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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전도사> 세계교회사는 교리사의 관점에서 보시면 아주 유익합니다. 인간의 성경해석이 어떻게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 왔는가를 보면서 성경해석에 대한 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또한 자기의 독단적인 성경해석에 빠질 위험성이 누구에게나 상존하기 때문에 교리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이 논문 역시 교회사에 대한 하나의 견해입니다.다른 견해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역사 기술이란 "가위와 풀의 역사"라는 명제가 적용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교회사는 각 저자의 신학적 배경이 작용하기 때문에 더 예민한 경우일 수 있습니다.
세계 교회사 정리
Ⅰ. 고대 기독교
1. 속사도 교부들
사도시대를 뒤잇는 신학자들을 속사도 교부들(사도적 교부들)이라 일컫는다. 이 시기의 교부들로서는 로마의 클레멘트, 헤르마스, 소아시아의 이그나티우스, 폴리캅, 파피아스, 알렉산드리아의 바나바가 있다. 그런데 이 세 지역의 신학은 각각 나름대로의 특징(다양성)을 나타내면서 복음을 증거하였다.
첫째, 로마의 속사도 교부들의 신학은 실천적, 윤리적인 방향으로 나갔는데, 클레멘트 같은 교부는 교회 문제를 복음의 차원이 아닌, 덕목의 차원에서 해결하려 하였다. 여기서는 사유적인 사상이나 신비적인 연합 등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실제적인 순종을 중요시하였다. 서방 기독교는 이것을 발전시켜서 복잡한 참회제도를 만들었다. 교부들중 클레멘트의 직제론이 중요한데, 감독의 베드로 승계(Peter-Catholic line)나 감독들의 사도적 권한과 권위의 승계에 대한 주장이 없이 회중의 지지를 받는 민주적인 절차가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 소아시아 교부들의 신학은 기독교를 도덕적 가르침으로 보지 않고 구세주와 연합함으로 불멸을 획득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여기서는 교회 연합으로서 성만찬이 강조된 반면, 죄와 구원의 문제는 약화되었다. 교부들중 이그나티우스는 직제론에서 중요한 공헌을 했는데, 그는 교회일치의 원리로 감독중심의 “감독-장로-집사”의 삼중직에 의한 교회일치를 내세웠다. 그의 삼중직론은 에큐메니칼 직제론(BEM문서)의 바탕이 되었다.
셋째,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의 신학은 사변적이고 알레고리칼적인 성서해석으로 특징 지워지며 구약의 역사성과 예수님의 육신적 삶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지역별로 신학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속사도 교부들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인성을 강조했고, 삼위일체와 성만찬 중심의 예배 공동체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통일성이 있다.
2. 복음의 변증(희랍의 변증신학자들)
2-3세기의 변증신학은 당시 기독교가 박해를 받는 상황 속에서 등장했는데, 아리스티데스, 순교자 저스틴, 아테나고라스, 터툴리안, 오리겐 등을 들 수 있다. 변증 방법에 두 가지 부류가 있는데, 첫째는 복음과 Greco-Roman World의 접촉점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기독교가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부류와, 둘째는 복음을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의 Common ground가 있다는 입장에서 기독교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저스틴 같은 순교자는 후자에 속하는데, 그에 의하면 희랍철학이 말하는 로고스가 이미 구약의 족장들과 예언자들에게 나타났고,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육신하였다고 말한다. 따라서 희랍의 철학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시가 부분적으로 나타났고, 신약성서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하게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반면, 터툴리안은 전자에 속하는데, “예루살렘과 아덴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말처럼 성경과 희랍철학 사이의 그 어떤 공통지반이나 접촉점도 인정하지 않고 복음과 기독교의 우월성을 주장하였다. 기독교 사상사에서 변증신학자들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이들이 기독교 신학을 조직화하고 로고스 이론을 정립하는 과정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과 고전적 문화 사이에 대화를 갖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로고스 이론이 철학적인 의미를 내포한 채 발전함으로써 삼위일체 논쟁과 기독론 논쟁과 같은 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3. 이단들의 도전에 대한 기독교의 응전
A.D 100-310의 시기에 여러 이단들이 복음과 교회를 위협했다. 이 이단들은 기독교적 요소를 어느 정도 내포하면서 기독교의 복음으로부터 벗어난 가르침을 가르쳤는데, 크게 5개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Judaism으로 그리스도는 시작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으나 율법을 완수하는데 있어서 도덕적으로 특출했기 때문에 아들로 인정되었다(에비온주의)는 경향의 이단이다. 이들은 유대적 배경에 의해 예수를 바라보았으며, 양자론적 경향을 취하였다.
둘째는 Gnosticism인데, 인간의 영혼이 몸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영적인 세계에로 올라가려는 직관적 지식이 ‘영지’(Gnosis)이며 이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친다. 이들은 기독교의 창조신앙, 구원론, 성육신, 부활교리를 반대하며 가현설을 주장하였다.
셋째, Marcionism으로 이들은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단으로 구약전체와 바울서신과 누가복음 안에 있는 유대적 요소 등 율법 모두 배제한 채, 바울의 ‘순복음’만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God the creator와 God the redemer 사이의 연속성을 깨뜨렸다.
넷째, Montanism으로 이들은 성령의 계시를 강조한 나머지 신약성경 이외에도 새로운 계시가 있을 수 있으며, 시한부 종말론을 역설한 나머지 신약성경이 주장하는 모든 윤리적인 삶을 축소시켰다.
다섯째, Monarchianism인데, 이것은 영지주의 계통이 다신론을 주장한 것에 反하여,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 사이의 연속성을 깨뜨린 마르시온주의에 反하여, 또 하나의 신을 상정할 수 있는 로고스 기독론에 反하여 나타난 사상이다.
이상의 이단들의 도전에 대응하여 당시 지중해 세계의 보편교회는 “사도적 권위”라는 통일성에 의해서 응전했다. 그 내용으로 첫째, 이레네우스와 터툴리안(Apostolic Kerygma)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바, 이들은 무엇보다도 “Apostolic Paradosis(복음)”를 확고히 붙들었다. 둘째, “사도적 계승(Apostolic succession)”을 강조했는데, 로마의 클레멘트는 군주적 감독제도를 언급하지 않고 사도적 계승을 내세웠던 반면에, 이그나티우스는 사도적 계승을 언급하지도 않은 채 감독의 권위를 내세웠다. 그러나 3세기 키프리안에 이르면 “primus inter pares”를 주장하면서 감독직의 연속성을 강조하였다. 즉 감독의 정통성을 지닌 교회에만 구원이 있다는 것이다. 키프리안의 “primus inter pares”와 “사도단의 동료적 연대성”은 동방 정통교회의 교직체제의 기초가 되었고, 개신교의 모든 집단지도체제의 근원이 되었으며, 바티칸Ⅱ가 말하는 “collegiality of the bishop”(감독들의 연대적 책임성)의 뿌리가 되기도 하였다. 셋째, 신약성경의 경전화 과정을 추진했다. 넷째, 신앙과 성경해석의 표준으로 “Regula fidei”(신앙규범)을 만들었는데, 오늘날 사도신경의 핵심이 될 만한 신조로 “고대 로마신경”이라고 부르는 신조들을 많이 만들어서 이단들에 대응했다.
4. 고대 7 에큐메니칼 공의회
고대 지중해 세계의 교회들은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및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사도적 보편교회의 윤곽을 구성하였다. 이들은 보편교회 차원에서 야기되는 신학적인 문제를 이들 대관구의 대표들의 모임에서 논의·해결·확정 지었는데 이 모임이 에큐메니칼 공의회들이었다.
