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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인간에게 주어진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그 인간의 행위가 빚어내는 ‘되기’이다.
우리는 ‘이다’로서 존재하기보다 ‘되다’로서 존재한다.
- 이정우 <제작된 인간의 운명, 블레이드 러너>《기술과 운명》(2001, 한길사)
두 가지 결정론의 시각
사람은 태어나면서 이미 각자 결정된 운명을 지니고 있을까? 흔히 우리는 생년월일시만으로 사람의 운명을 점치는 사주팔자의 역을 결정론의 대표격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동일한 논리가 ‘게놈프로젝트’에 깔려 있다는 것을 간취해내기는 쉽지 않다. 점은 미신이고 유전자는 과학이기 때문이다. 유전자 지도는 ‘선험적’으로 그 사람의 신체 조건, 성격, 질병, 두뇌 능력, 감정 등을 ‘결정’하고 있다. 그 지도에 맞추어 인간은 삶 속에서 발현된다. ‘선험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점과 유전자 지도는 동일하다.
또 다른 결정론이 있다. 그 사람의 운명은 그가 태어나 살아가게 될 사회, 문화 구조의 빼곡한 격자, 혹은 그 위계에 의해 규정된다. 우리는 이 ‘구조’에 의해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이 사회학적이고 역사적인 구도의 최초의 창안자는 아마도 마르크스였을 것이다. 이후 구조주의로 통칭되는 이 사유는 인간의 ‘주체성’을 제거한다. 인간은 그저 거미줄에 걸린 파리에 불과하다!
우리는 <블레이드 러너>를 통해서 두 가지 결정론의 시각을 읽을 수 있다. 로이는 생물학적 선험성으로 결정되었다. 데커드는 사회적 선험성으로 결정되었다. 로이는 ‘제작’시 ‘유전자’적으로 주어진 노예 전사라는 용도, 4년이라는 수명을 스스로 어찌지 못한다. 데커드는 사회적으로 주어진 인조인간 사냥꾼이라는 용도를 스스로 어쩌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성’은 ‘인간의 조건’이 아니다. 인간‘됨’은 이러한 결정성으로부터 이탈했을 때 획득되는 양태다. 로이가 자신의 운명에 의문을 가지고 그의 창조자를 찾아왔을 때, 데커드가 인조인간 사냥꾼의 임무를 버리고 레이첼과 사랑에 빠졌을 때 그 둘은 인간‘됨’을 획득한다.
부엉이, 눈
운명에 대해 저항하기. 창조주 살해는 다분히 반신학적이며 그로 인해 인간적이다. 몇 가지 모티프들이 이 장면에서 작동하고 있다. 먼저 오이디푸스를 보자. 오이디푸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대로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했으며 친어머니와 근친상간을 저질렀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찌른다. 이것은 그저 자책감의 행위만이 아니다. 신과 운명에 대한 저항도 함축한다. 즉, 신과 운명, 그 결정성으로부터 이탈되었을 때 오이디푸스는 ‘인간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 그것의 행동 지침은 윤리요, 도덕이다.
로이는 자신의 창조주인 타이렐을 살해한다. 살해의 방식이 그의 눈을 뽑아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눈은 오이디푸스의 눈과 겹친다. 왜 오이디푸스는 하필 자신의 눈을 멀게 했는가? 눈은 지혜의 ‘표식’이다. 그것은 ‘인식’능력의 근원이며 ‘이성’의 원천이다. 이 살해의 현장에 부엉이가 있다. 왜 하필 부엉인가? 부엉이는 지혜의 여신인 아테네의 신조인 것이다.
이 장면, 로이가 타이렐과 세바스찬을 살해하는 장면은 서구 문명에 대한 반성과 회의를 함축하고 있다. 타이렐의 눈은 서구 문명의 ‘이성’과 동일시된다. 로이는 타이렐에게 자신의 수명을 연장해달라고 한다. 그러나 짧은 수명은 고의적인 설정이 아니라 기술적 한계임이 밝혀진다. 다양한 가능성을 묻는 로이에게 타이렐이 계속 ‘불가’라고 답하는 이 장면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으며, 더더군다나 책임질 수도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태를 만들어온 서구 문명의 무모함을 지적하고 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 자신의 인식의 힘을 버렸을 때 비로소 인간의 지혜를 얻었다. 그의 미래를 예언하던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어째서 장님인가가 해명된다.
오리엔탈리즘
서구 문명에 대한 비판은 좀더 심화된다. 로이와 데커드의 싸움을 보자. 여기서 프리스를 잃고 얼굴에 피를 바르며 늑대 소리를 내는 로이는 서구인의 아메리카 ‘침략’때 동료를 잃은 인디언의 모습과 겹친다. “어째서 총도 없는 여자를 죽였나?”라고 데커드를 비난할 때는 서구인의 무자비한 인디언 학살과 겹친다. 데커드가 로이를 쇠몽둥이로 때리고 도망가자 로이가 비웃는다.
“때리고 도망가다니 참 비합리적이군. 정당하지도 못하고.”
