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정)
나정에 처음으로 찾아간 날은
풀도 사그라지고 땅도 서릿발에 부푼
지독한 겨울이었다.
소나무 숲으로 쌓인 그곳은 우물터를 찾을 수 없었고
추위만 가득했던 기억만 가득한 곳.
신라 첫 왕 박혁거세랑 첫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박혁거세는 어떤 인물일까?
최근 발굴한 유적 팔각사당..(남해왕이 세움) 있고 그 아래가 우물터로 추정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나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전한 지절원년 임자(前漢地節元年壬子:BC 69) 3월 1일(삼월 삼짓날),
신라 건국의 주역인 6촌(村)의 촌장들이 모여,
군주를 선출하고 도읍을 정하자고 결정한 뒤 일행이 높은 곳에 올랐다.
그런데 양산(陽山) 아래 나정이라는 우물 근처에
이상한 기운이 돌며 백마 1마리가 무릎을 꿇고 있어,
가보니 백마는 하늘로 올라갔고 붉은색의 커다란 알만 남았는데,
이 알을 쪼개자 어린 사내아이가 나왔다.
이상히 여겨 동천(東川)에서 목욕시키자 몸에서 광채가 났고 새 ·짐승들이 춤추듯 노니니,
천지가 진동하며 해 ·달이 청명해졌다.
사람들은 이 아이가 세상을 밝게 한다 하여 혁거세라 이름하고,
알이 박같이 생겼다 하여 성을 박(朴)이라 하였다.”
그가 13세가 되었을 때 매우 영특하여, 여섯 마을의 왕으로 삼고 국호를 서라벌이라 하였다.
BC 53년 1월 용(龍)이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나 계집아이를 낳았는데,
우물 이름을 따라서 알영이라 하였다.
알영은 자랄수록 덕기(德氣)가 있으므로, 혁거세가 그녀를 비로 맞이하여
알영부인(閼英夫人)이라 하였다.
BC 41년 혁거세가 알영부인을 동반, 6부(部)를 순행하면서 백성에게 농잠(農蠶)을 권면하여
생산의 증가에 힘쓰니, 백성들이 이들을 이성(二聖)이라 칭송하였다.
BC 37년 서울에 금성(金城)을 쌓고, BC 32년 금성에 궁궐을 지었다.
4년 73세로 죽자 담엄사(曇嚴寺) 북쪽의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는데,
지금 위치는 경주시 남천(南川)의 남쪽이다. (오릉)
신라를 연 박혁거세의 탄생지로 나정은
이번 유적 재 조사때 사당터와 우물터가 발견되면서
삼국유사,사기의 기록이 참임을 말해준다.
박혁거세를 시작으로
신라의 천 년 발을 내밀었고
56왕의 첫 왕이시니 누가 뭐라해도 대단한 분임이 틀림없지 않은가?
경주남산 자락 나정에서 신라가 문을 열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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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드디어 햇빛님이 문을 열었군요.. 제정비 작업 해서 방을 따로 만들테니 이곳에 우선은 열어 놓으세요 그럼 작업 끝나고 옮겨 놓겠습니다 ㅎㅎ
햇빛님!!! 멋져요. 신라 천년의 베일을 님의 손으로 열어주시니.....함께 배우는 기쁨에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오우~~신라천년의 문을 활짝여셨군요~~ 햇빛님의 활약 기대가 됩니다~~열심히 공부 할께요~~고마워요 햇빛님~~
고맙습니다. 우리 함께 신라를 공부해봐요. 긴 시간이 흐른 이야기지만 아직도 살아있는 우리의 역사입니다. 신라의 무수리 햇빛은 함께 신라를 생각하리란 믿음으로 즐겁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