1) 니케아 공의회(325년)는 예수님의 신성문제(삼위일체의 제2위격의 신성문제)로 당시의 보편교회가 분열의 위기를 맞이하여 소집된 공의회로서, 아리우스는 ‘말씀’이 하나님은 아니고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으뜸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반면, 알렉산더는 ‘말씀’이 영원이래로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고 주장했다. 결국 니케아 공의회의 결과 아리우스파에 반대하여 성부·성자의 ‘동일본질(homoousios)’에 따른 삼위일체 교리가 확정되었다.
2)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는 “말씀(Word)의 신성을 거부함으로써 성령의 신성마저도 거부하는 아리우스주의자들”에 반대하여 니케아 공의회의 삼위일체론 중 “성령을 믿사오며”(성령의 신성문제)라는 구절을 첨가하여 삼위일체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특히 여기에서 결정된 신조에는 교회에 대한 가장 고전적인 에큐메니칼적 定義가 이루어졌는데, 사도적 신앙의 내용인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라는 네 개의 형용사에 의해서 교회가 정의되고 있다. 이 교회에 대한 정의는 1982년 이래로 WCC가 ‘filioque’ 없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수렴하여 이 신조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을 복음과 더불어 사도적 신앙의 중심내용으로 보고 있다.
3) 에베소 공의회(431년)는 예수의 인격(person)에 대한 기독론 논쟁에 기인하였다. 당시 지중해 세계는 알렉산드리아의 시릴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logos+flesh(말씀과 육신의 결합, 로고스에 강조점을 두고, 성육신 할 때 육체는 rational soul없이 그냥 성육신한 것에 불과하다하여 신성에 강조점을 둠) 기독론과 안디옥 계열의 네스토리우스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logos+man(말씀과 인간의 결합, two person의 구별과 순수한 인간성을 강조하려는 경향) 기독론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에베소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의 기독론을 정죄하고 시릴의 기독론을 받아들였다. 알렉산드리아 계통은 로마의 터툴리안과 더불어서 “말씀-육신”의 “속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를 받아들여 플라톤적인 경향으로 치우치는 위험성을 극복하였다. 에베소 공의회에서는 또한 펠라기우스적 구원론을 반대하고 어거스틴적인 은총과 믿음에 의한 구원론을 펼쳤다.
4) 칼케톤 공의회(451년)는 단성론파를 정죄하고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참 하나님이시오 참 인간이시며, 이 두 본성 사이는 ‘혼동되거나 나뉨이 없다’는 양성론”을 확정하였다.
5)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553년)와 6)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680년)는 에베소 공의회와 칼케톤 공의회의 기독론을 변호하고 강화시켰으며,
7) 제2차 니케아 공의회(789년)는 성상숭배를 결의하였다.
이상의 7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교리결정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으로서, 이는 기독교의 정통성 수호에 엄청난 공헌을 해왔다. 이 두 교리는 사도적 전승인 복음을 지키고 이에 근거한 교회의 모든 성서적 가르침들의 기본 틀거리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끝으로 이 7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결정내용은 오늘에 있어서도 세계교회들의 에큐메니칼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로 여겨지고 있다.
Ⅱ. 중세 교회사
1. 중세 교황주의의 발전과정과 교회론
451년경 로마교회는 거의 다른 교회들(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 위에 수위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레오1세는 베드로가 제자들 중 으뜸이고, 이 베드로가 로마 관구의 첫 주교이며, 그 후 로마의 교황들은 이 베드로를 역사적이고 법적으로 승계한 것으로 보아 로마의 교황이 기타의 대관구의 대관구장들 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주장하였다. 600년경 그레고리 1세까지만 해도 아직 로마의 교황이 보편적 수위권을 행사할 수 없었으나, 800년경에 이르면 로마의 교황이 보편적 법적 수위권을 누린다. 그레고리 7세(힐데브란트, 1073-1085 : 독일 헨리4세를 카노사에서 굴복시킴)는 교황만이 성직 수여권을 갖고 있으며 파면권을 행사할 수 있고 교황은 황제도 퇴위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레고리 7세에 이어 이노센트 3세(1198-1216)에 이르면 교황권이 절정에 도달하고,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화체설을 공식화함과 더불어 사제의 권한을 강조하여 베드로의 뒤를 이은 교황과 사도들의 뒤를 승계한 주교들만이 성만찬을 집례할 수 있다고 확정하였다. 1436-1445년의 플로렌스 공의회에서는 7성례전(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채성사, 고해성사, 종유성사, 서품성사, 혼례성사)이 공식화되면서 교황을 피라밑의 꼭지점으로 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확고하게 구축되었다.
중세교회의 교회론을 4개의 형용사의 틀거리를 이용하여 살펴보면, 첫째, 중세교회는 1054년 동·서방 교회가 분열된 이래로 “하나의 보편 교회”가 깨지고 말았다. 서방교회는 로마의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계층질서직 성직체제 아래의 교회를 “하나의 보편 교회”로 보았다. 둘째, 중세 교회는 교회의 “거룩성”을 교회의 머리와 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각 지체들에게 생명(사랑)을 공급하시는 성령의 거룩성에 돌리기보다 교회와 수도원 안에서의 율법적인 도덕적 성취로 보았다. 셋째, 중세교회는 키프리안의 “extra ecclesiam nullus salus”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여 교회의 “보편성”을 로마의 교황체제 아래의 가시적 교회로 생각하였다. 넷째, 중세교회의 사도성은 이레네우스, 터툴리안, 어거스틴으로 이어지는 “사도들의 전승”(복음)보다도 교황과 감독들의 사도적 승계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중세교회는 사도적 전승인 신약 성경에 의한 교회의 사도성보다 클레멘트, 이그나티우스, 키프리안에서 그 싹을 엿볼 수 있었던 감독들의 사도적 승계에 의한 교회의 사도성을 더 강조하였다.
2. 몰락하는 중세기
황금기를 지난 중세 서방교회가 후기로 접어들면서 내리막 길을 걸었는데, 교회 갱신의 징표들이 계속 나타나는 가운데 16세기 종교개혁을 준비하였다. 교황청은 보니파스 8세의 “Unam Sanctam”으로 세속 권력을 교회의 권위에 종속시키려 했으나 결국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겨지게 되고 교황이 둘, 셋 되는 대분열의 상황을 빚어냈다. 이는 교황청의 부패를 반증하고 있으며 중세교황주의 교회의 몰락을 예시하는 징표였다. 이같은 교회의 대분열을 치유하기 위해서 나타난 운동이 협의회 운동(conciliar movement)이었다. 이 운동은 교황의 권위보다 더 높은 협의기구 혹은 의결기구를 구성하자고 주장함으로써 교회갱신에 이바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공의회는 교황을 세우는 일에는 성공하였으나, 결국 교황갱신에는 크게 실패하고 말았다. 몰락하는 교황청과 중세교회의 갱신과 부패해 가는 수도원의 삶을 개혁하려는 운동은 협의회 운동 이외에 신비주의(신비주의는 갱신의 징표이면서 동시에 기독교 몰락의 징표이기도 하다. 계층질서적 사제체계가 땅의 사람들을 매개하는 것이 중세 제도권인데, 신비주의는 이 매체를 반대하고 신적인 불꽃을 통해 하나님과 직접거래를 하려는 경향-기성교회의 제도권 거부), 르네상스 인문주의 운동(‘ad fontes’의 모토를 가지고 인간회복 운동, 나아가서 교회갱신 운동을 펼침, 이 운동이 알프스를 넘어 북쪽으로 넘어오면서 성경과 고대 교부로 돌아가자는 모토로 변하여 종교개혁운동에 기여함), 후기 스콜라주의(영국의 옥캄과 독일의 비엘, 그리고 프랑스의 다이 등 후기 중세기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이 이성을 내세우는 중세의 주지주의에 반대하여 양심과 의지를 강조하는 주의주의를 지향하면서 교회의 도덕적 갱신과 신앙에 호소함), 민족 단위의 국가들의 등장(프랑스, 스페인, 영국, 독일등 민족국가의 등장은 교황청의 중앙집권적인 힘을 약화시킴), 위클리프와 후쓰(이들은 교황을 피라밋의 꼭지점으로 하는 계층질서적 성직체제와 7성례를 통한 은총의 매개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었다)등의 개혁운동이 있었다.