‘합리성’과 ‘정당성’은 이성의 두 가지 기치다. 서구 문명의 산물인 이 이성의 기치가 타자인 오리엔탈을 대상으로 했을 때 도리어 야만이 되는 것이다.
데커드를 보자. 데커드는 총을 가졌으나 로이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의 ‘공격성’은 육식동물로부터 쫓기는 초식 동물의 그것이다. 서구 문명의 야만성은 자신들의 ‘이성’에 대한 오만과, 역설적으로 그 이성의 허약함으로부터 오는 공포에서 기원한다. 그 공포와 공포성이 로이를 ‘때리고 도망가게’ 만든다.
로이는 죽음을 받아들인다. 타자로, 또 노예로 규정되었던 그는 자신을 규정하고 또 죽이려던 인간을 도리어 살리고 죽는다. 기억이 명멸하는 그의 숙연한 죽음 위로 화해의 비둘기가 날아오른다. 주인 노예의 역전이다. 로이는 ‘윤리’를 획득했으며 ‘인간’이 ‘되’었다.
죽음의 의식
동물은 죽음을 의식할까? 죽음을 의식하는 것은 인간의 특성이다(조르주 바타이유). 영화 속 모든 캐릭터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로이는 그 ‘죽음의 순간을 연장시키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지구에 잠입했다.
로이는 위태롭게 매달린 데커드를 향해 고통스럽냐고 묻는다. 그리고 자신은 그 고통을 지금까지 겪어왔노라고 말한다. 죽음에 대한 의식은 노예의 고통이다. 그러나 그 고통은 수명이 길어진다고 해서 해소되진 않는다. 로이가 겪었던 고통은 인조인간을 사냥하면서 겪었던 데커드의 공포와 똑같다. 죽음에 대한 공포인 것이다.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은 자명한 진실이다. 리플리컨트(인조인간)에게 주어진 4년이라는 수명은 그 자체로는 길지도 짧지도 않다. 그것은 단지 인간에 비해 짧을 뿐이다. 그들의 수명이 인간만큼 길어진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는가?
데커드는 위태롭게 매달려 곧 죽을 운명이다. 로이는 이제 규정된 삶의 시간을 끝내고 곧 죽을 운명이다. 인간도 리플리컨트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점에서 그 순간 데커드와 로이는 동형이다. 로이는 데커드를 살릴 이유가 없었다. 그의 의식은 곧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데커드를 살렸다는 기억조차 무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데커드를 살린 그 순간만은 의미를 갖게 된다. 현재로서 살아가기.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이 화해와 초월의 순간이 숭고미를 자아내는 이유다.
영화 내내 수수께끼처럼 따라 붙는 경시청 형사가 있다. 데커드에게 그는 “그녀가 죽게 돼서 참 안됐어. 하지만 언젠가는 누구나 죽는 게 아닌가.”라는 말을 남긴다. 데커드는 레이첼을 데리고 도망가면서 유니콘을 발견하고는 그의 말을 회상한다. 레이첼과 함께 한다면 그의 수명은 짧아질 가능성이 높다. 현재로서 살아가기.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희망이란 미래에서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유니콘의 비밀
이 ‘전설’적인 영화에 항상 따라붙는 의문이 데커드도 리플리컨트가 아니냐는 것이다. 데커드가 피아노 위에서 비몽사몽일 때 화면 저편에서 달려오는 흰 유니콘의 환상적 영상이 지나간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데커드는 종이 접기가 취미인 경시청 형사로부터 종이 유니콘을 ‘선물’받는다.
데커드가 유니콘 꿈을 계속 꿔 왔을까? 그 꿈은 데커드의 삶과 관련하여 어떤 개연성도 없다. 그런데 환상적 영상으로 영화는 이 꿈을 배치하고 이어 수수께끼 경시청 형사가 데커드에게 유니콘을 남기도록 한다. 형사가 데커드의 꿈을 알았다는 얘기일까?
그러나 전반적으로 데커드가 리플리컨트일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그의 유약함과 공포는 그의 임무와 별 연관성이 없다. 오히려 방해가 되는 특질들이다. 또 술집 무희로 살아가는 조라를 만나서 ‘즉흥적’으로 던져대는 ‘비합리적’ 질문들은 영화에서 ‘인간적’인 기제로 통용시킨 영화 속 약속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니콘은 데커드가 리플리컨트일 가능성을 남겨둔다. 감독이 의도했던 것은 무엇일까? 인간이란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리플리컨트에 불과하다? 지금 영화를 보고 있는 당신은 누구인가? 혹시 당신도 리플리컨트가 아닌가? 영화에 등장한 그 어느 리플리컨트보다 더 정교하게 만들어진 리플리컨트가 아닌가 말이다. 당신은 어떻게 당신 스스로 인간‘임’을 ‘알’고 주장할 수 있는가? 우리의 정체성을 끝까지 되묻게 하는 감독의 예리한 기지가 빛나는 장면이다. (82년 작, 93년 감독판) (정혁)
첫댓글 앞으론 영화도 이해해가면서 봐야겠어요 오늘 느꼈음.. 히히