이름으로 국가의 공문서에 찍힌 옥새나
각종 동양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낙관까지
도장을 찍는 문화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던 듯하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에서 도장 문화는 어떻게 시작했을까?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바뀐 것 하나 없이 그대로였을까?
(한위노국왕 금인(漢委奴國王 金印). 후쿠오카시 박물관 소장.)
이 도장은 일본 후쿠오카현에서 출토된 한위노국왕 금인이다.
후한서의 기록에 따르면 서기 57년 후한 광무제가 일본의 노국에서 온 사신을 통해
노국왕에게 금인을 하사했다고 하는데, 이 금인이 19세기 후쿠오카에서 출토된 것이다.
아무튼 이 도장은 동아시아에서는 고대부터 도장을 중요한 물건으로 다뤘다는 사실을 보여준ㄷ...
여기서 잠깐!
생각해 봐야 하는 점 한 가지가 있다.
다들 잘 알다시피 종이는 후한의 채륜이 처음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채륜이 종이를 발명한 시기는 기록상 105년으로 알려져 있다.
즉, 57년에 만들어진 저 도장은 종이에 찍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쯤에서 "그러면 도장을 종이 대신에 어디다 찍었는데?"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종이가 없던 시대에 도장은 어떻게 제 역할을 다했을까?
이 의문점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는 유물은 우리 한반도에서도 많이 출토되었다.
(평양의 낙랑토성에서 출토된 낙랑군의 봉니)
이건 봉니(封泥)라고 부르는 진흙 덩어리 유물이다.
모양새만 보면 찰흙에다가 글씨를 새긴 것처럼 생겼는데,
사실 봉니는 도장을 진흙에 찍고 남은 자국이 굳어서 발견된 유물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봉니는 평양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었으며,
모두 고조선 멸망 이후 한나라가 설치한 낙랑군의 유물로 확인되었다.
(한위노국왕 금인과 금인에 인주를 묻혀 찍은 모습)
다시 한위노국왕 금인으로 잠깐 돌아와서 도장의 글씨를 잘 살펴보자.
통상적인 옥새는 글자가 빨간 양각으로 새기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건 글씨가 글자가 하얀 음각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부분은 봉니를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봉니의 글씨를 보면 글씨가 양각으로 솟아있는 형태이다.
즉, 음각으로 된 도장을 진흙에 찍어야 진흙이 빈 부분을 메우며 올라와서
새겨진 봉니가 양각 문양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장이 찍힌 봉니는 어떻게 활용되었을까?
종이가 있었다면 종이에 직접 도장을 찍으면 그만이지만
종이가 없던 시대에 흙 조각에 불과한 봉니가 어디에서 어떤 역할을 했던 것일까?
이 의문점에 관해서는 도쿄국립박물관의 봉니 소개 영상에서 나름대로의 추측을 할 수 있다.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봉니의 뒷면에는 여러 줄로 파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위 영상에서는 이 사실에 기반해 당시 봉니가 어떻게 사용되었을지에 관한 시연을 해봤다.
먼저, 종이가 없던 시대인지라 모든 문서는 요런 목간이나 대나무 조각을 이은 죽간에 적었다.
고대의 어떤 관리가 저 공문서를 작성해서 도장을 찍는다고 해보자.
목간에 내용을 다 적었다고 해서 관리의 임무가 끝인 것은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문서는 함부로 훼손이나 조작되지 않게 잘 관리되어야 할 것이다.
저 목간 또한 내용을 보호하고 작성자의 신분을 파악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목간과 똑같은 크기의 나무판 하나를 준비한다.
그리고 사이사이 만들어진 틈으로 실을 엮어서 위쪽 목간과 아래쪽 목간이 묶이게 한다.
이렇게 두 목간을 묶는다면 공문서의 내용은 끈을 잘라내지 않는 이상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목간을 누가 썼는지 그 신분을 보장할 무언가도 있어야 할 터.
이를 위해 관리의 도장을 찍는다면 누가 이 문서를 작성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안에 진흙을 채워 넣고 도장을 찍으면 문서의 봉인이 완성되고,
우리가 아는 안전장치로써의 봉니가 완성되는 것이다.
(원나라의 화가 조맹부의 그림 작화추색도.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그림을 감상한 사람이 남기는 낙관 배관인이 많이 보인다.)
이렇듯 도장은 봉니와 종이 등 다양한 소재를 통해 제 몫을 다했다.
봉니를 만드는 문화는 도장을 종이에 직접 찍는 방식이 보급되면서 차츰 사라졌다.
그러나 봉니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도장 문화가 초반에는 다른 방식으로 시작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첫댓글 와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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