Ⅲ. 근대 교회사 (루터와 칼빈, 재세례파, 반종교개혁)
1. 루 터
A. 배경부터 복음을 재발견하기까지의 과정
㉠ 종교개혁의 역사적 고찰과 사상적 배경
첫째, 로마 가톨릭 전통(어거스틴 수도원, 중세의 안셀름과 아퀴나스, 비엘과 옥캄), 둘째, 후기 중세기 스콜라주의(옥캄의 유명론-예수의 죽음은 인류전체를 위함이 아니라 개별자를 위한 것임, 양심과 자유의지라는 실천이성을 강조-도덕적으로 최선을 다할 때에 하나님께서 은총을 안 주시지 않는다. “facere quod in se est”), 셋째, 르네상스 인문주의(인간의 존엄성과 탁월성을 강조, 신인협력설적 구원론), 넷째, 신비주의 운동(중세의 7성례와 계층질서적 성직체제를 통한 은총의 전달에 대해 반발한 교회 갱신의 징표, 에로스 동기, 신비주의는 좌경화 운동과 경건주의에 영향을 줌), 다섯째, 민족주의 국가의 대두(교황 중심적 교회 획일주의에 반대, 단테의 「왕정론」, 마르실리우스의 「평화의 수호자」는 교회로부터 독립된 법치국가의 존재이유를 갈파-루터의 두 왕국사상 발전에 촉매역할을 함), 여섯째, 과학문명의 여명과 세계확장(1454년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은 종교개혁의 서적을 유럽에 확장시켜 종교개혁을 성공으로 이끄는데 중요한 역할을 함)
㉡ 복음을 재발견한 루터(1512-1515년)
루터의 복음의 재발견은 「시편강의」(1513-1515)에서 그 맹아가 발견되고 「로마서 강해」(1515-1516)에서 성숙하며 「갈라디아서 강해」(1519)이후 성숙한 복음주의 신학을 보게 된다. 루터는 로마서 1:17을 통해 복음에 대한 통찰력을 얻었고 이것으로 시편을 보았다. “하나님의 의(iustitia Dei)가 복음에 계시되었다.”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향해 베푸시는 은혜이며 믿음으로 전가(extra imputatio)되는 수동적인 의(iustitia passiva)이다. 이 칭의의 근거는 우리밖에(extra nos) 있는 것이다.
㉢ 두 종류의 의
첫째는 ‘iustitia aliena’로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義가 우리의 의가 되는 것이다. 이 義는 우리 자신의 모든 실제적인 義의 근본이며, 기초이며, 원인이며, 근원이다. ‘밖으로부터 오는 義’는 우리의 공로없이 오직 은총에 의해서 우리에게 스며든다. ‘밖으로부터 오는 義’는 한번에 전체가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 시작되고, 발전하고, 최종적으로 죽음을 통한 끝에 완성된다.
둘째는 ‘iustitia propria’로 이것은 육체를 죽이고 자신을 존중하는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선행의 삶을 사는 것이다. 따라서 이 義는 자신의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구성되며, 하나님을 향한 겸손과 두려움으로 구성된다. 이는 성화의 과정으로 율법의 요구를 성취한다. 이것은 ‘밖으로부터 오는 義’ 없이는 불가능하며 그 열매이며 결과이다.
㉣「시편강해」(1513-15년),「로마서」(1515-16)의 주제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연결.
루터의 「시편강해」와「로마서」강의에 나타난 공통된 세 가지 주제는 첫째 죄론과 인간 본성론, 둘째 칭의(iustitia aliena), 셋째 기독교인의 생활(iustitia propria) 이다.「시편강해」는 중세의 4중적인 성서해석을 사용하였으며, 아직 로마 가톨릭적 요소(7성례, 계층질서, gratia infusa-하나님의 초자연적인 德인 ‘신·망·애’가 세례를 통해서 인간에게 주입되면 인간이 자연적으로 갖고 있는 ‘prudentia, iustitia, fortitudo, temperanta’와 만나 인간이 실제적으로 義化 되어 선행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구원론)가 남아 있다.
「시편강해」의 첫째 구조인 죄론과 인간 본성론에 관하여, 루터는 인간 본성의 전적 부패를 말한다. 인간의 전인격은 자기 중심적이다. 이것을 욕정(concupiscentia)이라고 불렀다. 둘째 구조 칭의에 관하여, 루터는 양심의 자기고발에 의한 겸손과 자기의 죄 승인이 은총을 받는 전제가 된다는 半펠라기우스적 사상의 칭의론을 전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 존전에서(coram Deo)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인정받을 수 있다고 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셋째 구조 기독교인의 생활에 관하여, 루터는 칭의받은 기독교인은 성령의 지도하에 계속 회개와 성화에 이르러야 한다고 했다. 세례의 의미는 평생토록 날마다 죽고 날마다 다시 사는 것으로 기독교인의 실존을 “semper peccamus, semper iustificanti” 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로마서 강의」의 “simul iustus et peccator”를 예기하고 있는데 이는「두종류의 義」에서 말하는 iustitia aliena와 iustitia propria와 연결되는 사상이다. 기독교인은 칭의로 말미암아 자유와 자발성을 갖게 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신앙이야말로 선행의 원천이다.
「로마서 강의」에서 루터는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성서를 해석했으며, 중세의 4중적인 의미를 포기하고 율법에 의한 인간 심판과 복음에 의한 이신칭의를 중심으로 로마서를 풀이했다. 첫째 구조 죄와 인간본성에 관하여, 죄인의 의미는 바울적, 어거스틴적으로 ‘욕정’을 의미하며, 죄인의 죄악이란 의지의 질이 결핍되거나 지성의 능력이 상실되는 것뿐만 아니라 몸과 영혼의 모든 능력이 상실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루터에게 있어서 욕정은 인간의 전인적 자기 사랑과 자기 우상화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것을 루터는 ‘자기 자신안으로 꾸부러져 들어간 것’(incurvatam in se) 혹은 ‘자아에로의 굴곡’(sibi inflectere)이라고 불렀다. 둘째 구조인 칭의에 관하여는 복음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미암는 이신칭의를 주장한다. 셋째 구조인 기독교인의 삶에 관하여, 루터는 기독교인이 이웃과 세상을 향해 성화의 과정 곧, 사랑의 실천을 말하면서 “simul iustus et peccator”를 주장한다.
이상의 구조는 개혁교회의 가장 훌륭한 신앙고백서인「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이 요리문답의 구조는 첫째 “인간의 고뇌”(von des Menschen Elend)에서 인간의 죄와 인간의 본성을 다루고, 둘째 “인간의 구원”(von des Menschen Erlosung)에서 복음을 통한 이신칭의의 구원론을 다루고, 셋째 “감사에 관하여”(von der Denkbarkeit)에서는 구원 얻은 자가 준수해야 할 십계명에 관한 내용이 나오고 있다.
㉤「갈라디아서 강의」(1516-17년)에 나타난 ‘율법과 복음’, ‘두왕국사상’
「갈라디아서 강의」는 이중적인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과 복음’을 말한다. 율법에는 두가지 용법이 있는데 첫째는 자연법, 양심법에 속하는 ‘정치적 사용법(usus legis politicus)’과 율법의 고발적 기능인 ‘율법의 신학적 영적 사용법(usus legis theologicus or spiritualis)’이 있다. 율법의 고발적 기능을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고발을 경험하고 복음을 통하여 해방을 경험하고 새로운 선택, 새로운 결단, 새로운 신뢰로 나아가게 된다. 이것이 곧 기독교 윤리의 근본을 이루는 ‘샘솟는 사랑’(quellende Liebe)인 것이다.「갈라디아서 강의」의 두 번째 주제는 두왕국 사상이다. 이 사상은 원래 어거스틴의「신의 도성」에서 유래한 것으로, 루터는 ‘세상적 통치’(Weltliches Regiment)와 ‘영적인 통치’(Geistlichtes Regiment)로 나누고 전자는 육에 속하는 죄악의 세상이면서도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섭리하시는 창조의 세계이며 율법의 정치적 사용이 해당되는 곳이고, 후자는 구속과 칭의의 세계로 신앙과 사랑이 지배하는 곳이다. 사실 두왕국 사상은 어거스틴의「신의 도성」에서 유래하였고, 중세의 샤르망 대제(800년)와 교황 니콜라스1세에 의해 1왕국 사상으로 변했고 중세말 단테의「왕정론」과 마르실리우스의「평화의 수호자」에 의해 다시 두왕국 사상으로 발전했다. 루터의 두왕국의 분리는 한편 기독교인의 사회윤리를 약화시키는 단점을 안고 있다. 그러나 사회정의를 실천할 때 두왕국 사상이 없으면 복음과 문화를 하나로 만들 위험이 있게 된다. 즉 복음을 이데올로기화하고 구속사를 보편사에 용해시키는 위험이 있게 된다.
㉥「히브리서 강의」(1517-18)에 나타난 ‘설교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
루터는 교회를 ‘입의집’이라고 할 정도로 설교의 위치를 강화시킨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에 의해 제시되고 교회에 의해 선포되며 성서에 기록된 것으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全구속행위를 내포한다.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은「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도 언급되는데, 이는 중세 로마 가톨릭의 영광의 신학에 反한 것으로, 영광의 신학은 창조의 세계, 자연신학, 사변적 형이상학, 중세적 주지주의에 근거한 신학이다. 십자가의 신학은 하나님께서 고통, 즉 십자가를 통하여 감추어진 모습으로 계시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십자가 사건과 율법의 고발적 기능은 하나님의 본래의 일(opus proprium하나님의 사랑, 부활)을 위한 하나님의 이상한 일(opus alienum)에 속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고 인간이 보기에 힘든 길을 택하셨다는 것이다.
B. 복음을 변호하는 시기
㉠「95개조」(1517)의 의미
교리적 측면에서 로마 가톨릭의 고해성사는 기계적 회개이고 참된 의미의 회개에 방해가 된다. 善行은총론적 구원론에 의한 잉여공로설이 면죄부 판매의 이론적 근거였기에 루터는 공로사상을 비판하면서 진정한 공로는 복음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공로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죄를 풀어주고 매는 권한은 사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 설교를 통해 성령이 역사할 때 일어나는 것이며, 성도의 교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가능한 것이지 미사나 성지 순례가 주는 것이 아니라고 비판하였다.
㉡「하이델베르크 논쟁」(1518)의 ‘율법과 복음’ ‘자유의지와 노예의지’ ‘십자가의 신학’
㉢ 1518년의 두 작품「95개조항의 해설」「새로운 시편강의」
「95개조항의 해설」의 중심주제는 ‘신앙만으로의 칭의’이다. 루터는 이를 위해 성서으 권위에 의존한다. 그러나 ‘sola scriptura’의 원칙을 확고히 붙든 것은 아님. 또한 사제의 사면권(the power of the keys)을 복음적으로 이해했다. 죄인에게 선포되는 복음이 성령의 조명과 감화 아래서 죄의 용서를 일으키고 성화의 삶으로 인도한다. 마지막으로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문서로 처음 강조하였다.「새로운 시편강의」의 첫 번째 중심주제는 신앙이다. 신앙은 선행의 성취를 불러 일으킨다.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이다. 두 번째 중심주제는 신앙과 사랑의 관계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이에 감사하는데서 우리의 사랑이 우러난다. 이것을 루터는 ‘quellende Liebe’라고 불렀다. 이 넘쳐흐르는 사랑이 이웃과 세상을 향하게 한다. 만인제사장직의 근거가 바로 신앙에 근거한 사랑에 있다.
㉣ 카제탄 추기경과의 대결(1518)
논쟁의 초점은 권위의 문제와 은총의 개념문제였다. 카제탄은 라틴교회의 전통과 종교회의에 의존하였으나 루터는 성서의 권위에 의존하였다. 그러나 sola scriptura를 확립한 것은 아님. 은총에 관해서 카제탄은 은총이 실체적(substantia) 은총이라고 했으나 루터는 죄인을 향한 화해와 죄의 용서라는 하나님의 善意가 은총이라고 했다. 공로사상에 대해서도 카제탄은 교황, 감독, 사제엑 주어진 로마교회의 가르치는 권위(magisterium)를 내세우나, 루터는 교황의 권위가 성서의 권위를 넘어 설 수 없음을 주장했다.
㉤「라이프치히 논쟁」(1519) - sola scriptura 내세움
에크는 교황의 신적권위에 대해 키프리안의 교회관을 인용하면서 교황이 베드로 후계자이며 로마 감독들이 교회의 머리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키프리안의 주장이 모든 사도들의 권위는 동등하며 베드로는 ‘primus inter pares’기능상 우위에 있다고 했으며, 로마교회의 우위권에 대해 루터는 고대관구들 모두가 로마와 동등하다고 주장하였다.
㉥「Resolutiones」(1519)
에크가 ‘야고보서’를 가지고 ‘이신칭의’를 비판하자, 루터는 중세의 성서관을 비판한다. 즉 성서의 내용비판의 표준을 제시한다. “Triebt es christum oder nicht?” 루터는 ‘경전속의 경전(kanon im kanon)’을 주장한다. 그가 제시한 ‘경전속의 경전’은 사도적 전승의 kerygma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그 내용은 그리스도의 위격과 구속사역, 즉 십자가 사건과 부활, 은혜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다. ‘경전속의 경전’은 성서내에 진리의 hierachy를 두는 것에는 장점이 있으나, 성경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데에는 문제가 된다.
㉦「로마 교황권에 관하여」(1520) - 로마교황의 권위문제와 루터의 초기 교회론 언급
로마교황의 권위문제는「라이프치히 논쟁」에서 취급. 루터의 교회론은 1526년의 국가 교회론의 직제론과는 큰 차이가 있다. 루터는 교회를 성도들의 교제(communio sanctorum)로 보는데, 여기서 만인제사장직이 적용된다. 교회는 성령을 통한 말씀의 피조물(quellende Liebe)이다. 교회의 표지로 세례, 성만찬과 복음설교를 말한다.
㉧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루터의 견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를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구원의 경험없이는 불가능하다. 루터는 전승과 성서를 동등한 위치에 놓는 중세교회의 입장에 반대하여 ‘sola scriptura’를 주장한다. 루터에게 있어 교회는 ‘입의집’(Mundhaus)이다. 교회에서 외쳐지는 설교말씀이 성령의 내적 역사를 통해 신앙과 순종의 반응이 일어난다. 이것이 “성령의 내적인 증거가 된다(testimonium internum spiritus sancti).” 종교개혁자들은 로마교황의 magisterium에 반대하여 성서의 진리성을 증명하기 위해 “성서는 그 자신의 해석자이다(scriptura est sui ipsius interpres)” 라는 해석학적 원리를 내세웠다. 루터는 “성서의 불투명한 부분을 교황이 해석한다”는 주장에 반대하여 성서의 주제에 관한 명료성을 주장한다. “성서의 외적 명료성은 말씀의 사역에 관한 것이요, 내적인 명료성은 성령의 감화 없이는 성서의 일점일획도 이해할 수 없다. 성서의 외적 명료성은 신앙을 강하게 하고 이단을 대처할 때 사용한다.” 루터는 1522년에 “모든 성서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성서는 율법과 복음을 내포하고 있는데 율법도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는 점에서 성서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위격과 그의 구속사역이다. 루터는 성서의 중요성을 가름하는 기준으로 “그것이 그리스도를 추구하는가 아닌가?”였다. 그래서 루터는 “경전속의 경전”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C. 루터에게 있어서 기독교인의 생활윤리 (1520) - 기독교 윤리에 관한 세 개의 논문
루터의 윤리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갈라디아서 강의」에 나오는 “quellende Liebe”이다. 이 “흘러넘치는 사랑”은 1522년 로마서 서설에서 잘 나타난다. “흘러넘치는 사랑”은 자기를 전부 던지는 사랑이며, 이 사랑으로 활성화된 신앙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는 존재가 된다. 또한 “만인제사장직”도 기독교 윤리의 핵심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참여함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동료 사제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작은 그리스도(a little christ)’가 되어야 한다. 만인제사장직은 성도의 교제요, 교제를 통하여 영적인 은혜를 나누는 교회론적 요소이다.
㉠「독일 귀족에게 고함」- 로마교황청이 세워놓은 세 개의 벽을 공격 (만인제사장직론)
첫째는 성직과 세속직을 구분하여 교황이 세속권력 위에 군림하는 것, 둘째는 교황만이 성서의 진리를 해석할 수 있다는 교리, 셋째는 공의회 소집권이 교황에게 있다는 주장을 공격하여 계층질서적 성직체제를 무너뜨렸는데, 그 근거는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 받은 모든 성도의 동등성인 만인 제사장설이 있다.
㉡「교회의 바벨론 포로」- 7성례비판 (만인제사장직론)
루터는 7성례를 비판하고 세례, 성만찬, 복음설교만을 주장한다. 루터의 교회론 초기에는 회중교회적 특징이 있으나 후기에는 국가교회론적으로 발전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 Gabe und Aufgabe (quellende Liebe)
“기독교인은 모든 것의 완전한 主요, 그 무엇에도,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동시에 모든 것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종이다.” 루터에게 있어서 칭의는 하나님의 선물(gabe)이며, 기독교인의 윤리는 과제(aufgabe)로서 나타난다. 그에게 있어서 구원론은 윤리론의 전제가 된다. 칭의 받은 사람은 성령의 지도아래서 끊임없이 갱신된다. 부정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여야 하며 적극적으로는 이웃을 향해서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선행이란 구원받은 기독교인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기쁨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
D. 비텐베르크의 위기(1521)
혁명을 통하여 이 땅위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는 열광주의자들에 반대하여, 루터는 첫째로 본질적인 요소(diaphora)와 비본질적인 요소(adiaphora)를 구별하였다. 전자는 복음, 이신칭의 같은 것이요, 후자는 예배의식, 수도원 입원을 위한 서원, 성상, 예복, 금식 등이다. 둘째로 말씀의 능력을 신뢰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열광주의자들은 말씀없이 성령내지 내적인 말씀에만 호소했다.
E. 루터와 뮌처 (농민전쟁 1524-25)
뮌처의 신학적 문제를 네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계시론인데, 뮌처는 계시란 기록된 성경말씀과 복음이 아니라 개인의 영혼 심지에서 솟아나는 내적인 말씀 혹은 성령으로 보았다. 이 내적인 말씀은 세상을 이기는 자기훈련을 통해서 일어나는 체험에서 나온 것으로 이 체험을 지닌 사람이 선민이고 종말론적 메시아 왕국의 전위대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교회전통적인 교리들(삼위일체, 기독론, 구원론, 종말론)과 불연속성을 가진다. 둘째 뮌처는 당시 교회와 국가에 대한 고발과 정죄와 심판을 위해 폭력을 불사하면서 메시아 왕국을 건설하려 하였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아가페 사랑과 용서 및 성령을 통해서 매개되는 복음을 축소화하고 복음을 율법화하여 율법주의적으로 나아갔다. 셋째 뮌처는 하나의 왕국을 지향했다. 뮌처는 국가공동체와 일반 사회와 역사섭리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자연법과 실정법의 세계와 보편타당한 가치세계를 과격하게 거부하였다. 그는 보편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反對하여 루터는 첫째 설교된 말씀에 입각한 계시론을 주장한다. 성령의 역사는 말씀을 통해서 역사한다. 둘째 교회론에 있어서 내적경험을 통해 회심한 가시적 공동체를 의미하는 뮌처와는 달리, 루터는 복음말씀을 성령의 감화와 조명아래에서 깨닫고 결단과 신뢰에 이르러 수동적인 義를 전가받아 이신칭의에 이른 성도들의 공동체이며 이는 영적인 공동체라고 주장했다. 셋째 루터의 국가론은 두 왕국사상에 기초한다. 하나님께서는 영적 통치와 세상의 통치 모두를 다스리시며 성도들의 경우도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이기에 영적통치와 세속의 통치 모두에 속한다. 두 왕국은 구별되어야 하지만 분리될 수는 없다.
F.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과 루터의 노예의지론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중세의 은총의 수단인 성직체제와 7성례를 배격한다. 또한 종교개혁이 강조하는 말씀설교와 기록된 말씀, 그리고 외적인 은혜의 수단인 교회를 떠나서 인간의 의지와 지성을 통한 윤리적 성취를 이루는 자력구원을 부르짖었다. 이러한 윤리적 이상을 성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윤리와 연결시켰다. 이런 배경에서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이 등장한다. 그는 인간의 부분타락을 주장하며 양심과 자유의지를 동반하는 구원론을 전개한다. 인간의 양심과 자유의지의 성취가 7성례중 세례를 통하여 오는 초자연적인 은총과 매개되어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신인 협동론(synergism)적 구원론을 주장한다. 이에 反해 루터는 인간의 전인적 타락을 주장하며, 구원의 문제에 관한 모든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의지는 구원에 있어서 노예의지에 불과하다.
G. 루터의 교회론
루터에게 있어서 “교회”란 “이신칭의 받은 자들의 공동체”(congregatio fidelium)이다. 그가 교회에 대한 정의를 논하기 시작한 것은 1520년에 쓴「로마교황권에 관하여」에서였다. 여기서 루터는 “이신칭의 받은 자들의 공동체”가 지녀야 할 교회의 표지로서 복음설교와 세례, 성만찬을 논하면서, 이 영적이고 불가시적인 “congregatio fidelium”을 제도적·가시적 교회와 구별하였다. 또한 루터는 1520년에 쓴「독일 귀족에게 고함」「교회의 바벨론 포로」「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각각 만인제사장론을 개진하였다. 수직적 관계에 의해서 “이신칭의 받은 자들의 공동체”가 된 교회는 수평적인 차원에서 “성도의 교제”속에 있는데, 이 “성도의 교제”에서 각 성도는 다른 성도를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만인제사장론의 출발점인 동시에, 모든 교직의 근거요, 모든 기독교 윤리의 기초이다.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고, 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참여하면서 다른 그리스도인을 위한 “하나의 작은 그리스도”(a little christ)로서 이웃을 향하여 “넘쳐 흐르는 사랑”(quellende Liebe)을 베풀어야한다. 이것이 “이신칭의 받은 자들의 공동체” 곧, 교회의 모습이다. 루터의 초기 교회론은 이처럼 만인제사장론에 근거한 “일반교역직”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1521년 이후 루터는 “priest”의 개념을 재해석하면서 “성도의 교제”와 “만인제사장“을 근본에 두고 “교역=직제”를 강조하여 말씀의 교역자를 특수 교역자로 보기시작하여, “특수교역직”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1525년 농민전쟁이후 1529년 슈파이에르 의회를 지나면서 국가교회의 모습으로 변모해갔다. 교회의 표지에 관해서도 루터는 1539년「on the Councils and the Churches」에서 7개의 표지를 내세운다. 복음설교와 세례, 성만찬, 성화적인 차원에서 권징·치리의 필요성, 만인제사장직 이외에 특수 교역직의 필요성, 기도와 감사와 찬송, 고난의 삶 등이다.
2. 칼 빈
A. 말씀론
칼빈의 말씀론은 그의 신학의 핵심이다. 이것은 ‘sola scriptura’ 전통을 따른 것으로 기록된 말씀과 성령과의 관계를 강조하여 율법의 역할을 강조한다. 말씀·성령·복음·율법의 관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설교말씀과 성령에 관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Deus loquens)이시며 교회는 설교된 말씀의 피조물이다. 이 설교말씀은 성령을 통하여 듣는 사람의 마음에 와 닿는다. 둘째, 기록된 말씀과 성령에 관하여, 칼빈은 루터처럼 복음중심적으로 성서를 이해하지만 기록된 말씀을 강조한다. 기록된 말씀으로서의 성서의 메시지를 파악하려면 성령의 내적 증거(testimonium internum spiritus sancti)가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는 ‘그 자신의 해석자이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와 말씀의 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과 구속사업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표할 때 선포된 말씀, 기록된 말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로써 3중적인 하나님 말씀을 말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구약의 주제이다. 넷째 율법과 복음에 관하여, 율법은 하나님의 義를 드러내고 인간은 이 율법을 통하여 좌절과 절망에 떨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임과 동시에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의 율법말씀을 만나면서 또한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과 그의 복음 말씀을 만난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은 인간에게 역설적으로 계시된다. 이것이 율법과 복음의 역설적인 관계이다.
B. 율법의 기능(강요2권, 소외와 화해)
루터와 달리 칼빈은 율법의 3가지 용법에 대해서 말한다. 첫째는 율법의 고발적 기능으로 이것은 루터가 사용한 ‘율법의 신학적 사용’과 동일하다. 둘째는 인류공동체를 위한 기능 혹은 정치적 사용을 의미하는 것으로 루터가 말한 ‘율법의 정치적 사용’과 같은 것이다. 셋째로 칼빈은 소위 ‘율법의 제3사용(usus legis tertius)’를 강조한다. 이것은 율법의 주된 기능으로서 이미 성령의 통치를 받고 있는 믿는 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인데, 사실 이 기능이 율법의 본래 목적인 것이다.
C. 화해의 실현
기독교 강요 제3권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출발하여 제4권의 교회론과 국가론에서는 교회를 하나님의 은총의 매개 혹은 외적수단으로 다룬다. 국가도 은총을 베푸시는 외적수단으로 보는데, 교회는 특별은총을 매개하는 수단이요, 국가는 일반은총을 매개하는 수단이다.
㉠ 성령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화해 사건은 신앙인의 것, 교회의 것이 된다.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 소외된 우리를 화해의 복음에 연결시킨다. 성령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킬 때, 우리에게 이신칭의, 회개, 성화 등이 일어난다.
㉡ 이신칭의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지성을 조명시키시고 우리의 의지를 감동시켜 선택과 결단, 확고 부동한 신뢰에 이르게 한다. 이것이 신앙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심판과 율법말씀의 경험과 아울러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경험하는 것이며 이 역설에 대한 이해와 파악을 통해서 결단과 신뢰에 이르는 것이다.
㉢ 칭의와 회개
義人은 그리스도의 義를 전가함(imputatio)으로 전적으로 용납(acceptatio)되는 것이다. 회개란 이중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수동적인 반응에서 일어나지만 결정적인 회개는 義人(이신칭의 다음)에서 일어난다.
㉣ 이중적인 말씀과 성화 과정 속에 있는 인간
복음신앙으로 義人된 사람은 율법말씀을 폐할 수 없다. 율법이 제시하는 완전함의 목표를 향하여 분투노력함으로 정진하여야 한다. 기독교인의 삶은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십자가는 구속의 선물일 뿐만 아니라, 의무와 과제의 의미를 갖는다. 이것이 율법의 제3사용, 곧 의인되고 회개를 시작한 기독교인들이 전생애를 통해 성취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다.
D. 칼빈의 교회론
칼빈은「기독교 강요」최종판(1559)에서 사도신경의 4번째 부분을 가지고 교회론을 형성하였다. 성령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과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를 루터보다 더 강하게 부각시켰다.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서 교회의 표지를 지닌 공동체를 교회로 보고 있다. 그가 말한 교회의 표지란 말씀설교와 세례, 성만찬이다.
3. 좌경화 종교개혁(재세례파)
국가의 지원을 받아 종교개혁을 수행한 쯔빙글리에 반대하여 그레벨, 만츠, 블라우록, 후브마이어, 후터 등의 좌경화 종교개혁자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의 특징은 국가의 실정법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완전주의를 지향했으며, 성인들의 재세례를 주장했다. 이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루터나 쯔빙글리적 복음이해로 만족하지 않고 완전주의적 성화를 내세워 국가의 실정법과 세속적 문화적 가치를 무시했으며, 분리주의를 지향했다는데 있다.
4. 반 종교개혁
교황 바오로 3세(1534-46)때 추기경이 된 콘타리니, 카라파, 사돌레토 및 폴이 개신교 종교개혁에 대응하는 반종교개혁을 주도하였는데, 특히 로욜라에 의해 결성된 “예수회”가 반종교개혁 운동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또한 1545-1563년 어간에 열린 트렌트 공의회의 교리 결정은 개신교의 종교개혁 신학에 대응하여 로마가톨릭 교회의 신학을 공식화 하였따. 이 문서는 개신교가 ‘sola scriptura’를 주장하는데 反해 ‘성경과 전통’을 주장하였으며, 루터와 칼빈이 2가지의 성례를 인정한것에 反해 7성례를 주장하였으며, 루터가 이신칭의를 주장한것에 反해 트렌트 공의회는 이신칭의를 조심성있게 정의하고 어느 정도 공로주의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이 트렌트 공의회의 영향으로 로마가톨릭 교회에서는 감독들이 설교를 하게 되었고, 성경에 대한 공개적 해석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교구 사제들은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을 가르치게 되었고, 사제들은 자기 교구에 상주해야 했으며,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선교활동이 트렌트 공의회 이후에 활발해졌는데, 도미니칸승단, 프란시스칸승단 및 예수회가 중남미, 북미, 필리핀, 일본, 중국 등지에서 선교활동을 널리 펼쳤다.
Ⅳ. 17세기 정통주의
16세기가 복음의 역동성을 강조하는 종교개혁의 시대라면 17세기는 성서의 권위에 입각한 교파별 교리주의의 시대였다. 17세기는 루터교, 개혁교회 그리고 로마가톨릭 교회가 경직화된 교리체계에 입각한 교파절대주의 시대를 만들어 냈다.
루터의 신학사상은 1535년경 멜랑히톤이 구원론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가 협동적으로 작용해야 하고, 구원의 증거로써 선행이 따라와야 하며, 성만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등을 강조하면서 루터의 신학사상과 어느 정도 입장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멜랑히톤의 입장은 1540년대에 이르면 로마가톨릭시즘과의 신학적 화해를 시도(1541년 Regensburg conference, 1547년 Augsburg Interim, 1548년 Leipzig Interim 등)케 하였다. 바로 이같은 흐름에 반대하여 플리키우스와 암스도르프 같은 순수 루터주의자들이 등장하였고, 1577년 순수 루터주의를 재정립하는「일치신조」(Formula of Concord)가 작성되었다. 이 신조야말로 루터교 정통주의의 전주곡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많이 사용하는 루터교 정통주의 교의학을 낳게 하였다.
개혁교회 역시 17세기에는 정통주의 시대를 맞이한다. 1619년 도르트회의에서 결정된 칼빈주의 5대강령(전적타락 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예정 Unconditional predestination, 제한 속죄 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총 Irresistable grace, 성도의 견인 Persevearance of saints)은 17세기 개혁주의적 정통주의 신학을 잘 나타낸다. 이 화란의 칼빈주의에 반대하여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허용하는 예지예정론과 보편구원론을 주장하였고, 은총을 거부할 수도 있는 자유와 궁극적으로 인간의 구원은 성도의 견인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에 달렸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영국 기독교를 개신교화한 것은 1560년 이후의 청교도의 역사였다. 이 청교도운동은 영국의 민주화와 인권 차원에서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 같은 퓨리탄의 투쟁사에서 만들어진 것이 1647년의「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다. 이 신앙고백서는 대륙의 성경영감론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성경을 모든 신학 논쟁의 ‘최고 심판자’로 여긴다.
프랑스의 위그노 계통은 프랑스 혁명에로 이어졌고, 로마가톨릭은 트렌트 공의회를 통하여 정통주의를 선언하였다.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가 종교개혁의 ‘sola scriptura’를 너무 경직화시켜 성서의 권위를 우상화하였고, 성서주의적 교리주의로 나간데는 이유가 있었다. 국가의 권위를 높이고 교황권이 고조되며 무엇보다 과학적 이성과 철학적 이성이 모든 진리의 척도가 되는 상황이 17세기와 18세기 초에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또 한편 17세기에 있었던 30년 전쟁은 기독교의 정체성의 위기를 초래하였다. 교파주의와 교리의 절대화가 전쟁의 주요 원인이었기 때문에 유럽인들은 교파와 교리에 신물을 느꼈다. 이것은 자연히 17-18세기의 계시와 권위와 교회의 전통을 무시하게 만들었다. 또한 17-18세기는 계몽주의가 이미 시작된 때이기도 하다. 프란시스 베이컨, 코페르니쿠스, 뉴톤등의 과학혁명과 데카르트의 선험적 이성과 허버트 경의 이신론등의 철학혁명이 등장하던 시대였다. 따라서 17세기는 성경과 교회가 무시되고 과학적 이성과 철학적 이성이 모든 진리의 표준이 되는 시대적 상황의 도전 앞에서 17-18세기 초의 개신교 신학자들은 일단 이성에게 마땅한 자리를 주기 위해서라도 자연적 영역의 진리와 초자연적 영역의 진리를 구분하였고, 다시 기독교적 체계를 갖추기 위해서 이 둘을 연결시키는 방법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이 시대를 ‘개신교 스콜라주의 신학’(Protestant Scholasticism)이라 일컫는다. 따라서 18세기는 17세기의 30년 전쟁과 정통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경건주의와 계몽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Ⅴ. 18-19세기 한류와 난류
18세기 계몽주의와 19세기 유럽의 세속화가 ‘모더니즘’의 흐름으로서 ‘한류’에 속한다면, 18세기의 경건주의, 복음주의 각성운동과 선교활동, 그리고 ‘위대한 세기’인 19세기의 복음주의 각성운동과 선교활동은 ‘모더니즘’을 극복하는 ‘난류’에 해당한다. 그리고 19세기 러시아의 도스토예프스키, 덴마크의 키에르케고르, 독일의 켈러, 그리고 스위스의 블룸하르트는 19세기 자체 내의 흐름으로 이것은 칼바르트로 비롯되는 ‘신정통주의 신학’을 낳았는데, 이것 엮시 ‘19세기 자유주의 개신교 신학’을 극복하는 신학이었다는 점에서 ‘난류’에 속한다.
A. 한류 1 : ‘모더니즘’의 현관으로서의 계몽주의
1648년 “웨스트팔리아 평화협정”과 1689년 영국의 명예혁명으로 공포된 “관용법령”은 교파절대주의에 의한 배타주의적 교파 싸움에 종언을 고하였다. 그리고 17세기 교리논쟁과 교파싸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18세기에는 성경, 교회 보다 인간의 이성을 모든 진리의 척도로 삼는 계몽주의가 등장하였다.
계몽주의는 크게 3가지 틀거리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과학혁명과 철학혁명이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베이컨(성경과 교회의 전통에 근거산 신학적 명제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명제의 연역법에 반대하여 관찰과 분석, 실험과 종합을통해서 경험적 확신에 도달하는 귀납법 주장), 갈릴레이, 뉴턴(인과법칙에 의한 기계론적 세계관 주장)으로 이어지는 과학혁명과 데카르트(인식의 근거가 계시, 교회의 전통, 그 어떤 형이상학적 명제 및 자연 자체 내의 법칙성에 있지 않고 사고하는 주체로서의 인간 안에 있다고 주장), 존 로크, 흄,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로 이어지는 철학혁명, 둘째는 이성의 종교로서 “이신론”의 등장이었다. 계몽주의 시대의 기독교는 초자연과 초월을 무시하는 바, 내재주의 혹은 초자연종교의 자연종교화로 전락하였는데, 이것이 허버트 경, 틸롯슨, 톨랜드, 틴달, 볼테르, 루소, 백과사전학파, 라이마루스, 렛싱, 칸트등으로 이어지는 이성의 종교 혹은 이신론(Deism)이었다.
셋째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정치 사회적 민주화와 미국혁명, 프랑스 혁명을 들 수 있다.
B. 한류 2 : 19세기 유럽의 세속화와 19세기 독일의 자유주의 개신교 신학
㉠ 유럽의 세속화
19세기 유럽은 18세기 계몽주의의 유산을 물려받아 급격한 세속화를 경험하였다. 7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는 다윈과 더불어 시작된 유물론적인 인간관에 의해 창세기를 거부하고 진화론을 주장하는 과학에 의한 기독교의 세속화였다.
둘째는 신·구약 성경을 구속사적 입장에서 역사를 보지 않고 “과거에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가?”에 관심을 기울이는 실증주의적인 역사학의 등장,
셋째는 인간이 신 앞에서 죄책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의 소리 앞에서 껄끄러움을 느끼는 인간의 도덕성에 의한 도덕의 세속화였다.
넷째는 기독교의 모든 권위구조를 거부한 자유주의,
다섯째는 종교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한 결과 기독교의 죄론, 구원론, 종말론을 완전히 세속화시켜 버린 마르크스주의,
여섯째는 기독교의 모든 직업윤리를 와해시켜 노동의 가치를 임금으로만 계산해 버린 노동의 세속화,
마지막으로 민족주의가 등장하면서 일어난 ‘반성직주의’로서 이것은 교회의 말씀설교와 가르침의 권위를 붕괴시켰는데, 주로 로마가톨릭 세력이 강한 나라들에서 일어났다.
㉡ 19세기 독일의 자유주의적 개신교신학
독일의 자유주의적 개신교 신학은 세속화의 흐름에 대응해서 나타난 신학으로 인간론적 가치에서 출발하여 ‘계몽주의’와 ‘개신교 정통주의’를 혼합시킨 인간 중심적 신학이요, 문화신학이다. 이 신학은 슐라이에르마허로부터 시작되는데, 그는 자신의 책「종교론」제2강에서 종교의 본질을 말하고 있는데, 종교의 본질을 형이상학적이며 사변적인 교리내용과 모든 도덕적인 원칙에서 찾으려고 했던 당시 계몽주의에 反해서, 슐라이에르마허는 “종교란 형이상학이나 도덕이 아니며, 이 둘의 혼합물도 아니며, 교리(Dogma)가 아니다. 종교의 본질은 직관(Anschauung)이고 감정(Gefühl)”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는 정통주의의 교리를 거부한다. 교리는 단지 종교적인 직관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제 2 차적인 문헌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는 17세기 교리중심의 주입식 신앙교육을 거부하고 신앙의 출발점으로 개인의 내면적인 체험을 강조하게 되었다. 한편 기독교와 철학을 하나의 절대정신으로 통일시키려는 헤겔식의 보편주의적 종교철학은 좌파 헤겔주의와 우파 헤겔주의로 나뉘어 진다. 좌파 헤겔주의신학자들은 헤겔 철학의 형이상학이 말하는 절대정신은 인간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이 절대정신은 모든 물질위에 근거지워진 것에 불과한 것으로 “신학은 인간학이다”는 명제로 요약된다. 우파 헤겔주의자들은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 기독론, 세례와 성만찬 등의 신학적 주제들을 헤겔철학에 의하여 변증하였다. 리츨은 헤겔의 형이상학을 배격하고 칸트의 실천이성을 중요시하는 신칸트 계열의 신학자로서 역사적 예수와 그의 도덕적 가르침에 집중하였다. 진정한 의미에서 19세기 리츨, 하르낙, 트뢸취로 이어지는 자유주의의 신학을 ‘문화신학’이라고 부른다. ‘문화신학(Kultur-protestantismus)’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리츨은 ‘하나님 나라’ 개념을 중요시 여겼는데, 그가 말한 하나님 나라는 윤리적·사회적 하나님 나라였다. 따라서 그는 사회선교, 성화를 강조하는 윤리적 기독교를 강조하였다. 리츨의 영향을 받은 하르낙, 트뢸취에게서도 기독교는 윤리적 기독교였다. 하르낙은 “종교는 도덕의 영혼이고, 도덕은 종교의 몸이다”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C. 난류 1 : 17-18세기의 경건주의 운동
17세기 교파별 교리주의시대에 대한 반동으로 계몽주의와 함께 경건주의가 일어났다. ‘경건주의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슈패너’는「coellegia pietas」라는 무리를 만들어 성경공부와 기도, 설교, 경건서적 읽기를 하였으며, 만인제사장설을 강조하였고 경직화된 정통교리 보다는 경건한 삶을 강조하였다. 이 무리들은 기성 교회들로부터 분리하지 않으면서 기성교회를 갱신시키는 “교회안에 있는 작은 교회들”(ecclesiae in ecclesia)이었다. 1686년 프랑케는 슈패너의 영향아래「성경을 사랑하는 자들의 무리」(collegium philobiblicum)를 만들어 할레대학을 중심으로 경건주의 운동을 더욱 발전시켰다. 한편 경건주의는 기성 교회내에서 하나의 개혁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여러 분리주의 종파들이 경건주의로부터 파생되었다. 그 중에 형제단교회, 모라비안교회, 친젠도르프의 경건주의 운동이 대표적이다. 특히 친젠도르프는 슈패너와 프랑케에게서 영향을 받았는데 본래는 분리주의를 지향하지 않았으나 “헤른후트”중심으로 교육과 선교활동을 펼치면서 결국 분리주의로 나갔다.
D. 난류 2 : 18-19세기의 복음주의적 부흥운동
18세기 경건주의의 영향으로 그리고 18세기 계몽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18세기 웨슬리와 휫필드 중심으로 영국의 복음주의적 각성운동과 조나단 에드워드 중심의 미국의 복음주의적 부흥운동은 선교의 열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18세기 영국의 복음주의 운동은 시대상황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17세기말 영국교회는 성공회와 비국교도 사이의 싸움으로 영적 활기를 상실하였고, 18세기 초엔 계몽주의와 半정통주의와 회의주의(D. Hume)로 복음의 생명력을 잃어갔다. 그리고 18세기 중엽에 일어난 산업혁명으로 인해 국가는 실업자와 인구의 도시화로 공교육이 무너져 버렸다. 이런 상황 속에서 등장한 것이 웨슬리 형제와 기타 복음주의자들이었다. 독일경건주의의 창시자 슈패너가 1670년경에 “경건한 무리”를 창설한 이래로 영국 런던에서는 1678년경 소수의 젊은이들이 “종교적 모임들”을 조직하였으며 요한 웨슬리가 이 모임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 모임 역시 독일 경건주의자들의 모임들처럼, 기도를 열심히 했고, 성경을 실천적 목적으로 읽었으며, 경건한 삶을 양육시켰고, 성찬을 종종 나누었다. 요한 웨슬레는 그후 모라비안 선교단체의 영향과 루터의 로마서와 갈라디아 주석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아 많은 설교를 하며 큰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한편 1735년에 조지 휫필드가 이 “종교적 모임들”에 접근하였다. 휫필드의 설교는 영국과 미국에서 큰 영적 각성운동을 일으켰다. 19세기에는 복음주의 계통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영국국교회로부터 분리하여 나왔다. 한편, 19세기에는 국교회 안에서도 복음주의파가 생겼다. 이들은 ‘저교회파’로서 옥스퍼드 운동으로 새로 등장한 ‘고교회파’에 맞섰다. 이와 더불어 자유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광교회운동’도 있었다.
미국의 복음주의 대각성 운동은 영국의 영향을 받아 1726년 뉴저지의 화란 개혁교회 계통에서 일어났는데, 18세기 미국의 제1차 대각성운동에 가장 크게 공헌한 사람이 회중교회 목사인 조나단 에드워즈였다. 그러나 독립전쟁과 대륙의 이신론의 영향으로 미국의 기독교는 하향곡선을 그렸다. 바로 이 같은 상황에서 1792년 제2차 대각성운동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여 1800년데 이르러서는 절정에 달했다. 제2차 운동기간에 오랫동안 헌신한 사람이 찰스 피니였다.
18세기에는 프랑케와 모라비안 형제단으로 대표되는 경건주의 운동에 영향받아 18세기 영국의 웨슬레 형제와 휫필드, 그리고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 등 복음주의 각성운동은 근대 개신교 선교의 원동력으로써 교회갱신의 힘이기도 했다. 1705년의 모라비안 선교, 윌리엄 캐리를 파송한 1772년의 “이교도들을 위한 복음전도 침례교 협의회”, 1795년의 “초교파적 런던 선교협의회”, 1799년의 “영국 성공회의 교회 선교협의회” 등은 모두 18세기 경건주의와 복음주의적 각성운동의 소산이었다. 18세기의 계몽주의가 초자연(계시, 교회, 신학)으로부터 이성을 해방시켜, 기독교를 자연종교화 시켰고, 성경의 구속사, 복음, 이신칭의 및 성화, 삼위일체 하나님을 무시했다면, 18세기의 경건주의와 복음주의 각성운동은 이같은 기독교의 세속화의 흐름을 막아 19세기 ‘위대한 선교의 세기’를 낳는 일에 크게 기여했다.
**** 17세기 : 캐톨릭 - 개신교 - 정통주의(교리주의)
18세기 : 계몽주의의 인간의 이성에 근거한 윤리도덕적 종교(자연종교, 세속화)
경건주의의 윤리도덕적 종교
복음주의의 영적대각성운동
19세기 : 자유주의의 인간의 종교적 체험 (계몽주의의 대한 독일기독교의 반발)
복음주의의 선교
20세기 : 신정통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